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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abino Aug 08. 2023

원하는 대로 하루가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아, 파리

 굳이 지지 않아도 될 짐을 구태여 지는 경우가 있다. 불문과인 나는 프랑스에 온 지 6개월이 넘었는데 아직 오르세 미술관과 루브르 박물관에 가지 못했다는 사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결국 칼을 꺼내 들어 파리행 기차표를 끊었고 하루를 온전히 오르세 미술관을 관람에 할애하기로 마음먹었다. 온 동네에 오르세 미술관에 간다고 소문을 내자 프랑스 친구들은 정말 예쁜 미술관이라고 잘 갔다 오라고 장단을 맞춰주었다. 아침 9시, 공복으로 기차를 탔다. 무엇을 먹어야 원활한 미술관 관람을 할 수 있을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따끈한 국물이 있는 쌀국수가 떠올랐다. 쌀국수 맛집에 갈 생각에 들뜬 채 한여름에도 선선한 파리에 도착했다. 


 쌀국수 가게에 가려고 지하철을 탔다. 자리에 앉아 핸드폰을 보다가 오픈 시간이 지났는데도 쌀국수 가게가 영업하고 있지 않은 걸 발견했다. 자세히 들어가 보니 일요일은 휴무일이었다. 목적지를 잃은 채 오페라 역에서 내렸다. 식당을 찾기 귀찮아 맥도널드를 향해 갔다. 맥도널드보다 버거킹이 다섯 발자국 가까이 있어 버거킹에서 밥을 먹었다. 허기를 달래면서 기왕 여기까지 온 거 오르세 미술관에 가기 전에 오페라 가르니에(Opéra Garnier)를 구경하기로 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앞에 서자 탄식을 금치 못했다. 건물 전면이 공사 중으로 가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화려한 외관을 볼 수 없다는 허탈함을 뒤로하고 건물의 안으로 들어가 보았다. 학생 요금인데도 10유로인 입장료를 보고 잠시 망설이다가 발권을 했다. 표 검사를 하고 쭉 들어가자, 거다란 계단과 음악을 주제로 한 천장화가 가장 먼저 맞이해 주었다. 특히 계단에 쓰인 매끈한 대리석들이 눈에 들어왔다. 이 계단을 만들기 위해 8개국에서 30가지의 대리석을 가져왔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자 짙은 황금색에 이끌려 대사교장(Le Grand Foyer)으로 들어갔다. 높이가 18미터의 넓은 공간은 폴 보드리(Paul Baudry)의 프레스코화와 수많은 샹들리에로 채워져 있었다. 나폴레옹 3세의 명으로 1862년에 짓기 시작해서 1874년에 완공된 오페라 가르니에는 1870년-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을 거쳤다. 이 전쟁에서 패배한 프랑스가 어떻게 이런 화려한 건물을 지을 수 있는지 의아했다. 이 공간에 배치한 시계 두 개가 연, 월, 일, 시간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곳에서 수많은 인사들이 계약을 맺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단서였다. 30명의 화가와 73명의 조각가, 수많은 모자이크 장인이 무명의 젊은 샤를 갸르니에(Charles Garnier)와 만든 벨에포크 시대의 화려함을 엿볼 수 있었다. 극장(La grande salle)에선 밀려오는 인파의 관람시간을 보장해 주고자 빠르게 인물과 건물들이 중력에 영향을 받지 않고 떠다니는 듯한 샤갈의 초현실주의 천장화를 감상하고 오페라 가르니에를 나왔다. 그리고 곧장 파리에 온 주된 목적인 오르세 미술관 관람을 달성하러 버스를 탔다. 


오페라 가르니에


 다행히 오페라 가르니에에서 튈리르 정원 맞은편에 위치한 오르세 미술관까지 가는 건 오래 걸리지 않았다. 튈르리 궁에 살았던 나폴레옹 3세가 이전에 극장에서 테러당했기에 보안상 이유로 궁과 가까운 곳에 새로운 오페라 극장을 지은 것이다. 그 짧은 거리를 버스 타고 가면서 루브르 박물관을 지나갔다. 투명 피라미드가 있는 광장엔 보기만 해도 숨이 막힐 정도로 많은 사람이 있었다. 인류가 얼마나 예술을 사랑하는지 깨달은 지 얼마 안 돼서 목적지에 도착했다. 원래 기차역이었던 오르세 미술관 벽에 적힌 다른 도시 이름을 눈으로 훑으며 입구로 향했다. 역시 아름다움을 향유하려는 수많은 사람이 있었다. 인파의 행렬에 끼고 싶었지만, 어느 줄에 서야 할지도 감이 오지 않았다. 그래서 직원에게 «예약 안 하고 들어가는 줄은 어디예요?»물었다. «수용인원 예약이 다 차서 유감이지만, 오늘은 못 들어가요.» 망연자실한 채로 친구들에게 오르세 미술관 가는데 예약이 필요했는지 물었지만, 자기들이 갔을 땐 필요 없었다고 했다. 아마 바캉스 기간에 몰려드는 관광객으로 내린 조치인 듯했다. 그렇게 마음의 짐을 오늘도 해결하지 못한 채 어딜 가야 하나 고민하며 핸드폰을 뒤적였다. 걸어서 15분쯤 걸리는 곳에 로댕 박물관이 있었다. 


 반가운 태극기가 걸려있는 한국 대사관을 스쳐 지나가자 빨간 간판이 로댕 박물관에 도착했음을 알려주었다. 로댕 사후 2년 뒤인, 1919년에 개장해 그가 기증한 소장품들이 전시된 박물관은 넓은 부지의 정원 곳곳에 로댕의 작품들을 전시해 놓았다. 양 옆에 장미로 피어있는 길을 지나자 현대 조각의 아버지인 로댕의 가장 유명한 작품 ‘생각하는 사람(le Penseur)’가 모습을 드러냈다. 과도하게 큰 손발을 소유한 채 무언갈 골똘히 생각하는 사람을 보고 발걸음을 움직여 다른 곳을 보려고 하는데 하늘에서 빗방울이 떨어져 얼른 박물관으로 몸을 피했다. 박물관에서 로댕과 그가 소장했던 다른 작가들의 스케치, 도자기, 회화 등 다양한 작품을 구경하고 나오자, 하늘은 개어있었고 정원 한쪽에 있는 '지옥의 문(La Porte de l'Enfer)'으로 갔다. 지옥의 문은 마치 지옥 불에 청동이 흘러내리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문 위에서 그 지옥의 광경을 ‘생각하는 사람’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때 생각하는 사람이 원래 1880년부터 만들기 시작한 지옥의 문의 일부였고, 1904년에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크기로 제작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후 100년 전쟁 시기에 칼레에서 일어난 일을 모티브로 한 칼레의 시민(Les Bourgeois de Calais)을 보고 청동 조각상에 담긴 감정과 디테일에 감탄하고 잠시 조각들이 보이는 벤치에 앉아 시간을 보냈다. 다리에 통증이 사라질 때쯤 담 넘어 보이는 황금 돔으로 가기로 했다. 


로댕 박물관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황금 돔으로 장식된 앵발리드(les Invalides)를 배고픈 상태에서 갈 순 없었다. 슈퍼에서 탄산수와 빵을 사서 빠르게 먹고 17세기 유럽에서 강력한 군주 중 한 명이었던 루이 14세의 명으로 지어진 앵발리드에 들어갔다. 루이 14세는 이 건물을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생긴 상이군인들을 위한 공간인 동시에 자신의 왕권을 과시하기 위해 지었다. 이때 왕을 위한 교회와 군인들을 위한 교회를 지었는데 황금 돔으로 장식된 교회가 왕을 위한 교회이다. 표를 사자마자 바로 나폴레옹이 잠들어 있는 관을 보기 위해 이 왕을 위한 교회로 들어갔다. 나폴레옹이 잠들어있는 붉은 대리석관을 보기 위해 많은 사람이 모여있었다. 나폴레옹 관은 화려한 천개 아래에 놓인 황금 십자가 앞에 놓여있었다. 유럽의 정복자이자 황제였던 그가 유배지에서 쓸쓸하게 죽은 뒤에 본국으로 와 이곳에 묻힐 수 있다는 사실이 역사적 인물을 업적이 아닌 인간으로 바라보게 했다. 보방 등 유명한 인사들의 무덤을 본 뒤, 박물관으로 가서 도열되어 있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포를 구경했다. 루이 14세가 지은 이 건물은 다량의 무기를 보관하고 있었는데 프랑스 대혁명이 발발하자 혁명 세력이 이곳의 무기를 탈취해 바스티유 감옥을 점령했다고 한다. 파리의 많은 명소에 우리가 아는 다양한 역사가 얽혀있어 재밌다고 생각하며 기차역으로 돌아왔다. 


나폴레옹 무덤이 있는 앵발리드


 이번 파리 여행은 먹고 싶었던 쌀국수도 못 먹고, 오르세 미술관을 방문하지 못해 마음의 짐을 덜지도 못했다. 하지만 가르니에 오페라를 방문하면서 벨에포크 시대의 풍요로움과 왕정과 공화정을 왔다 갔다 하는 혼란스러웠던 시기를 느낄 수 있었다. 또 로댕이 기증한 작품들이 전시된 정원을 거닐면서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는 법도 익힐 수 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의 화려한 무덤에 성묘도 잘 갔다 왔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았지만, 꽤 만족스러운 파리에서 보낸 6시간이었다. 오르세 미술관을 핑계로 파리에 한 번 더 와야 한다는 점도 무척 마음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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