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클리에서 잠시 정착하기까지
chill out:
_ to relax completely, or not allow things to upset you:
UC Berkeley Law 건물 앞 광장에서 51B 버스를 타고 종착역까지 가면 버클리 마리나(Berkeley Marina)에 도착한다. 현재는 거의 공원으로 이용되지만 한때는 샌프란시스코까지도 가는 여객선(ferry)을 탈 수 있는 선착장이었다. 버클리는 큰 도시가 아니기에 도심에서도 비교적 쉽게 여유로움을 느낄 수 있지만, ‘물멍’ 하면서 고즈넉한 분위기를 즐기기엔 이만한 곳이 없다.
버스에서 내려 인도를 따라 천천히 걷다보면 다양한 광경을 볼 수 있다. 고개를 돌려 바다를 보면 정면으로 밀려오는 바다 짠내 너머 샌프란시스코 도심의 건물들과 샌프란시스코 베이(San Francisco Bay) 건너 바로 맞은편에 위치한 금문교까지도 보인다. 금문교를 바라보며 나처럼 산책하는 사람들도 몇몇 보이고, 어떤 이는 금문교가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자리를 잡고 핸드폰에 눈길 한 번 주지 않으며 낚시를 즐긴다. 또 조금 걷다 보면 요트 선착장이 나오는데, 그곳에서 잔잔한 수면을 가로지르며 카약을 즐기는 사람도 볼 수 있다. 그 주변을 갈매기가 서성이며 먹을 것이 없나 기웃거린다. 공원 곳곳에 깔린 푸른 잔디에는 돗자리를 펴고 앉아 피크닉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고, 5분에 한 번 꼴로 다람쥐가 그 잔디밭을 가로지르며 뛰어다니는 걸 볼 수 있다.
이곳만 벌써 5번도 넘게 왔다. 왜 하필 이곳일까, 캠퍼스에서도 개를 산책시키는 사람들과 잔디밭에서 피크닉을 하는 학생들은 널리고 널렸는데 왜 그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꾸 30분이나 걸리는 곳까지 와서 물멍을 고집할까, 하고 돌아보니, 버클리에서 이곳만큼 탁 트인 공간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래도 전공 수업을 두 개나 듣고 — UC 버클리에서 CS 전공 upper division 수업을 한 학기에 두 개 이상 듣는 것은 그렇게 추천할 만한 일은 아닌 것 같다 — 모니터와 도서관을 가장 자주이기 때문에 탁 트인 공간에서도 폐쇄적인 환경에 갇혀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주기적으로 환경을 바꿔줘야 살 수 있는 사람인 것이다. 몇년 째 일관되게 철새같은 체질(?)인 나 자신에게 새삼, 웃음이 나왔다.
캘리포니아의 지하철 중에는 bart라는 것이 있다. 별건 아니고 서울메트로 같은 메트로 회사 중 하나인데, 수도권 지하철에 비하면 말도 안 되게 비싼 가격이긴 하지만 bart를 타면 여기 버클리에서 67km 떨어진 샌호세(San Jose)까지 2시간도 안 돼서 충분히 갈 수 있다. 버클리에서 Walnut Creek이라는 도시까지는 bart를 타면 직행으로 갈 수 있어서 정말 아무런 계획도 없이, 어떤 도시인지도 제대로 찾아보지 않은 채 다녀와봤다.
Walnut Creek은 찾아본 바에 의하면, 어르신들이 은퇴하고 편하게 사는 동네라고 한다. 과연 부촌의 느낌이 물씬 났다. 곳곳에 네일, 헤어살롱, 타이 마사지, 소품샵, 인테리어 가게 등이 위치해 있고 각종 편의시설과 백화점 등이 꽤 많았다. 공원과 도서관 등 여가시설도 잘 조성돼있고, 아울렛마저도 하나의 공원처럼 잘 가꿔놓은 도시였다. 버클리와 마찬가지로 고층 건물이 없고 주택과 상가들이 일관적으로 낮게 지어져서 전반적으로 거리가 참 예뻤는데 거기에 센스있게 스프레이 벽화가 더해져 마냥 어르신 동네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는 듯했다. 관광지가 아닌, 사람이 사는 동네라서 더욱 와닿았을지도 모르겠다. 관광객을 끌어당기기 위해서 조성한 것이 아닌, 이 동네 주민들의 편안함과 여유로움에서 나온 도시의 모습임이 드러나서.
그런 도시에 어떤 것도 계획하지 않은 채로, 심지어는 무엇이 있는지조차 모르고 와서는 거리 곳곳을 천천히 거닐다 눈에 띄는 곳에 들어가 한참을 구경하고, 두 손은 텅 비었지만 얼굴만은 웃음으로 가득 차서 나오기를 몇 시간동안 반복했다. 개성있는 벽화 앞에서 멈춰 한참 사진을 찍기도 하고, 불쑥 들어간 어린이 서점에서 동화책을 넘기며 아이처럼 깔깔 웃었다. 정보없는 무계획 여행, 생각보다 너무 괜찮은지도.
요즘 가장 많이 떠올린 단어는 chill out이다. 왜 버클리에 왔냐고 물어보면 농담조로 놀러왔다고 대답하긴 하지만, 계획짜고 온몸이 피곤하도록 놀러 온 게 아니고 정말 ‘chill out’하는 시간을 가지러 왔다. 과제에 휘둘리는 시간이 아직은 조금 더 많지만, 정신없는 와중에도 틈틈이 숨쉬는 시간을 확보하고 있고 이리저리 실컷 돌아다니면서 즐겁게 유람하고 있다.
Marina든 Creek이든, 내가 좋아하는 장소는 항상 물을 끼고 있는 것이 새삼 신기하다. 갑자기 물에 휩쓸려 여기버클리까지 떠내려온 것 같은데, 어느 새 그 물살마저 좋아진 것 같다. 다음엔 어디로 떠내려갈지 꽤나 기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