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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09. 2019

새해를 맞이하며: 2018년 올해의 책 Best 10

 저는 언젠가부터 한 해를 보내며 마음속으로 ‘올해의 책’을 꼽아보는 습관이 생겼습니다. 고등학생 때는 책을 많이 읽지 않았던지라 끽해야 한두 권이었고, 대학교 들어와서는 늘 10권  정도 골랐습니다. 2학기 때부터 사는 게 바빠 제대로 세지 못했지만, 올해도 작년과 마찬가지로 100권이 조금 넘는 책을 읽었던 것 같네요. 인상 깊게 읽은 책이 10권이 채 되지 않아서 억지로라도 채워야하나 말아야하나 끝까지 고민했습니다. 작년에는 좋았던 책이 10권을 훨씬 넘어서 무엇을 빼야하나 고민했는데 말이죠. 올해는 부디 재밌는 책들을 많이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올해의 책 10권에 대한 짧은 감상을 남깁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이하반말)

     

1. 『한국의 산림 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

 조선왕조를 일종의 ‘오래된 미래’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경제성장에 매몰되어 인간과 자연을 파괴하는 근대문명을 비판하며, 그 대안으로 조선을 내세운다. 조선은 화석연료를 사용하지 않고도 1800만 명이 먹고 살 수 있는 고도의 문명을 이룩했다는 게 이들 주장의 요지이다. 『한국의 산림 소유제도와 정책의 역사』는 이러한 낭만적 생태주의를 철저히 깨부순다. 조선은 산림자원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해 끝내 ‘생태학적 위기’에 빠지고 만, ‘소농사회’의 실패 케이스이기 때문이다.‘유기물만으로 지탱되는 소농사회’가 과연 오늘날 얼마나 현실적인 대안인가는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이다.

 저자 이우연은 17세기부터 19세기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산림이 어떻게 점차 고갈되어갔고 이에 따라 어떠한 위기가 발생했는가를 꼼꼼하고 치밀하게 추적해간다. 조선의 산림이 황폐화된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무엇보다 중요한 건 ‘제도’이다. 조선왕조는 산림에 대한 개인의 소유권을 확실히 보장해주지 않았다. 산림을 체계적으로 육성·관리하려는 시도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사실 나로서는 비는 적게 오는데 춥기는 엄청나게 추운 조선의 기후가 다른 나라에 비해 산림의 수요과잉과 공급부족을 초래한 게 아닌가 싶긴 하다. 하지만 제도 역시 매우 중요한 변수인건 틀림없는 사실이다. 

 황폐화될 대로 황폐화된 조선의 민둥산을 푸르게 바꿔놓은 건 다름 아닌 일본제국이다. 일본은 촌락 단위로 산림을 관리하는 자국의 입회제도를 조선에 ‘이식’하면서까지 붉은 땅을 나무로 채워갔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의 생태주의자 일부가 입회제도는 조선 고유의 산림관리방식이었지만, 일제가 이를 해체했다고 주장한다는 점이다. 물론 저자가 검토한 결과 이는 사실이 아니다. 그러니까 한국의 일부 생태주의자들은 역사속의 조선을 지우고 그 위에 에도시대 일본의 소농공동체를 허구적으로 건설한 후, 그것이 다름 아닌 일제에 의해 파괴되었다는 서사를 만들어낸 것이다. 어쩐지 조금은 슬픈 느낌이 드는 코미디라고나 할까.

 나는 이 책을 ‘역대급’ 추위가 찾아왔던 작년 1월에 읽었고, 덕분에 더 이상 조선시대에 대한 낭만적 환상은 갖지 않게 되었다. 아니, 그전까지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던 동아시아의 소농사회 자체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조선과 달리 ‘모범적인’ 소농사회를 이룩했던 에도시대 일본을 살펴보자. 일본은 3000만에 달하는 인구를 유기물만으로도 안정적으로 부양했으며, 19세기 중엽까지 생태학적 위기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영국의 초대 주일공사는 “이들의 문명은 고도의 물질문명이며 모든 산업문명은 증기의 힘과 기계의 도움 없이 도달할 수 있는 최대치의 완성도를 보인다”고 본국에 보고하기도 했다. 

 하지만 소농사회를 200년간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일본이 지불한 대가는 결코 적지 않았다. 자원을 갈취하고 과잉인구를 이주시킬 수 있는 해외 식민지가 존재하지 않았기에, 일본은 자발적인 노력을 통해 현재 인구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는 그 ‘인구조절’의 방식이다. 사회 전반에 걸쳐 영아살해(마비키)가 광범하게 이루어졌고, 가업을 이을 수 없는 차남 이하의 남성들은 에도와 오사카라는 ‘개미지옥’의 노동자로 일하다 죽어갔다. 결국 미래세대의 희생을 통한 기성세대의 부양이야말로, 에도시대 일본이 이룩한 안정적이고 풍요로운 소농사회의 본질이었던 것이다.

 지난 몇 년간의 여름과 겨울을 겪으며,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기후변화가 더 이상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미래의 일이 아니라 코앞에 놓인 심각한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문제는 이 기후변화라는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이다. 이 책을 읽고나면, 적어도 ‘탈성장’만큼은 답이 아닐 것 같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아울러 ‘탈핵’ 역시 다시금 고민해보게 된다. 이토록 여름이 덥고 겨울이 추운 나라에서, 화석연료에 의존하지 않고 지금과 비슷한 수준으로 냉난방을 가동하려면 결국 원자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여러 모로 많은 생각거리를 안겨주는 책이다.      


2. 『독서국민의 탄생』

 많은 신문과 잡지에서는 일본인이 책을 많이 읽는다는 얘기를 할 때면 일종의 증거로 이 책을 거론하곤 했다. 하지만 『독서국민의 탄생』은 ‘책 많이 읽는 일본인’에 대한 흔해빠진 예찬가가 아니다. 그보다는 ‘독서’라는 근대적 행위를 통해 어떻게 일본이라는 네이션이 만들어졌는가를 꼼꼼하게 추적하는, 『상상된 공동체』의 일본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서 가장 재밌었던 부분은, 일본에 세워진 첫 도서관에도 책은 안 읽고 수험공부를 하러 온 수험생들만 득실댔다는 사실이다. 사람 사는 건 다 똑같구나 싶었다. 『독서국민의 탄생』을 근거로 ‘책 많이 읽는 일본인’을 찬미했던 수많은 언론사들은 과연 이 책을 읽어보기는 했는지 의심이 들기도 했고. 책 끄트머리에 실려 있는 번역자의 고백은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역자후기’ 중 가장 재미있고 우아하다.   

  

3. 『일본의 역사를 새로 읽는다』

 저자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은 기본적으로 농업사회였다는 프레임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독특한 학자다. ‘농민’이 아닌 ‘산민(山民)’과 ‘해민(海民)’의 역동적이고 풍요로운 삶을 드러내려는 그의 생각이 이 책에 쉬운 언어로 잘 쓰여 있다. 지난 2월에 처음 읽었을 때도 흥미로웠지만, 이 책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된 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황현산의 인터뷰를 읽고 나서였다. 전남 신안군(정확히는 비금도) 출신인 황현산은, 넓은 세상과 자유롭게 교류하면서 동시에 고립되어 있는 ‘다도해 정서’를 선배인 김현과 공유했다고 회고하고 있었다. 정확히 아미노가 이야기한 ‘해민’의 삶이었다. 실제로 황현산의 산문에는 섬은 외지고 궁벽할 것이라는 육지 사람들의 편견에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는 식의 구절이 심심치 않게 등장하곤 했다. 근대 이전, 비단 농업으로 수렴되지 않는 다양한 삶의 양식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새삼 재확인한 기분이었다.      


4. 『완전한 번역에서 완전한 언어로』

 외국어 시험을 망친 날, 쏟아지는 빗소리를 들으며 시립도서관에서 펼쳐든 책. 덕분에 많은 위로를 받았다. 저자 정영목은 왜 번역만큼은 다른 작업과 달리 ‘번역 같지 않다’는 말을 칭찬으로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질문하며 글을 시작한다. 번역이란 단순히 가치중립적인 ‘의미’를 둘러싸고 있는 ‘언어’라는 포장지를 바꾸는 작업이 아니다. 오히려 번역은 특정 언어가 본래 갖고 있지 않았던 의미를 새로이 추가하는 창조적인 과정이다. 이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발생하는 ‘번역투’ 문장은 하나의 가능성이며, 번역가의 창조성이 가장 잘 발휘될 수 있는 영역이라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나는 종종 모든 창조행위는 결국 번역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 오늘날 ‘모어’ 혹은 ‘자국어’(나는 아직도 둘 중 어느 표현을 써야 할지 고민 중이다)라 불리는 말들도 외국어(한문/라틴어)의 번역 과정에서 등장했다. 맹자에서 모종삼까지, 동아시아의 ‘유학자’들도 공자의 텍스트를 창조적으로 ‘술이부작’함으로써 자신의 주장을 전개해갔다. 그 결과 오늘날 ‘유가’란 이름으로 뭉뚱그려지는 여러 학자/학파는, 실상 전혀 다른 주장을 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점에서 나는 한때 굉장히 성의 없다고 생각했던 유학의 번역어 Confucianism이, 이제는 꽤 적절하다고 느낀다. 공자를 내세운다는 사실을 제외한다면 양명학과 소라이학을 묶을 수 있는 공통분모는 없다시피 하니 말이다.)

 황현산, 고종석, 그리고 정영목까지, 번역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이 누구보다 단정하고 세련된 한국어를 구사한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다. 잘 쓴 에세이는 웬만한 학술서 못지않다는 생각을 안겨준 책이었다.     


5.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내 기준에서 매우 잘 쓴 역사학 박사논문. 선험적으로 이론을 제시하기보다는 차곡차곡 자료를 모아가고, 그러면서도 하나의 큰 그림을 그려낸다. 물론 결론에 이르러 일종의 계몽주의로 흐르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책이 나온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이 책의 가장 훌륭한 점은 단순히 18세기 평안도의 사회발전을 훑는데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당시 조선사회의 전체상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서울중심주의와 지역차별, 관(官)에 매우 의존적이었던 상업의 발전, 백성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한 ‘당근’으로서 무과의 빈번한 시행 등, 나온 지 17년이 되어가는 이 책이 다루는 문제는 지금까지도 조선사 연구의 핫한 주제들이다. 

 사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부분은, 당시 기록에서 ‘삼남의 곡식’과 ‘서북의 재화’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평안도의 번영은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청이라는 대제국과의 무역에 의해 추동된 것이었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소농사회론을 접하고 난 이후로, 도저히 소농사회가 성립할 조건(온난/다우/산간)을 갖추지 못했던 평안도 지역(한랭/소우/평야)이 어째서 번영할 수 있었는가는 내 주된 관심사였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18세기 평안도의 사회발전이란 결국 근대 이후 서북계 엘리트들의 약진이 빚어낸 일종의 환상이 아닐까하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렇지만 18세기 평안도의 번영은 (자본주의맹아론에서 선전한 것만큼은 아닐지언정) 분명히 사실이었고, 이는 전적으로 상업을 기반으로 한 것이었다. 소농사회의 성립과는 무관했다. 유럽 중세사 연구의 권위자였던 앙리 피렌은, 외부 대제국과의 교역이야말로 중세 유럽의 번영을 이끈 제일원인이라고 이야기한다. 물론 ‘농업 없는 상업’에 주목했던 피렌의 가설은 오늘날엔 사실상 폐기된 것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18세기의 평안도는 피렌이 늘 이야기했던, 비잔틴과의 교역으로 번성했던 ‘뻘밭’ 베네치아와 상당히 유사하다. 만약 피렌이 평안도의 사례를 알고 있었다면 꽤나 좋아하지 않았을까. 농업 없는 상업, 생각해볼 문제다.     


6. 『GMO, 우리는 날마다 논란을 먹는다』

 아마 내가 올 해 읽은 유일한 과학관련 책이 아닐까 싶다. 저자 존 T. 랭은 유전자 변형이라는 과학기술을 성급하게 악마화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왜 유독 유전자 변형만이 그렇게 죄악시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예컨대 사람들은 걸을 수 없을 정도로 뚱뚱하게 개량된 닭을 일상적으로 먹으면서도 별다른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지만, GM 식품에 대해선 이보다 훨씬 민감하게 반응한다. 유전자 변형이 건강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이 아니라 유전자 변형에‘만’ 관심을 갖게끔 만드는 프레임, 나아가 그 프레임을 의도적으로 유포하는 사회문화적 구조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요지이다. 

 어째서 GM 식품을 둘러싼 그간의 논쟁은 그것이 건강에 해로운지 아닌지, 혹은 의무표시제를 도입할 것인지 아닌지의 방식으로만 이루어져 왔을까? 저자는 그 이유를 식품 시스템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제기를 봉쇄하려는 기업들의 의도에서 찾는다. 다시 말해 이는 파란 셔츠를 입을지, 아니면 빨간 셔츠를 입을지 물어봄으로써 셔츠 아닌 다른 것을 상상할 수 없게 만드는 ‘세심한 기획’이라는 것이다. 

 분명 저자가 이야기한대로 논쟁의 프레임을 짠 건 막강한 자본력과 기획력, 홍보력을 갖춘 거대 기업일 것이다. 하지만 정말 이 기획을 기업이 ‘전적으로’ 주도했으며 평범한 사람들은 기업의 장단에 놀아난 것에 불과할까? 사람들 역시, 그들이 의도했건 그렇지 않건 기업이 짠 프레임에 머물고 싶어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생명공학계가 과학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줄 것이라고 믿고 싶어 했던 것만큼이나, 시민단체들 역시 과학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라고 믿고 싶어 했던 건 아니었을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던 의문이었다.     


7. 『이탈리아 현대사』

 올해 나온 책 중 그 가치에 비해 유독 주목받지 못한 듯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유럽 현대사를 다룬 논문 모음집에서 한두 꼭지로 다뤄지고 말았던 이탈리아 현대사를 한 권의 통사로 읽을 수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 그 방대한 분량만큼이나 다양한 인물과 사건이 등장하기에 역사덕후가 아니라면 읽기 조금 어려울 수 있다만... 

 이탈리아 현대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다름 아닌 ‘가족’이다. 물론 그 의미와 역할은 시대와 지역에 따라 상당히 다르다. 예컨대 남부 이탈리아의 악명 높은 가족주의는 특유의 후견인주의와 결합하여 지역의 저발전을 고착시켰다. 하지만 우리가 볼로냐의 사례를 통해 잘 알고 있는, 중부 이탈리아의 협동조합·소기업 기반의 건실한 경제를 지탱했던 것 역시 가족공동체였다. 이탈리아의 진보주의자에게 가족은 기본적으로 타도의 대상이었지만, 토지권익 운동이나 마약퇴치 운동과 같은 ‘진보적’ 운동 역시 가족주의에 기반을 두고 있었다. 이처럼 인간의 삶에 깊게 뿌리내리고 있는 ‘가족’을 과연 어떻게 생각해야 할지, ‘가족’을 벗어난 삶을 상상할 수 있을지 책을 읽는 내내 많은 고민이 들었다.

 1992년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 이후의 대격변을 다루지 않았다는 건 이 책의 아쉬운 점이다.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베 총리님은 본문에서 한두 번 스쳐 지나갈 뿐이다. 저자는 상당히 진보적인 사람인 듯한데, 아마 지금 이탈리아를 보며 피눈물을 흘리고 계시지 않을지... 68혁명기 북부 이탈리아의 노동자들이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간 과정은 매우 감동적이니, 다들 꼭 한번은 읽어 보았으면 좋겠다. 68혁명을 ‘대학생 혁명’으로 알고 있던 나로서는 매우 새로운 이야기였다.      

8. 『조선, 철학의 왕국』

 사단칠정논쟁, 예송논쟁과 더불어 조선 3대 논쟁으로 불리지만, 앞의 누 논쟁에 비해 그리 주목받지 못했던 호락논쟁을 다룬 좋은 교양서다. 저자는 호락논쟁 그 자체보다는, 논쟁을 둘러싼 다양한 ‘이야기’에 집중한다. 호락논쟁을 키워드로 다양하게 뻗어나가는 이야기를 읽다보면, 어느새 조선후기 사상사의 전체상이 들어올 것이다. 앞서 부족하게나마 이 책의 서평을 쓴 적이 있으니, 더 이상의 리뷰는 생략^>^     


9. 『영이』

 좋아하고 존경하는 친구가 추천해준 김사과의 소설집. 펼치자마자 빨려 들어가듯이 다 읽어버렸다. 군더더기 없이 담담하게 그려낸 파국을 바라본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책을 놓을 수 없었던 건, 김사과의 글이 아픔과 함께 어떠한 해방감도 주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너무나 아렸던 몇몇 문장은 아직까지도 곱씹어보고 있다. 말을 보태는 게 오히려 좋지 않을 것 같아 일단 이 정도로.     


10. 『복학왕의 사회학』

 올 여름 글깨나 읽는 사람들 사이에서 적잖은 화제를 모았던 책이다. 당연하겠지만 40대 이상과 내 또래 사이에서 극명하게 평가가 갈리기도 했고. 사실 나는 주변에서 많이 비판했던 저자의 ‘계몽적’ 태도가 약간 거슬리긴 했을지언정, 그렇게까지 싫지는 않았다. 스스로를 책임질 수 있는 주체적인 사람이 된다는 것, 자신의 성장가능성을 긍정한다는 것은 ‘근대’의 중요한 약속(환상?)이니 말이다. 소위 ‘근대성애자’인 나는 너무나도 근대인으로 살고 싶어 하고, 저자의 문제의식에 깊게 공감한다. 문제는, 과연 근대가 우리에게 약속했던 삶의 방식이 앞으로도 유효할 것인가이다.

 저자는 지방대생과 그 부모를 연결하는 ‘가족주의’를 일종의 ‘지체’로 이해한다. 이러한 진단 하에서라면 지방은 어디까지나 서울에 비해 ‘뒤쳐진’ 것이기에 앞으로 충분히 ‘근대화’될 여지가 존재한다. 하지만 가족주의는 중심보다 열악한 환경에 놓였기에 ‘근대 이후’로 내몰린 지방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자구책이 아닐까? 그렇다면 지방은 서울에 비해 ‘뒤쳐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앞서간’ 것이라고 이해할 수도 있다. 조한혜정의 비유를 빌리자면, 저자가 연구한 대구는 서울보다 먼저 망했다는 점에서 ‘선망지(先亡地)’인 것이다. 물론 이 때의 ‘망함’은 조한혜정이 낭만적으로 포장한 것과는 달리 굉장히 비참하고 무시무시하지만 말이다. 

 아울러 가족주의를 오로지 지방의 특성으로 환원시킨 것 역시 아쉬운 부분이다. 조주은이 『기획된 가족』에서 꼼꼼히 분석했듯, 수도권 화이트칼라를 지탱하는 것 역시 핵가족의 연대와 협업이기 때문이다.(물론 맞벌이 여성의 살인적인 노동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지만) 지방의 성격을 가족주의로 단정 짓기보다는, 지방의 가족주의가 수도권의 가족주의와 어떤 점에서 같고 다른가에 집중했으면 좀 더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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