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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엠킴 Feb 03. 2023

유람하는 유랑객: 밴쿠버

스산함 속의 따뜻함

유람(遊覽)
_돌아다니며 구경함

유랑(流浪)
_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아다님.

밴쿠버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도시다. 산과 바다를 비롯한 자연과 고층 건물의 도시가 한눈에 담기고, 거리가 아주 스산하고 휑하지만 사람들만큼은 따뜻하며, 나름 가볼 곳 많은 관광지이지만 거주지로서의 도시 냄새가 물씬 풍기는, 그야말로 이중적인 동네다. 그런 골때리는 양면성이 나는 너무나도 마음에 들었다. 밴쿠버에서는 재밌는 에피소드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를 술자리 안줏거리가 되기 전에 여기에다가 먼저 풀어보려고 한다.

밴쿠버 한 장 요약

뜻밖의 선물

나는 '반민초'다. 조금 더 정확히 표현하자면, 싫어하는 건 아니지만 디저트도 그리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굳이 민트초코가 들어간 디저트를 먼저 찾아서 먹지 않는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내손으로 직접 민트맛 초콜릿을 수차례 구매하게끔 한 사람이 있다.

이 날은 조금 위축된 날이었다. 전적으로 내 '잘못'이나 '책임'이라고까지 할 건 아니지만 늦은 시간 타지에서 자칫 일행 전부가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그리고 내가 그에 대한 책임이 아주 없지 않다는 생각을 하니까 덜컥 두려움이 앞섰다. 다행히 결국엔 아무 일도 없었는데도 말이다. 게다가 끼니를 부실하게 때워 배가 고픈 와중에 숙소에 딸린 편의점에서 마땅한 걸 찾지 못해 섭섭해하던 차였다. 정말 날이 아니었다.

아쉬운 대로 그래, 당이나 충전하자, 하는 마음으로 한국에는 없다던 Ritter Sport 민트초코맛을 덜컥 집었다. 그런데 도대체 얼마나 대단한 초콜릿이길래, 무려 $5(한화 약 4,800원)나 하는 게 아닌가. 당황스러움이 이날 하루 누적된 감정의 짐더미에 또 하나 얹어졌다. 이왕 이렇게 돈 쓰게 된 김에, 여행하며 급격히 불어난 동전이나 처리하고 싶어 동전 지갑을 한참 뒤적거리는 와중에 갑자기 뒤에서 한껏 들뜬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That's a really good choice! I mean, the chocolate."

Ritter Sport 초콜릿

한국에서는 이렇게 초면인, 아니 스쳐 지나가는 낯선 사람에게 말을 거는 일이 흔하지 않기에, 순간 당황해서 "Is it?" 정도로만 대답하고 머릿속으로는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배고프고, 아직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그런 나를 아는지 모르는지, 이 해맑은 현지인은 이방인인 나에게 자신의 최애 초콜릿에 대한 찬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와중에 여태 동전을 뒤적거리던 나는 점점 정신줄을 놓고 있었다. 상대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고, 계산은 빨리 하고 싶고, 나 때문에 내 친구들이 그새 더 어둑어둑해진 길거리에서 나를 기다리며 오래 서있는 상황이 생길까봐 조마조마하고 있던 찰나였다.

"Just because it's my favorite!"

그러더니 그는 주머니에서 $5를 꺼내 계산대에 놓았다. 


사실 아직도 그날 일을 생각하면 꿈같다. 상상이나 했겠는가, 여행지에서 서로 이름도 모르는, 심지어 처음 보는 사이인데, 그도 모자라 캐나다 현지인이 동양에서 온 이방인에게 5000원짜리 초콜릿을 선뜻 사주다니. 상상은커녕 지금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뒤집힌 룩(Rook) — 골때리지만 감성과 낭만이 있다

주변 사람들에게 깜짝 선물을 하는 것을 즐기는 편이다. 이렇게 글을 끄적이고나서부터 그나마 전보다는 말을 둥글게 하게 됐지만, 여전히 상대방이 내게 얼마나 큰 사람인지를 표현하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일상 속에서 상대방이 생각날 때마다 가볍게 쪽지 — 메시지든, 편지든, 엽서든 — 를 주거나 소소한 선물을 주는 편이다. 그런데 사실 밴쿠버에서의 일이 있기 전까지만 해도 그런 선물이 어쩌면 내 이기적인 욕구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주저한 적도 있었다. 상대방이 기뻐하는 걸 보고 겨우, '아, 나 이 사람에게 꽤 표현하고 있구나', 하고 확인하고 안도하면서 동시에 '나는 아직도 내 언어로만 의사소통하려고 하는구나', '나는 늘 확인받고 싶어하는구나', 하고 씁쓸해 했던 것이다. 막상 내가 선물을 받고 나니 꼭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태도는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유랑객인 내게, 평소의 나라면 절대 먹을 것 같지도 않은 초콜릿, 그리고 그걸 사준 현지인의 해맑은 웃음과 여유가 너무나도 위로가 됐다. 요즘도 예상치 못한 기쁨을 발견할 때면 이 에피소드가 문득 떠오르면서 아, 그 때 이름이라도 물어볼걸, 하고 아쉬워한다. 그리고 그에게 받은 만큼 내 주변에게, 그리고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도 한 번쯤은 선뜻 여유로운 호의를 베풀겠다고 다짐한다.

아무리 예쁜 키링과 엽서를 찾았대도, Ritter Sport 페퍼민트 맛이 내게는 밴쿠버 최고의 기념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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