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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용 Jan 11. 2024

지금 다시 ‘어린 왕자’를 읽는다는 것 (2)

어른을 위한 동화, 생텍쥐페리 '어린왕자'

https://www.beatricealemagna.com/


바깥을 향하는 시선과 [내 마음 들여다보기]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데에 너무 각박하다. 어디가 아픈지도 모르다가 정작 곪아 터지고 나서야 그곳이 상처였음을 인지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어른들의 눈은 대개 바깥을 향해있다. 무슨 옷을 입었는지에 따라 이야기의 권위가 뒤바뀔 정도로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인 세상이다. 그런 세상에서 내 안을 스스로의 힘으로 바라본다는 일이 쉽지는 않다. 어린왕자가 체험한 지구를 보면 그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를 대번에 알 수 있다. 지구라는 공간은 이치에 맞게(그 어떤 꼼수도 없이 정직하게) 시간에 맞춰 돌아가는 실재 공간이다. 그곳의 사람들은 모두 외롭고, 삶은 고단하다. 메아리처럼 남이 한 말을 그대로 따라하는 공간에서 어디로 향하는지도 모르고 어른들은 살아간다. 나한테 의미있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모르는 어른들이 내 안을 들여다볼리 만무하다. 


 내 안을 들여다보는 중요성을 생텍쥐페리는 ‘바오바브나무’에 빗대어 이야기한다. 바오바브나무는 어린왕자가 사는 작은별에 골칫거리다. 잘 관리해주지 않으면 별이 터져버릴 정도로 심혈을 기울여야 하는 존재다. 조종사 역시 “어린이들! 바오바브나무를 조심해야 해!”(29p)라고 경고하는데, 이것은 어린시절 해결하지 못한 성장기의 근심들에 대한 비유로 읽힌다. 그 작은별에 피어나는 바오바브나무들을 그대로 방치한다면, 조종사 말대로 내 인생의 타이어가 터져버려 싫으나 좋으나 함께 동행해야 하는 ‘내적과거아’도 만날 수 없을 뿐 아니라, ‘지금의 나’도 존재할 수 없다. 내 안의 근심들, 상처들을 잘 케어하지 못하면, 특히나 어렸을 적부터 생겨난 근원적인 심리적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생겨나는 문제들을 생텍쥐페리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듯 하다. 조종사의 입을 빌어 “바오바브나무를 그릴 때는 정말 절박한 마음이었다”(30p)고 고백만 들어봐도 알 수 있다.


 뿐만아니라 공교롭게도 어린왕자가 살아가는 작은별의 바오바브나무 개체수를 조절할 수 있게 양을 그려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도 다른 사람이 아닌 성체로서의 나(조종사)다. 어린왕자와 나(조종사)는 양의 그림을 통해 비로소 상호보완적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어쩌면 두 사람은 경험을 거듭하며 서로가 내적과거아/본체임을 알아차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린 왕자 이야기를 하는 것은 그 아이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24p)라는 고백이 예사처럼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https://www.beatricealemagna.com/



[진짜 어른이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어른을 위한 동화’]


 물론 어린왕자가 나(조종사)의 ‘내적과거아’라고 해서 모든 면이 감정적이거나 유아적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조종사의 내적 세계(별)를 탐험하고, 외적 세계(지구)를 체험하면서 어린왕자 역시 내적 성장을 이룬다. 그 과정에서 우리는 인생의 교훈을 얻게 되는데, 이 동화가 일종의 ‘내적과거아’의 성장기로도 읽힐 수 있는 셈이다. 나는 ‘어린왕자’라는 동화가 ‘어른을 위한 동화’라는 관점에서 이 지점이 꽤나 중요하다고 생각하는데, 바로 이 지점을 ‘베아트리체 알레마냐’의 새로운 삽화가 정확하게 그려냈다고 생각한다. (‘어린왕자’ 발간 80주년을 기념해 이탈리아의 삽화 작가 ‘베아트리체 알레마냐’가 새로운 상상력으로 ‘어린왕자’를 재탄생시켰다.)


 기존 생텍쥐페리의 삽화와는 다르게 알레마냐의 삽화는 색채도 다양하고, 원작 그림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조종사’도 등장한다. 하지만 무엇보다 어린왕자의 외모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모습이 ‘어리다’고 하기에는 다소 연륜이 있어 보이는 외모다. 앳되고 철없어 보이는 미소년의 모습이 아닌, 인생의 볼꼴 못볼꼴 다 경험한 듯해 보이는 얼굴이다. 마치 생텍쥐페리에 의해 80년 전에 태어난 어린왕자(내적과거아)가 긴 여정 끝에 큰 깨달음을 얻어 묵직한 인생철학을 우리에게 전달하려는 모습이다. 알레마냐가 일부러 생텍쥐페리 버전의 미소년 어린왕자 이미지를 과감하게 벗어 던진 것은 분명 의도된 연출일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우수에 찬 어린왕자가 던지는 인생 철학’이 더 가슴에 와 닿는다.


 그렇다면 구체적으로 어린왕자는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

 어린왕자는 ‘별’들을 여행하며 다양한 군상들을 만난다. 실은 그가 만난 사람들 면면을 살펴보면, 나(조종사)의 내면이 실제 가지고 있는 다양한 자아의 모습들이다. 내 생각과 권위를 존중받길 원하고(왕), 세상의 중심이 나여야만 하고(허영심 가득한 사람), 그럼에도 슬픔과 부끄러움을 아는 비교적 양심적인 존재(술꾼)다. 스스로가 규칙을 만들어 모든 자아들이 살아갈 수 있게 시스템화 하기도 하며(가로등 켜는 사람), 내가 하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고 의미부여함으로써 자존감을 만들어 내고(사업가), 모든 것을 경험에만 의존해 고지식하게 판단하기만 한다.(지리학자)


 우리의 어린왕자(내적과거아)는 이러한 수많은 군상들을 지나치며 우리네의 인생이 무언가를 놓치고 어딘가를 향해 ‘흘러만’ 간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제 아무리 각자가 중요하다는 것들을 늘어놓지만 우리가 실제 인생 속에서 경험하듯 그런 것들은 형이상학적인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 대신 어린왕자는 네 개의 가시만으로 온 세상에 맞서 자신을 지키고 있는 꽃의 ‘행동’과 ‘노력’에 주목한다. 인생에서 아무리 큰 의미가 없고 덧없는 것일지라도 꽃을 가꾸고, 화산을 청소하며 자신의 영역을 지키려는 그 ‘행동’과 ‘노력’이 궁극적으로 나를 지키는 길임을 설파한다. 


출처 : 시공주니어


[우리가 중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한 것의 소중함]


 어린왕자는 자신의 별 B-612를 떠올리며 꽃을 함께 떠올리는데, 어린시절 기억이 가득할 그 땅에서 피어나는 꽃은 몹시 약한 존재다. 다시 미실다인의 논리를 가져와 어린왕자의 <꽃>을 다시 살펴보면, 이것은 나(조종사)의 ‘감정(혹은 본능)’으로도 읽힌다. 어린왕자가 만난 꽃은 까다롭기도 하고 제 멋대로다. 남탓을 하기도 하고, 타인을 기만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장 아름답게 빛날 때, 그러니까 자신이 가장 잘 드러나고 싶은 순간에 피어나길 원한다. 철저하게 본인 중심적인 태도다.


 그래서일까. 어린왕자 역시 “그 꽃이 하는 말은 귀담아 듣지 말았어야 해”(41p)라며, 그 땅에서 솟아나는 감정들에 너무 관심주지 말 것을 이야기한다. 그런데 조종사를 만나러 지구로 떠나기 직전, 작은별을 둘러보던 어린왕자는 갑자기 ‘꽃’에 대한 태도를 바꾼다. 자기멋대로 꿈틀거리던 까탈스럽고, 때로는 나를 상처주는 ‘감정’을 억누르는게 능사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꽃은 마치 ‘인생 2회차’ 선배처럼 인생의 <성장>에 대해 넌지시 이야기해준다.


 그 작은 땅에서 오랜 시간동안 숨겨왔던 ‘감정(혹은 본능)’을 없는 셈치고 살아가기 보다 “나비를 만나려면 벌레 두세마리는 각오해야지”(44p)라는 자세로 가시 네 개를 가지고 외부 자극에 대항해 가는게 바로 <성장>이라는 것이다. 꽃병안의 꽃처럼 그 감정들을 조심스럽게 다룰 것이 아니라 소위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는’ 과정을 함께 경험해야 비로소 우리는 ‘어른’이 된다는 것이다.


 그런 이유에서일까. ‘내적과거아’ 어린왕자는 성체 ‘조종사’가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몹시도 기대했던 것 같다. 어린왕자는 지는 해를 감미롭게 바라보는 일을 좋아하는데, 이것이 이상하게 단순히 태양의 물리적인 지구 활동을 의미하는 것 같지가 않다. 두번이고 세번이고 반복해서 읽다보니 문득 어린왕자에게는 조종사 그 자체가 ‘해(태양)’였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속 그 작은 공간에서 ‘내적과거아’ 어린왕자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이가 드는 조종사의 모습을 보며 감상에 젖기도 하고 그의 <성장>을 뿌듯하게 지켜봤을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관점으로 보면 ‘마흔 네번이나 해가 지는 걸 보았다’는 말이 의미심장하게 들리기도 한다. 우연의 일치인지 생텍쥐페리는 어린왕자를 출간한 이듬해인, 마흔 네번째 생일을 맞던 해에 사고로 세상을 떠나기 때문이다. 

 “마흔네 번 본 날, 그렇게 슬펐던 거야?”라는 조종사의 물음에 어린왕자는 그래서 아무 대답을 할 수 없었던 게 아닐까. 


출처 : 시공주니어


[Love yourself, 그것도 재능]


‘Love yourself’ 라는 광고 카피처럼 내 자신을 관대한 시선으로 인정하고 사랑하는 것도 재능이다. 어린왕자는 지구에서 여우와의 만남을 통해 비로소 내 안의 엉켜있는 감정들과 어떻게 ‘관계 맺기’를 할 것인지를 배우게 된다. 앞만 보고 달리기만 하면서 무언가를 알아갈 시간도, 여유도 없는 이 삭막한 ‘현재’에서 내 안의 모든 것과 일종의 화해를 하는 것이다.


 우리별 역시 해가 갈수록 빨리 돈다. 인생의 시계는 점점 빨리 돈다.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생명은 서른여섯 살까지는 시간의 이자로 살아가고, 그 이후부터는 시간 그 자체를 갉아먹으며 살아간다. 젊었을 땐 시간 원금이 낳는 이자로 살아가다보니 적자가 생겨도 억울하지 않은데, 원금을 사용해야 하는 시점부터는 시간의 체감 속도가 더 빨라질 수밖에 없다. 


 그렇기에 더 늦기 전에 우리의 시선을 안으로 향하게 하자. 수많은 꽃들(감정들)과 내 꽃(감정)이 같다 하더라도, 내가 관심을 갖고 내가 의식하고 인지한 꽃(감정)은 여느 꽃과 다르다. 내가 시간을 바쳐 눈 여겨 본 나의 감정, 본능, 상처, 내 안의 모든 것은 특별하고 의미가 생긴다. 알레마냐가 작은별의 그 작은 공간을 아주 조금이라도 넓게 만들어주었던 것처럼, 내 가슴 속 작은 공간에 ‘의미’를 부여할 책임이 우리에겐 있다


Hug yourself, Love your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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