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
지지난 주말,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를 이틀에 걸쳐 읽었다. 주위의 훌륭한 선생님들께서 이 책에 보낸 찬사와는 달리, 나는 그렇게까지 큰 흥미를 느끼진 못했다. <서론>과 <개정판 후기: 트럼프와 포퓰리즘 시대의 민주주의>를 제외하고는 글이 상당히 늘어졌기에 영 지루했던 것이다. 오죽하면 저자가 민주주의의 지리멸렬함을 강조하려는 나머지 글까지 그렇게 써버린 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굳이 책을 읽고 싶으면 맨 앞과 뒤의 두 장만 훑어보거나, 이관후 선생님께서 『시민과세계』에 기고하신 훌륭한 서평을 찾아보기를 권하고 싶다. 그런데 이렇게 혹평해놓고 정작 독후감은 엄청나게 길게 끼적인걸 보면, 입으로는 재미없다 해도 나 역시 꽤 흥미진진하게 책을 읽었나보다.
저자 데이비드 런시먼이 설명하는 민주주의의 특징은 ‘약한 건강/강한 체력’이다. 사람에 비유하자면, 민주주의는 허리디스크, 고혈압, 당뇨와 같은 만성 질환으로 골골대지만 엄청난 맷집으로 어찌어찌 버텨나가는 마라토너인 것이다. 주기적인 선거나 언론의 시끄러운 보도, 정치 스캔들은 민주주의를 끊임없이 ‘약한’ 위기에 빠뜨린다.
만성화된 위기는 민주국가의 시민들을 항상 깨어 있게 만든다는 점에선 얼핏 긍정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생각해보라, 영구적인 각성상태에 놓여 있는 사람이 과연 ‘진짜’ 위기를 파악할 수 있을까? 민주주의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피곤하고 찌뿌둥한 사람이 암과 같은 무서운 병의 조짐을 캐치하지 못할 확률이 높듯이, 민주주의 역시 중대한 위기가 닥쳐와도 그저 일상의 연장이겠거니 하고 넘겨버리곤 하는 것이다. 물론, 민주주의는 역으로 아주 사소한 위기도 결정적인 붕괴의 조짐인 양 난리법석을 피울 수도 있다.
이러한 민주주의의 취약성이 가장 잘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전쟁이다. 저자의 학문적 수원(水源)이라 할 수 있는 토크빌은 민주주의가 가장 못 하는 일이 다름 아닌 ‘개전’과 ‘종전’이라고 지적했다. 그러니까 민주주의는 전쟁을 언제 시작하고 언제 끝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조율하지 않으면 무언가를 결정할 수조차 없는 민주주의의 성격은 전쟁을 수행하기에는 너무나 비효율적이다.
반면, 민주주의와 대척점에 있는 전제주의의 탁월성은 전쟁에서 빛을 발한다. 의사결정의 주체가 독재자든 아니면 소수의 과두정부든, 전제국가는 중앙의 컨트롤타워에 의해 모든 것을 신속하게 결정하고 효율적으로 집행한다. 무엇보다 전제국가는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선 전쟁을 언제 시작해서 언제 끝내야 할지를 알고 있다. 따라서 전쟁이 단기간에 끝날 경우, 승리는 언제나 전제국가에게 돌아간다. 1962년 인도와 중국이 벌인 전쟁은 그 단적인 예다.
하지만 전쟁이 장기화될 경우, 상황은 전혀 다르게 흘러간다. 민주국가는 전쟁을 언제 시작해야 할지 모르듯 언제 끝내야 할지도 모른다. 따라서 민주국가는 전쟁을 그저 꾸역꾸역 버텨가며 가능한 모든 해결책을 도모한다. 전제주의까지도 받아들일 수 있는 민주주의의 놀랄만한 유연성은 이 때 비로소 진가를 발한다. 반면 전제국가의 경우 민주국가와 달리 본래 계획이 틀어졌을 때 도입할 수 있는 ‘플랜 B’가 없다. 따라서 전제국가는 아주 사소한 실수로도 와르르 무너져버리곤 한다.
승리가 목전에 다가온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순간 전제국가는 제 풀에 꺾여버리기 때문에, 민주국가의 승리는 엄밀히 말해 부전승이다. 지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꾸역꾸역 시간을 보내다보니 어찌어찌 이겨버린 것이다. 요즘말로 ‘존버’는 승리한다고나 할까.
민주주의의 위태위태한 역사를 읽어가며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건, 뜬금없지만 유교의 ‘사대부적 정치문화’였다. ‘사대부적 정치문화’란 근세 일본의 유교화를 연구한 박훈이 제시한 개념으로, 유교적 소양을 갖춘 사대부 ‘계층’(원칙적으로 세습이 불가능하므로)이 군주와 함께 천하 대사를 논의하는 정치문화를 일컫는다. ‘사대부적 정치문화’가 정착된 곳에서 국가의 중대사는 (어디까지나 일부 남성만으로 구성되긴 했으나) 여론의 향배에 의해 결정되었다. 사대부 계층은 간언, 상서, 강학 등을 통해 여론을 주도 혹은 설득해야 했고, ‘학적 네트워크’에 기반한 복수의 정치세력(붕당)은 공(公)을 두고 경쟁을 벌였다.
박훈은 ‘사대부적 정치문화’에서 ‘민주주의의 맹아’를 읽어 내려는 (『맹자의 땀 성왕의 피』 류의) 시도에는 회의적이다. 하지만 그는 ‘사대부적 정치문화’야말로 “20세기 민주주의를 제외하고는 가장 다수가 정치에 참여할 수 있었던 정치문화”였을지도 모른다며 그 의의를 깎아내리지도 않는다. 사실 나는 위와 같은 박훈의 ‘온건한’ 주장에도 불편함을 느낄 정도로 유교에 부정적이며, 이로부터 어떠한 가능성을 끌어내려는 시도에 회의적이다. 그럼에도 내가 민주주의와 ‘사대부적 정치문화’를 굳이 엮어보려는 이유는, 두 체제가 전쟁을 수행하는 모습이 상당히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사대부적 정치문화’에 가장 가까이 다가섰던 조선왕조를 예로 들어보자. 서구열강의 도래 이전까지 조선은 크게 두 번의 전쟁을 겪었다. 하나는 1592년~1598년까지 일본과 벌인 전쟁이고, 다른 하나는 1636년 청나라(다이칭 구룬)와 벌인 전쟁이다. 두 전쟁 모두 잘 조직된 군사국가인 일본과 청이 조선을 침략하며 벌어졌다. 조선을 침략했을 당시 일본은 100여 년의 전국시대를 끝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전의 어느 지도자보다도 강력한 권력을 손에 쥔 상태였다. 청나라의 홍타이지 역시 8개의 구사(八旗) 중 3개의 구사를 확보함으로써 유목민 특유의 집단지도체제를 무너뜨리고 독재체제를 확립했다. 따라서 두 국가 모두 완전히 들어맞지는 않을지언정 전제주의에 가깝다고 볼 수 있다.
이처럼 조선이 맞닥뜨린 두 차례의 전쟁은 전제국가의 선제공격으로 시작되었다는 공통점을 갖지만, 그 결과는 완전히 달랐다. 조선은 일본과의 전쟁에서는 어쨌거나 패배하지 않았던 반면, 청과의 전쟁에서는 손 쓸 새도 없이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두 전쟁의 결과가 상이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민주국가와 마찬가지로 유교국가의 전쟁 역시 ‘시간’에 의해 승패가 좌우되었다고 볼 수는 없을까?
일본은 조선의 주요 도시인 한성, 개성, 평양을 신속히 점령하는 등 파죽지세로 밀고 올라갔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왕은 사로잡지 못했다. 조선왕이 멀쩡히(?) 살아있는 이상 전쟁은 고착화될 수밖에 없었고, 고려천자 만력제의 헌신적인 서포트로 기사회생한 조선은 어떻게든 꾸역꾸역 버텨갔다. 결국 일본은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급작스런 죽음과 함께 조선에서 물러갔다. 일본이 졌다고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조선의 ‘존버’는 승리했다.
반면 청은 조선의 주요 군사요충지를 그냥 내버려둔 채 빠르게 한성으로 내려갔다. 왕을 사로잡아 빠르게 전쟁을 끝내버리는 게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조선 조정은 우물쭈물하다가 고작 남한산성에 틀어박혔고, 결국 삼전도에서 청에게 항복하는 굴욕을 겪었다. 최소한의 시간조차 벌지 못한 조선이 ‘존버’할 수 없었다는 게 패배의 중요한 이유였다. 만약 조선 조정이 고려처럼 저 멀리 안동으로, 하물며 강화도로라도 도망갈 수 있었다면 전쟁의 양상은 다르게 흘러갔을지도 모른다.
이처럼 ‘사대부적 정치문화’는 일단 ‘존버’하면 전쟁에서 적어도 지지는 않았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와 유사하다. 그렇다면 두 체제가 공유하는 이러한 성격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 답은 토크빌에게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토크빌은 미국이 민주주의를 꽃피울 수 있었던 건 사실상 이웃나라가 없는 것이나 다름없어 전쟁의 위협에서 자유로웠던 덕분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그는 좁아터진 땅에서 수많은 나라가 치고받는 유럽에서는 민주주의가 뿌리내리기 어렵다고 보았다. 유럽의 모든 나라가 민주주의를 도입하지 않는 한 전쟁의 위협이란 항시 존재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이야기했듯 민주주의는 전쟁에 매우 취약하기 때문이다.
조선 역시 마찬가지다. 유교의 가치를 긍정하는 쪽이든(김상준), 부정하는 쪽이든(계승범) 모두 조선이 ‘성리학 유토피아’를 건설할 수 있었던 이유로 동아시아의 초강대국인 명·청의 ‘안보우산’을 꼽는다. 실제로 동아시아에 ‘복수의 천하’가 병존하던 시기에 아슬아슬한 생존게임을 벌였던 고려왕조는 군사·귀족국가에 훨씬 가까웠다.
요컨대, 민주주의와 ‘사대부적 정치문화’ 모두 전쟁가능성이 현저히 낮아지지 않는 이상 제대로 굴리기 어려운 체제인 것이다. 어찌어찌 ‘존버’한다면 지지는 않겠지만, 문제는 과연 ‘존버’할 수 있느냐이다. 임진전쟁기의 조선도, 양차 세계대전기의 영국과 프랑스도 동맹을 맺은 초강대국의 서포트가 없었다면 ‘존버’ 자체가 불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이관후 선생님은 서평에서 촛불 이후 읽은 책들이 민주주의의 조언자로 하나같이 토크빌을 가리키고 있었다고 말씀하셨다. 나 역시 그렇다. 비단 『자만의 덫에 빠진 민주주의』만이 아니다. 최근 읽고 있는 와타나베 히로시의 논문 「앙시앙레짐과 메이지혁명」에서도 토크빌은 메이지유신과 프랑스혁명을 엮는 연결고리로 중요하게 등장한다. 얼마 남지 않은 방학을 『미국의 민주주의』를 읽는데 써야 할 것만 같은 생각이 자꾸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