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조선 후기 천주교 전래사, 그중에서도 양반들이 천주교를 받아들인 역사는 설명할 수 없는 경이감과 함께 그만큼의 의문 역시 안겨준다. 조선은 좋게 말하면 ‘철학의 왕국’, 나쁘게 말하면 ‘관념국가’라 일컬어질 정도로 학문을 사랑했고, 진리를 향한 날선 투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당대의 지배이념인 성리학은 광대한 우주에서 개인의 내면에 이르기까지, 삼라만상의 바람직한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제시했다. 혹자는 만인의 성인(聖人)됨을 긍정한 성리학이야말로 동아시아 근대성의 분기점이라고 이야기할 만큼, 그 영향력은 넓고 깊었다.
그럼에도 조선의 양반들은 성리학을 버리고 서양의 낯선 가르침에 기꺼이 몸을 맡겼다. 누구보다 성리학에 정통했을 뿐 아니라, 체제에 안주하며 충분히 영화롭고 안락하게 살 수 있었던 그들이 말이다. 대체 왜 양반집 도련님들은 비밀스럽고, 위험하며, 어딘가 중2병(!)스럽기까지 한 사이비 종교를 열렬히 사모했는가? 성리학이라는 정교하고 세련된 체계는 왜 그들의 갈망을 채워줄 수 없었는가? 형장의 이슬 되어 사라져가면서까지, 그들이 지키고자 했던 믿음은 도대체 무엇이었는가?
윤춘호의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이하 『믿는 일』)는 조선 양반들에게 믿음이란 무엇이었는가를 파고드는 훌륭한 팩션(Faction)이다. 역사 교양서와 소설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 이 책은 때로는 꼼꼼한 사료독해로, 때로는 문학적 상상력으로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저자의 전작 『봉인된 역사』와 마찬가지로 당대를 살아간 수많은 인물들의 다채로운 시선이 흥미롭게 교차하면서도, 이승훈의 삶과 믿음이라는 하나의 서사를 뚝심 있게 밀고 나간다. 정갈하고 유려한 문장 역시 독서의 즐거움을 돋운다.
제목에 떡하니 “다산”을 박아놓아 착각할 수 있지만, 이 책의 주인공은 정약용이 아니다.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초대교회를 이끌었으나, 믿음을 저버리고 종국에는 목숨마저 잃은 배교자 이승훈이다. (그럼에도 신문사 서평들은 하나같이 정약용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데, 퍽 안타깝다)
왜 하필 이승훈인가? 성인이나 복자로 추앙받지도, 한국사의 위인으로 존경받지도 못하는 그를 구태여 무덤에서 불러낼 필요가 있는가? 저자는 단호하게 그렇다고 대답한다. 세례명인 베드로처럼 세 번이나 배교했지만 끝내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맞이한 이승훈의 삶이야말로, 당시 조선에서 믿는 일이 얼마나 어려웠는가를 절절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승훈의 죽음은 이벽처럼 비극적이지도, 정약종처럼 비장하지도 않았다. 구차하고 처절했다. 바로 그 점이 우리로 하여금 그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끔 한다.
『믿는 일』에서 단연 눈길을 끄는 건 저자의 상상력이 가미된 가상의 편지글, 그중에서도 이승훈과 북경의 예수회 사제 그라몽이 나눈 대화이다. 각기 다른 이유로 희망에 부풀어 오른 두 사람이 빚어내는 묘한 긴장과 불안이, 앞으로 펼쳐질 조선 천주교회의 험난한 앞날, 그리고 이승훈 개인이 겪을 고난과 좌절의 전조로 읽히는 탓이다.
1783년, 이승훈은 28살 젊은이. 그는 아버지를 따라 세계에서 가장 번화한 도시, 가장 거대한 제국의 심장에 들른다. 그곳에서 선배 이벽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던 서양의 가르침을 접한다. 지금껏 알아온 성리학의 가르침과는 전혀 다른, 또 하나의 우주를 접하고 눈이 휘둥그레진다. 눈 푸르고 코 높은 노인에게 죽음 뒤에는 어떤 세계가 펼쳐지는지, 사람이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지를 통역을 거쳐 더듬더듬 배운다. 노인을 만난 이후, 이승훈은 자신이 새롭게 태어났다고 믿는다.
서양의 앞선 문물에 대한 동경과 갈망 역시, 천주를 향한 사랑만큼이나 그의 마음을 뒤흔든다. 노인의 신묘한 재주, 견고하고 웅장한 북경의 북당(北堂)과 아름답게 울리는 파이프오르간, 자연과 사물의 이치를 헤아리는 놀라운 기계까지, 이 모든 게 가난하고 낙후한 조선 청년의 눈에 선명히 박힌다. 이승훈은 조선 역시 서양처럼 번영하기 위해서라도 천주를 믿어야겠다고 확신한다. 그에게 신앙과 진보는 떨어져있지 않다.
무엇보다, 젊은이 특유의 치기와 열정, 공명심이 이승훈을 이끈다. 사실 노인의 이야기를 완전히 이해하지는 못하겠다. 현란한 문물 역시 겉핥기로만 접했을 뿐이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그는 열과 성을 다해 헌신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거기에 자신의 미래를 걸어보기로 한다.
이승훈을 맞이하는 그라몽 신부, 그는 나고 자란 프랑스를 떠나 머나먼 극동에 온지 20년이 되어가는 예수회 사제.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신부지만, 이제는 조금씩 지쳐간다고 느낀다. 프랑스와 스페인, 포르투갈의 군주들은 천주의 충직한 종을 자처하면서도 자꾸만 교회를 국가의 손 안에 두려한다. 교황의 사냥개라는 멸칭을 감수하면서까지 헌신해왔건만, 돌아온 건 예수회 해산이라는 청천벽력같은 명령이다. 아직까지 북경에 남아있는 건 지저분한 재산문제를 매듭짓지 못해서일 뿐,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은자의 나라 코레에서 왔다는 한 젊은이가 난데없이 북당으로 들이닥친다. 부르주아에게 봉건적 신분질서의 수호자로 비난받는 사제를, 그는 만민평등의 사도로 받아들인다. 계몽주의자에게 미신과 야만의 총체로 조롱받는 천주교를, 그는 첨단을 달리는 진보의 총아로 동경한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다. 심지어 이 젊은이는 천주의 말씀을 잘 이해하는 것 같지도 않다!
그럼에도 그라몽 신부는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젊은이에게 세례를 준다. 위대하신 신의 뜻을 한낱 인간이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이유가 무엇이건 선교사를 파견한 적도 없는 미지의 나라에서 이렇게 천주를 알고자 찾아온 젊은이가 있지 않은가! 그라몽 신부는 젊은이에게 기대를 걸어보기로 한다.
다만 젊은이의 치기와 야심이 못내 불안했던지, 신부는 그에게 베드로라는 세례명을 내린다. 예수를 세 번이나 부정했지만 다시 주의 품으로 돌아온 베드로 성인의 힘을 빌어, 언제라도 날아갈 것 같은 그의 마음을 천주에 묶어두고자 한다. 이런 염려를 아는지 모르는지 젊은이는 그저 교회의 반석이 될 기대에 부푼 듯 보이지만.
과연, 조선으로 돌아온 뒤 이승훈의 삶은 베드로를 빼다 박았다. 북경에서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밀스레 서학 집회를 가진 사실이 발각되어, 그는 아버지 앞에서 첫 번째 배교를 한다. 이 배교는, 역설적으로 이승훈의 설익은 믿음을 더욱 깊고 단단히 뿌리내리게 했다. 회개하고 다시 교회로 돌아온 1795년부터 1800년까지, 이승훈은 자신을 포함해 10명의 임시신부를 선출하고 교단을 정비하는 등 헌신적으로 교회 일에 임했다.
하지만 성리학을 국교로 삼는 나라, 단 한 척의 무역선도 띄우지 않고 단 한 명의 외국인도 받아들이지 않는 나라에서 천주를 섬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교회의 지도자로 지내는 동안 이승훈은 이 어려움을 진지하고 정직하게 풀어나갔다. 임시성직제도가 독성죄라는 유향검의 문제제기를 깔아뭉개지 않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했다. 지도자로서의 권위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음에도 북경에 편지를 보내 답을 구하는 등 도망가지 않고 끝까지 책임을 졌다.
이 과정에서 이승훈은 천주에 대해, 믿음에 대해, 그리고 자신에 대해 심각하게 회의한다. 조정은 단 한 명의 선교사 파견도 허용치 않을 것이고, 목자 없는 양떼들은 천주를 믿음에도 구원받지 못하고 죽을 것이다. 제사 문제는 어찌할 것인가, 조상과 공자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조차 차리지 못하게 하는 서양 사제들의 불관용을 두고 볼 수 있는가? 명예는 최대한으로 누리려고 들면서, 책임은 어떻게든 피하려는 뻔뻔스런 교회 지도자들은 또 어떻고?
고뇌 끝에, 이승훈은 믿음을 버리기로 한다. 아니, 정확히는 믿음의 무거움을 감당하지 못해 내려놓은 것이다. 그렇게 두 번째 배교(1791)와 세 번째 배교(1795)가 이루어졌다. 베드로와 달리, 이승훈이 세 번째로 회심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교회를 떠났고, 국가와 문중으로부터 버림받았다.
어느 곳에도 속하지 못한 채 부유하던 이승훈에게, 마침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정조가 승하한 뒤 정권을 잡은 정순왕후와 벽파의 영수 심환지가 사학(邪學)을 척결한다는 명목으로 천주교도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벌인 것이다. 신유박해(1801)라 불린 이 파국을, 아무리 배교자라 한들 이승훈이 피해갈 도리는 없었다.
국문장에서 그는 자신이 믿음을 버린 지 오래라고 항변하며 목숨을 구걸했다. 하지만 견딜 수 없는 고통으로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에서도 옛 동료들을 팔아넘기는 짓은 하지 않았다. 심문관 앞에서 동료는 물론이요, 친형 정약종의 이름까지 술술 불어버림으로써 기어코 살아날 구멍을 찾아낸 정약용과는 대조되는 행보다.
1801년 2월 26일, 이승훈은 서소문 앞에서 목이 잘려 죽었다. 조선 최초의 영세자였고, 한때는 사실상의 주교였던 만큼 당연한 결말이었다. 『조선천주교회사』를 쓴 달레의 말마따나, 이승훈은 참회한다는 한마디면 “그 피할 수 없는 형벌을 승리로 바꿀 수 있었다.”(p.242.) 그럼에도 이승훈은 끝끝내 이를 거부하고 배교자로 죽었다.
그는 무슨 생각이었을까. 혹시 앞으로 더 큰 고통만을 남긴 채 자기 하나만 주의 곁으로 돌아가는 걸 죄스럽게 여겼던 건 아닐까. 막판에 회개하여 순교자로 남을 경우, 천주교회는 자신의 죽음을 거룩하게 포장하여 음지에서 세를 불려갈 것이다. 허나 앞으로도 조선 땅에서 천주교는 결코 받아들여질 수 없다. 만일 ‘순교자 이승훈’에 이끌려 무고한 신자들이 불나방처럼 달려든다면, 애꿎은 희생만 늘어날 뿐이다. 고로 이승훈은 추한 배교자로 남아야 한다. 세상 사람들이 내 시체를 보고 침을 뱉고 손가락질하도록, 그래서 믿음이라는 무거운 짐을 질 생각조차 하지 못하게끔 만들어야 한다. 무의미한 죽음은 이걸로 족하다.
이승훈의 생각이 실제로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그 역시 어떻게든 살아남고 싶었으나, 다산처럼 머리가 잘 굴러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하다. 이승훈은 믿음이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잘 알았고, 그로인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의 동학들도 마찬가지다. 도교의 신선술에 심취했던 괴짜 천재 이벽은, 천주교로부터 성리학이 결코 주지 못하는 내세에 대한 전망을 얻었다. 그는 죽음을 불사한 아버지의 반대 끝에 독방에 틀어박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천주교에서 만인이 평등한 이상사회를 보았던 정약종은 가혹한 고문에도 신념을 꺾지 않았고, 순교자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그들은 다르게 믿고, 다르게 죽었다. 하지만 믿음의 무게를 안다는 점에선 모두가 하나였다.
이들을 보면서, 다산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빼어난 재능으로 정조의 총애를 한 몸에 받았던 이. 하늘에서는 상제(上帝)가, 땅에서는 군주가 만물을 조화롭게 주재하는 세상을 꿈꾼 이. 선한 목자가 되고 싶었으나 결코 양과 목자가 동등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이. 그런 다산에게, 믿음의 무게는 과연 어느 정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