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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흥의 두근거림과 계획의 정돈됨

MBTI: Perceiving vs. Judging

by 정수진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것 같습니다. 운전면허를 따고 중고차를 구매하신 아버지께서 아무 계획도 없이 갑작스럽게 여행을 떠나자고 하셨죠. 지금은 터널과 고속도로가 많이 뚫려서 3시간 남짓 평지에 가까운 길을 운전하면 쉬이 갈 수 있는 동해안이지만, 그때만 해도 한계령, 진부령, 대관령 등 이름만 들어도 험준해 보이는 고갯길을 꼬불꼬불 아슬아슬 넘어야 했답니다. 부모님과 동생과 저는 동해안을 돌며 적당해 보이는 아무 해변에나 민박을 잡고, 수영을 하고, 홍합을 잡고, 여름의 끝자락을 정말 즐겁게 보냈지요.


그리고 돌아오는 길, 대관령을 넘는데 사고가 터졌습니다. 우리의 연식이 조금 되신 자동차가 퍼져버린 것이죠. 엔진덮개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데, 보닛을 열어 봤지만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죠. 다행히, 지나가던 친절하신 트럭 아저씨의 도움을 받아 대관령 휴게소의 차량정비소까지 차를 간신히 끌고 가서 수리를 하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해피엔딩이죠.



사실, 저희 가족은 매 여름휴가를 갔었어요. 그중에는 유명한 여행지도 제법 있었고, 훨씬 훌륭한 숙소와 맛집을 전전한 여행도 많았는데, 왜 저는 어릴 적의 여행하면 저 여행이 떠오르는 것일까요? 아무것도 정해지지 않은, 기차 편이나 숙소예약도 없이 정처 없이 떠났던 첫 자동차 여행. 심지어 자동차 앞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는, 덜컥 걱정이 되는 한편 왠지 두근두근했던 그 재난(?)의 경험조차 그 여름에 12살 계집애가 만끽했던 자유로움의 일부가 된 것이겠죠. 어쩌면 저는 계획대로 모든 것이 잘 이행되었을 때보다 무언가 새로운 요소가 나타나 일상을 뒤흔들 때 더 흥미를 느끼는 유형인가 봅니다. 네, 저는 소위 말하는 MBTI "P"인 사람입니다.




MBTI의 마지막 글자는 "Perceiving"의 "P""Judging"의 "J"입니다. 이들은 우리가 외부세계와 상호작용하는 데 있어서 선호하는 방식을 나타내고 있지요. 융통성 있고, 즉흥적이면서 탐색을 선호하는 유형이 "Perceiving"이라면, 계획적이고, 체계적이면서 일을 빠르게 마무리하는 것을 선호하는 유형이 "Judging"입니다.


"지각하다" 혹은 "이해하다"로 번역되는 "perceive"라는 동사는 라틴어의 "percipere"에서 왔습니다. "감각을 통해 받아들이다"의 뜻을 가지고 있는 이 라틴어 동사는 다시 "per(=thoroughly / 완전히)"라는 접두어와 "capere(=to seize, take/ 잡다, 취하다)"라는 어근으로 나누어집니다. "완전히"의 뜻을 가지고 있는 "per"라는 접두어를 가지고 있는 단어들은 주로 "끝까지, 철저하게, 강하게"라는 의미를 갖게 되어 무언가를 온전히 해내는 경우를 가리키는 단어들이 많습니다. "perfect(완벽한), " "persist(계속하다), " "pervade(만연하다, 우세하다), " "perform(수행하다, 공연하다), " "permit(허락하다), " "persuade(설득하다)"등이 이에 해당합니다.


"perceive"라는 단어를 이루는 또 다른 부분인 "capere"의 어근을 가진 단어들은 "per"를 가진 단어들보다 수가 많고 뜻도 보다 다양합니다. 주로 "~ceive" 혹은 "~cept"의 형태를 취하는 이 어근을 가진 단어로는 "receive(받다)" "conceive(생각하다=함께 무언가를 취하다)" "deceive(속이다=진실을 빼앗다), " "accept(받아들이다/~쪽에서 취하다), " "concept(개념/함께 취한 생각), " "precept(전제/미리 취하다), " "except(~를 제외하고/밖으로 잡아내다), " "intercept(간섭하다/가운데에서 채가다)" 등이 있습니다. 대부분 여러 방향으로 무언가를 잡거나 빼앗거나 하는 동작들을 나타내지요.


"Judge"라는 동사도 라틴어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동사네요. 이 단어의 근간이 되는 "judicare"라는 라틴어 동사는 "법적으로 선고하고 판단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좀 더 분해해 보면 "jus(법)"와 "dicare(선언하다)"가 되네요. 관련 단어들은 대부분 "법, 정의, 또는 판단"과 관련된 뜻을 가지고 있는 단어들입니다. "justice(정의), " "injustice(불의/정의롭지 못함), " "judicial 또는 judiciary(사법의, 사법부), " "prejudice(편견/미리 판단함)" 등의 단어들이 이에 해당합니다.




단어의 어원과 MBTI에서의 의미를 살펴보니, "perceiving"이 주변의 많은 것들을 죄다 받아들여 이것저것 탐색하는 느낌이라면, "judging"은 어떤 규칙을 정하고 그에 따라 삶을 효율적으로 판단하고 시행하는 느낌입니다. 여행의 경우를 본다면 "J"유형의 사람들은 장소와 일정이 결정되면 당장 시간대별로 엑셀 시트에 일정을 작성하지만, 옆에 느긋하게 누워있던 "P"인 사람들은 "가다가 맘에 드는 곳 있으면 들어가 보자~^^"를 웅얼거리는, 그런 장면이 떠오르는 것이죠.


사실 현대의 성인이 "무계획"으로 산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아무리 저처럼 무계획으로 사는 사람도 아이들 교육, 가정사, 제 직업, 사회생활, 이런저런 배움과 취미생활을 저글링(Juggling) 하다 보면 간략하게나마 계획이라는 것이 필요한 법이지요. 물론 15분, 30분 단위로 계획을 짜서 시행하는 주변의 파워 J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요.


"J"의 성향이 가장 돋보일 것 같은 곳은 어디일까요? 아마 은행, 회사, 군대 정도가 되려나요? 그런데, 군대 중에서도 가장 빡세다는 해병대. 미국 해병대(U.S. Marine Corps)의 좌우명(motto)은 예상을 뒤엎습니다.


Improvise, Adapt, and Overcome
상황에 맞게 대처하고, 유연하게 적응하며, 끝내 극복하라.


가장 철저하게 계획하고, 훈련하고, 효율적으로 움직일 것 같은 군대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그것은 상황에 적절한 대처와 적응 즉 유연함인 것이죠. 어쩌면 가장 이상적인 것은 일상을 "J"로 살다가도 새로운 국면이 내 앞에 펼쳐졌을 때, 좌절하거나 짜증 내지 않고 내 안에 있는 "P"의 성향을 끌어내어, 새로운 상황을 호기심 있게 살피고, 대처하고, 적응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요?


어쩌면 이것은 어쩔 수 없는 "P"의 자기변명일 수도 있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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