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순 속 이야기
영화 <바비> 개봉에 앞서 정서경 시나리오 작가와 그레타 거윅 감독의 인터뷰 영상이 떴다.
‘바비’의 원래 이미지에 대한 질문이 항상 흥미로웠어요. … 바비는 여성이 신용카드를 들고 다니기 전에 달에 갔으니까요. … 동시에 그런 인형은 비현실적이죠. 전 이런 모순을 외면하기보단 그 안에서 이야기를 찾는 편이에요.
_그레타 거윅, < 정서경 작가 X 그레타 거윅 감독 인터뷰> 중에서
시나리오 작가와 영화감독은 실로 흥미로운 직업이다.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도 이내 “외면”할 수 있는 대상에서 이야기를 끄집어낸다니, 한 번만이라도 그들이 평소에 무슨 생각을 하며 사는지 머릿속을 들여다보고 싶은 심정이다.
이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는 <인어공주> 때와 마찬가지로 매우 조심스럽다. 전혀 모르는 사람이 봐도 자명하게 느낄 정도로, 이 영화는 페미니즘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다소 풍자적인(sarcastic) 방식으로 우스꽝스럽게 그려지고, 궁극적으로는 사춘기, 자아정체성 등의 메시지와 연결되면서 칼날이 다소 무뎌졌지만, 그럼에도 민감한 주제를 당당히 다룬다는 점에서 호불호가 무척이나 갈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바비>를 논할 때 핑크색을 빼놓을 수가 없다. 바비랜드를 온통 핫핑크로 물들이고도 모자라 각종 의상들도 모두 핑크색 계열로 통일해버려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이 아플 지경이었다. 뒷이야기가 꽤 재밌었는데, 영화 세트장에 바비랜드를 구현하기 위해 로스코(Losco) 사의 형광핑크색 페인트를 대량으로 매입하여, 전세계 공급 물량이 크게 부족해졌다고 한다.
다시 봐도 어지러울 지경이다.
또 재미있는 비하인드는, 감독이자 각본가인 그레타 거윅이 <바비>의 각본을 쓸 때, 캐스팅이 되기도 전에 이미 주연이 될 배우들을 염두에 두고 캐릭터를 구상했다고 한다. 캐스팅 시기에 마고 로비는, 꼭 자신이 바비 역을 맡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그가 제작을 맡은 데다가 이 영화의 판권을 샀기 때문에 ‘바비' 역을 맡는 것은 사실상 확정이었고, ’켄‘은 라이언 고슬링을, ’글로리아‘는 아메리카 페레라를 … 모두를 상상하며 글을 썼기 때문에 그들이 아니면 안 됐다고. 특히 안면이 없었던 라이언 고슬링을 열심히 설득했다고 한다. 우연찮게도, 거윅 감독의 캐스팅 제의를 받은 후, 고슬링은 자신의 집 마당에 내팽개쳐져 있는 딸의 켄 인형을 보고, 거윅에게 "당신의 켄이 되어드릴게요,"라며 캐스팅을 수락했다.
테일러 스위프트의 무대 뒤 삶을 조명한 <미스 아메리카나>에서, 스위프트가 이런 말을 했다.
스위프트가 말하는 ”충분한(enough)” 몸매는 감히 짐작건대 가상의 캐릭터들이 정립한 미의 기준일 것이다. 디즈니 공주들과 바비 인형이 그 대표적인 주범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요즘 디즈니 캐릭터들 중에서 “건강미”를 보여주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지만, 적어도 2010년도 후반까지는 그렇지 못했다. 바비 인형은 여전히, 꿋꿋하게 자신의 몸매를 유지하는 중이다.
이 몸매는 정말 ‘가상’이기에 가능한 몸매이다. 바비의 신체 비율로는 절대로 몸을 지탱할 수 없다는 분석도 실제 존재한다. 그러나 오랫동안 소비자들이 동경 내지는 원하던 몸매임은 분명하다. 남녀를 불문하고 이러한 가상 캐릭터들은 사람들에게 신체에 대한 환상을 심어주었고 —캐릭터들이 다 미인이니까— 이를 미의 기준으로 삼게 되었으리라. 극중 마고 로비가 연기한 ‘전형적인(stereotypical) 바비’ 외에, 지금은 제작이 중단된 다소 현실적인 느낌의 바비 인형들이 소개되는 대목에서 당시 소비자의 수요가 어땠는지 짐작하게 한다.
[NARRATOR] Barbie is all these women. And all these women are Barbie.
[SASHA] You've been making women feel bad about themselves since you were invented.
모두가 원하지만 그렇게 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빛과 그늘을 모두 지닌 입체적인 캐릭터이지 않은가?
감독이 이러한 비현실의 결정체인 바비 인형에서 양면성을 찾았다는 사실이 실로 흥미롭다. 비현실적인 몸매와 당대 여성으로서는 가질 수 없었던 직업을 모두 가진 ‘가상’의 캐릭터이고, 바로 그 점이 바비를 무한한 가능성의 캐릭터로 만들어준다. 그렇게 바비는 조각같은 얼굴과 신체비율의 소유자이자 대통령, 의사, 물리학자, 작가, 우주비행사가 되어 소녀들에게 “말도 안 되는” 환상과 더불어 꿈과 희망을 심어주었다는 묘사가 인상적이었다. 정말, 바비는 양면성을 지닌 특이한 캐릭터이다. 바비의 세계는 현실 속 아이들에게 비현실적인 여성상을 주입시키지만, 그 세계 속 남성캐릭터 켄은 그저 바비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수동적인 조연일 뿐이기 때문이다.
<바비>는 정말 노골적이고 가감없는 대사로 쐐기를 박아 관객들이 한대 얻어맞는 기분이 들게 만든다. 때로는 장면 연출과 캐릭터간의 구도로 페미니즘과 현실을 은유하기도 한다. 과하다 싶은 장면도 많았지만, 감독이 코믹한 분위기 속에서도 디테일에 신경을 많이 썼다는 것이 느껴져 깔깔대면서도 때로는 감탄을 내지르며 영화를 감상했던 것 같다.
영화에서 발견할 수 있는 페미니즘적 요소는, ‘가부장제’를 외치는 켄의 대사나, 한 아이의 엄마와 여성으로서 사회를 살아가는 글로리아의 고충이 담긴 대사 외에도 정말 많다. 은근히 드러난 요소들로는,
1) ‘켄’들 사이의 분쟁을 조장하는 ‘바비’들
어디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여자가 바람을 피우면 남자들은 서로 여자를 차지하기 위해 상대를 죽이려 하지만, 남자가 바람을 피우면 여자들은 연합하여 남자를 죽일 거라는 말. 나름 생물학적인 분석이라고는 하는데, 정말 사실인지 여부는 솔직히 잘 모르겠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여성들이 서로 연대하는 존재라는 것. 페미니즘에서 가장 중요하게 내세우고 있는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 같다. 현실세계에서 가부장제를 배워 온 켄(라이언 고슬링)은 바비랜드에 이를 정립하려고 하고, 바비들은 서로 연대하여 ‘켄’들 사이에서 질투심과 적개심을 조장함으로써 그런 ’켄‘들을 저지한다.
연대하여 자신들의 권리와 가능성을 지켜내는 여성들을 그렸다는 점에서 감독의 페미니즘 연출을 읽어낼 수 있었다.
2) “남자가 세상을 지배해!”
모지리 캐릭터인 켄의 시선과 대사로 블랙코미디로서의 연출을 성공적으로 해낸 장면 중 하나이다. LA의 건물에 들어간 켄이 오직 남성만이 등장하는 광고를 보고 승리감에 휩싸여 남성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결론을 내리는 장면이, 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며 사람들을 박장대소하게 만들지만 그렇다고 마냥 웃기만 할 장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인간 세상의 첫인상, 즉 어떤 사전 지식도 없이 바라본 인간 세상의 겉모습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마치 “지나가는 개가 봐도 우리 사회는 남성중심적이야!“라고 말하는 것 같다.
블랙코미디이기에 다소 과장된 설정이라는 것은 감안해야 할 것이다. 켄이라는 캐릭터 자체가, 지나치게 여성중심적이고 남성은 그저 들러리일 뿐인 바비랜드에서 바비(마고 로비)를 향한 구애마저 번번히 실패하던 패배자였다는 점도 대사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요소일 테다. 다만 이렇게 과장해서라도 아직은 개선의 여지가 많은 현대사회의 이면을 꼬집으려 했고, 동시에 어딘가 모자란 켄의 캐릭터로 웃음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영리한 전략을 취했다고 생각한다.
페미니즘이 드러난 영화를 논할 때 좋지 않은 예로 늘 <블랙 위도우>를 꼽는데, 이 영화에 등장하는 모든 남성 인물들은 -지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멍청하거나, 악역이거나, 결국 죽는다.” <바비>는 결국 누구에게도 의존적이지 않은 그 자체의 ‘켄‘으로 거듭나는 결말을 시도했다는 점에서 남성 혐오의 가능성을 차단하기는 했지만, 페미니즘을 내세우는 영화에서, 특히 영향력 있는 영화에서 종종 남성이 켄처럼 지나치게 무능·무력하고 별볼일없는 존재로 그려지는 현실에 대해서는 씁쓸함을 지울 수 없었다. 그러나 예전에는 반대 상황이었을 테고 그것에 누구도 대부분 눈살을 찌푸리지 않았을 것을 생각하면 왜 이런 연출을 보여주는지도 이해가 간다.
궁극적으로 이 영화에서 내세우고 싶은 페미니즘은 극단주의적이지 않다고 느껴진다. 집도, 전화기도 무엇도 가진 것 하나 없는 켄이, ’켄‘은 ’바비‘라는 수식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캐릭터라며 한탄하자 바비가 말한다.
[KEN] But it’s “Barbie and Ken”. There is no just “Ken”.
[BARBIE] Maybe it’s Barbie and… it’s Ken.
누구에게도 의존적이지 않은 그 자체로의 '나'를 추구하자는 뜻으로 해석된다. 종합적으로, 연대, 평등, 다양성, 자아정체성 등 다분히 현대적인 키워드를 다양하게 보여주고 있는 영화인 것 같다.
러닝타임이 결코 짧지 않았음에도 짧다고 느껴질 만큼 몰입감도, 재미도 대단한 영화라 생각한다. 슬슬 상영관에서 내려가는 게 머지않은 것 같은데, 꼭 스크린으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