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이곳은
뭐야, 변한 거 아무것도 없잖아.
명색이 샌프란시스코씩이나 되면서도 승무원이 직접 입출국 심사를 하는 SFO 공항을 비웃기라도 하듯, 인천공항의 입국심사는 생체인식과 사전설문 작성만으로 1분도 채 되지 않아 끝나버렸다. 그건 1분이 "걸린" 게 아니라, 그냥 luggage claim을 하는 길에 — 미국에 얼마나 나가 있었다고 한국어가 생각이 안 나는지 참 우스울 따름이다 — 스쳐지나간 최첨단 통로나 다름 없었다. 그래 이거지, 이게 맞는 거지,라며 반가운 마음으로 카트를 끌고 공항버스 터미널까지 내달렸다.
우리 동네는 정말이지, 네 달 전이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었다. 어쩌면 당연하다. 무언가가 크게 뒤바뀌기엔 네 달이라는 시간은 너무 짧았다. 아, 생각해보니 못보던 카페들이 좀 생겨난 것 같다. 집앞 주차장 바로 앞에는 원래, <너의 요구>라는 그릭요거트 전문점이 있었다. 교대역에는 그릭요거트 전문점이 두 개 있었는데, 다른 하나는 우리집에서 도보로 7분 정도 걸리는 대신 가격이 상당히 합리적이었고, 여기는 집을 나가자마자 바로 위치한 곳이지만 조금 비싸서, 시간을 돈으로 사는 셈치고 큰맘먹고 구매해야 했었다. 그 <너의 요구>가 그새 사라지고 <FIG COFFEE>라는 간판이 달려 있었다. 익스테리어와 창 너머로 언뜻 보이는 인테리어는 그대로인 것 같았다.
참 흥미로운 일이다. 그 옆에 위치한, 10년도 더 된 아이피씨전산 어쩌구 하는 컴퓨터 수리점은 도무지 사람 들락거리는 걸 본 적이 없는데도 늘 십수년된 간판 디자인을 고수한 채로 버젓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바로 옆에 위치한 스키용품 판매점도 마찬가지다. 내가 처음 이 동네에 왔을 때부터 단 한 번도 간판 디자인을 바꾸지 않은 채로 그 빌딩 일층을 떡하니 지키고 있다. 이 동네에 수리점이 그렇게 없나, 하기사 스키용품 판매점은 여기가 유일하지,싶지만 요즘 누가 그런 전당포같이 생긴 수리점을 찾고, 대체 누가 일 년에 몇 달 타지도 못하는 스키를 사두는지 궁금해졌다. 왜 모두가 찾는 카페는 네 달 주기로 이름을 바꾸는데, 아무도 안 찾는 구식 매장은 오래도록 자리를 지키는지도 말이다. 그런 매장이 있으니 내가 몇 달만에 돌아와도 낯섦을 느끼지 않는 것 같기도.
아무도 없는 줄 알았던 집에는 어머니와 동생이 있었다. 나는 잠깐 내가, 구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서 네 달 살다 온 자식새끼가 아니라, 본교로 내려가 수업듣다 이주일 만에 올라온 딸처럼 느껴져서 조금 시시해졌다. 어쩌면 그게 우리 가족의 아이덴티티이자 매력인지도 모르겠다. 어, 왔어? 하고 도로 들어가버리는 무심하고 서툰 애정. 오히려 따뜻하고 감성 넘치는 재회였으면 낯설 뻔했다. 역시, 변한 건 아무것도 없다.
짐만 놓고 달려간 병원에서, 휠체어를 끌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아빠도 똑같았다. 아빠는 나만 보면 챗지피티 이야기를 하신다. 미국에서 전화를 할 때나 한국에서 마주보고 앉아 수다를 떨 때나 아빠는 철학적이거나 기술적인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는 젊은 상대가 있고 그게 당신의 큰딸이라는 게 몹시 기쁘신 모양이다. 나는 대화에 참여하는 상대방이면서도 동시에 제삼자의 입장으로 간만에 만나는 그런 아빠를 관찰했다. 역시, 똑같아 우리 아빠는.
택시를 불러주려는 아빠를 말리고 병원을 나서려다가 아빠가, "그래도 어디 한 번 안아보고," 하는 말에 눈시울이 조금 시큰해졌다. 나보다 체구가 큰 사람한테 안기는 게 몇 달만인지 모르겠다. 아빠는 앉아있었지만, 여전히 아빠는 나한테 크고 높은 사람이었다. 에라이, 야밤에 괜히.
이건 돌아오던 길에 본 장미. 역시 한국의 5월은 장미지.
이상 '역시'로 가득 찬 귀국이야기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