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는 이모로, 또 다른 하루는 여자친구로
몇 해 전부터 주말 이틀이 루틴처럼 돌아가기 시작했다.
산도적 같은 놈과 결혼한 언니 덕에 나는 금세 이모가 되었다. 3살 6살 그 올망졸망한 존재들이 내뿜는 솔직 발랄함과 예측불허함, 에너제틱함은 바라만 봐도 꽤 사랑스러웠다. 게다가 똥강아지들과 보내는 시간은 대략 6시간을 넘기지 않았으므로, 나는 육아의 쓴맛은 철저히 피한 채 단맛만 취했다고 볼 수 있다.
김밥씨와의 만남은 규칙적이고도 단순했다. 종교가 없는 우리는 주일학교처럼 주말마다 꼬박꼬박 데이트를 했다. 그는 산들바람 아래 낮잠과도 같은 달콤함과 평온함을 가져다주었다. 그와 보내는 시간은 대부분 6시간에서 7시간을 넘기지 않았는데, 이 역시 관계의 쓴맛은 철저히 피한 채 단맛만 취했다고 할 수 있다.
사실 나는 싫어하는 인간이 너무 많다. 이유는 내가 예민하게 싫어하는 구석을 가진 인간들이 너무나 자주 목격되기 때문이다. 본심과 다르게 말하는 사람, 부지런히 셈을 굴리는 사람, 얄팍한 정치질하는 사람을 볼 때면, 마치 치운 지 한참 지나도 가시지 않는 비릿한 생선 냄새를 맡은 기분이다.
예민하기 때문에 오히려 나는 인간관계에 무심하게 되었다. 웬만하면 인간의 뒷면은 들춰보고 싶지 않고 나 또한 그들이 싫어하는 구석이 들춰지지 않길 바라는 마음. 그나마 최측근인 김밥씨와 귀여운 똥강아지들에게조차 예외가 없다. 앞으로도 나는 이렇게 살겠지. 독고다이로. 사람들과 거리를 두고 혼자 사는 중년 여성으로.
문뜩 영화 '세상의 모든 계절'의 메리가 떠올랐다. 톰과 제리 부부를 질투하고, 지나간 젊음을 부여잡고, 헛된 희망을 품으며, 사랑을 갈구하는 중년의 가난한 여성 메리. 그녀처럼 베베꼬여버리면 어떡한담. .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하나밖에 없었다. 변화가 필요해. 자연 속으로 들어가자!
그 언젠가 티브이에서 숲 속 컨테이너 하우스를 본 적이 있다. 각박한 시대, 지친 현대인들은 자연 속에서 쉼을 원하지만 하루아침에 산으로 들어가 자급자족하며 살 수도 없는 노릇. 그리하여 나온 차선은 평일과 주말의 물리적 환경을 철저하게 구분 짓는 라이프다.
그들은 금요일 퇴근 후 지방의 컨테이너 하우스로 떠났다. 그곳에서 이틀간 텃밭을 일구기도 책을 읽기도 하는 등 각자의 휴식을 취한 뒤 일요일이 되면 집으로 귀가한다. 평일은 도심에서 주말은 숲 속에서 보내는 것이다. 어찌 보면 캠핑과 비슷하면서도 좀 더 안정적이고 프라이빗해 보였다.
구미가 당겼다. 가격도 괜찮아 보였다. 어림잡아 1,2천만 원 혹은 그 이하로도 충분히 가능했다. 물론 1,2천 원도 아니고 적은 돈은 절대 아니지만 집을 가지는데 저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하지만 나는 돈이 없다. 말 그래도 수중에 땡전 한 푼 없다.
나의 전재산을 아이 셋 키우는 나보다 3살 많은 여성에게 몽땅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24개월치 전세자금에 전재산을 바쳤다. 그들은 잘못이 없다. 부디 주인네 부부의 학원경영이 망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그래서 나는 호화로운 컨테이너 하우스에 대한 로망을 버릴 수밖에 없었다. 대신 가벼운 마음으로 서울 이곳저곳의 숲을 찾기로 했다. 이것은 등산이라기보다는, 인간과 거리두기 하는 인간이 자연 속에서 숨 쉬고 싶어 숲을 어슬렁어슬렁 거니는 것에 가깝다.
첫 번째 목적지는 서울시 서대문구 안산자락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