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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Dec 15. 2019

루터의 숨겨진 유산, 세속화와 교파화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저는 아무것도 철회하지 않을 것이며 철회할 수도 없습니다.
양심에 거슬러 행동하는 것은 안전하지도, 옳지도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어떻게 다른 방도를 취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가 여기 섰으니, 하나님이어 도우시옵소서. 아멘.   
  

 1521년, 루터는 보름스 회의에서 자신의 의견을 철회하라는 압력에 정면으로 맞선다. 상대는 해가 지지 않는 제국의 주인이자 가톨릭의 수호자를 자처하던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 그 앞에서, 루터는 저잣거리의 입말인 작센 독일어로 누구도 해할 수 없는 양심에 기대어 호소한다. 분노와 당혹감으로 뒤틀린 수많은 얼굴을 뒤로 한 채, 루터는 문을 박차고 걸어 나간다.

 그리고, 모든 게 달라졌다. 개인은 사제를, 라틴어를 거치지 않고도 신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탐욕스러운 로마의 지배에 맞서 독일과 저지대, 스칸디나비아가 들고 일어났고, 끝내 자유를 쟁취했다. 루터의 뒤를 이은 칼뱅은 정직한 노동과 치부(致富)를 긍정함으로써 자본주의의 길을 텄다. 바야흐로 자유와 이성의 새 시대가 열렸다. 유럽을 휘감았던 암흑의 베일은 산산이 찢겨 다시는 이어붙일 수 없을 터였다.

보름스 회의에서의 루터와 카를 5세

 하지만 종교사회학자 로드니 스타크가 볼 때, 갈가리 찢겨 마땅한 암흑의 베일은 오히려 이러한 낭만적인 환상 쪽이다. 희대의 ‘가리 파이터’이자 자기PR의 귀재 루터, 사회학의 황제로 떠받들어지는 베버에 의해 종교개혁에 대한 잘못된 이해가 퍼져나가, 종교개혁 500주년(2017)을 넘긴 지금까지도 대다수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타크의 책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는 종교개혁을 둘러싼 환상을 하나도 남기지 않고 확실하게 깨부순다.

 이정도면 컨셉인가 싶을 정도로 꿋꿋하게 유럽의 각종 지명·인명을 영어식으로 바꾼 게 신경 쓰이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1500~1558)를 프랑스의 샤를 5세(1338~1380)로 잘못 적는 등 치명적인 실수도 있지만(p.30.), 번역 역시 무난하다.    

 

로드니 스타크의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

 

 저자는 우선 종교개혁의 동기부터 와장창 뒤엎어버린다. 세간의 이해와 달리, 종교개혁을 이끈 원동력은 민중의 영적인 갈망이 아니었다. 종교개혁은 어디까지나 로마로부터의 독립을 도모하던 세속군주들이 주도한 정치적 사건이었을 뿐이다. 실제로 루터의 후원자인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잉글랜드 국교회를 창시한 헨리 8세는 모두 열렬한 성유물 덕후였지만, 교회의 막대한 재산과 성직자 임면권을 노리고 종교개혁의 파도에 올라탔다.

 이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루터 역시 로마에 대한 증오와 독일에 대한 사랑으로 불타올랐다. 그의 글에 ‘우리’ 독일이 어찌나 자주 나오는지, 마치 민족(nation)의 탄생이 종교개혁의 결과가 아니라 원인인 것처럼 보일 정도다!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와 잉글랜드의 헨리 8세

  프랑스와 에스파냐에서 종교개혁의 불길이 끝내 사그라지고 만 것도 똑같은 이유로 설명할 수 있다. 이들 국가에선 일찍부터 군주가 교회를 통제할 수 있었던 것이다. 프랑스 국왕은 1305년의 아비뇽 유수 이래 교회에 대한 영향력을 착실히 키워갔고, 마침내 1516년의 볼로냐 협정을 통해 성직자 임면권을 확보했다. 오늘날 바티칸과 마찰을 빚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이 부러워 마지않을, 오래된 갈리카니즘(Gallicanism)의 전통이다. 에스파냐 역시 통일왕국을 이룬 뒤 프랑스의 전례를 충실히 따랐다.     


아비뇽 유수시절 교황이 머물렀던 교황궁

 

 철저히 정치적인 이벤트였던 만큼, 종교개혁의 결말 역시 정치적이었다. 종교개혁을 ‘성공’시킨 독일, 저지대,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에게 돌아온 건 신앙의 자유가 아니었다. 신앙의 국유화였다. 독일 종교개혁을 일단락지은 아우크스부르크 화의(1555)의 결과는 Cuius regio, eius religio, 즉 지배자의 종교가 그 지방의 종교라는 것이었다. 독일과 스웨덴, 덴마크의 군주들은 저 위풍당당한 프랑스 국왕과 마찬가지로 성직자 임면권과 교회 재산을 집어삼켰다.

 네덜란드 정도를 제외하면, 이제 사람들에겐 군주의 종교를 믿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는 두 가지 선택지밖에 없었다. 같은 개신교라고 예외는 아니어서, 칼뱅파가 루터파를, 루터파가 재세례파를 공격하고 추방하는 일이 빈번했다. (애초에 저자는 ‘개신교’란 가톨릭의 여집합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하는, 모호하고 실체 없는 개념에 불과하다고 일갈한다)     


아우크스부르크 화의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던가. 신앙의 국유화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근대적’ 유산을 남겼으니, 바로 세속화다. 사람들은 원래 남이 시키는 일은 하기 싫어한다. 그 남이 국가라면 더더욱! 예배 출석과 세례는 물론이고 사소한 옷차림마저 단속받는 등, 경건이 국가가 강제하는 의무가 되자 사람들은 신앙으로부터 빠르게 멀어졌다. 철밥통 공무원 신분인 사제들 역시 적극적으로 신도들을 끌어 모으려 들지 않았다. 그 결과, 오늘날 스칸디나비아에서는 자신이 무신론자임을 고백한 사제가 아무렇지 않게 강대상에 서고, 국가가 여성 사제를 허용해도 누구하나 반대하지 않는다. 사실 다들 관심이 없다는 게 보다 적절한 표현이겠지만.

 반면 미국처럼 신앙의 자유를 보장한 국가에서는 오히려 종교가 맹렬해지고, 타 종교에 배타적으로 변해갔다. 물건 하나라도 더 팔려고 애를 쓰는 기업들처럼, 각 종교가 열성적으로 신도 경쟁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고향에서는 미사 한번 나가지 않던 19세기 이탈리아 이민자들은 막상 미국에서 청교도들을 접하고는 열성적인 가톨릭교도로 변했다. 마찬가지로 라틴아메리카 선교에 나선 미국인 목사들은 가톨릭의 권태로운 독점체제를 무너뜨림으로써 다시금 사람들의 믿음에 불을 붙였다.

 비슷한 맥락에서 독일의 역사학자 하인츠 실링은 종교개혁의 진정한 의의는 다름 아닌 ‘교파화(Confessionalization)’라고 이야기한다. 종교를 의식조차 못하던 절대다수의 유럽인들이, 개신교의 등장과 함께 자신은 어느 한 쪽에 속한다고 ‘고백’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였다는 것이다. 상대방을 과도하게 의식하며 국가체제를 정비하고 내부 구성원에게 끊임없이 ‘고백’을 강요한 남한과 북조선처럼, 가톨릭과 수많은 개신교‘들’ 역시 교파화를 거치며 비로소 ‘종교’로 거듭났다. 안팎으로 치열한 투쟁을 거듭하며 정체성을 확립한 가톨릭과 개신교의 경험은 이후 근대 국민/민족국가 건설의 밑바탕이 되었고 말이다.   

  

하인츠 실링

 

 이처럼 『우리는 종교개혁을 오해했다』는 단순히 종교개혁을 둘러싼 환상과 오해를 까발리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진정한 의의까지 제시했다는 점에서 훌륭한 책이다. 그럼에도 몇 가지 아쉬움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데, 크게 세 가지만 꼽아보도록 한다.     


 우선 저자는 종교개혁이 순전히 정치, 경제적인 이유로 촉발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이게 과연 타당한가 싶다. 종교개혁을 순전한 영적 각성으로만 받아들였던 기존의 이해에도 분명 문제는 있지만, 그렇다고 방향을 180도 틀어버릴 필요가 있을까? 선행연구가 세속군주의 이해관계가 종교개혁에 미친 영향을 도외시한 것도 아니고 말이다. 저자가 숱하게 인용하는 R. H. 토니의 말마따나, 역사는 관념과 물질의 복잡한 상호작용으로 보아야하지 않을까. 물론 최대한 콤팩트하게 주장을 전개해야하는 교양서에서 그렇게 쓰면 재미야 좀 떨어지겠지만.   

  

종교개혁은 순전히 정치적이고 경제적인 사건일까?

 

 저자가 자기 입맛에 맞게 학자들의 주장을 끌어다 쓰는 모습도 보기 좋진 않다. 가령 자본주의를 만든 건 칼뱅이 아니라 중세 수도원이라는 대목에서 등장하는 R. H. 토니는, 자본주의의 발전에서 칼뱅주의가 맡은 역할까지 부정한 건 아니었다. 그는 자본주의가 칼뱅 이전에 이미 태동했고 칼뱅 자신이 자본주의를 긍정할 생각도 없었지만, 칼뱅주의의 엄격한 규율과 소명의식은 결과적으로 자본주의를 배양하는데 기여했다고 주장했다. 애초에 저자가 눈에 불을 켜고 비판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의 영어판 서문을 쓴 사람이 다름 아닌 토니이기도 하다.     


R. H. 토니

 

 마지막으로, 저자가 ‘근대’ 개신교를 비판하고 ‘중세’ 가톨릭을 옹호하며 사용하는 내러티브는 다음과 같은 의문을 안긴다. 요컨대, ‘전근대’는 ‘근대’를 끌어들이지 않고는 긍정할 수 없는가? 오늘날 우리가 바람직하며 보편적이라 여기는 근대적 속성을 발견할 수 있을 때에만 전근대는 비로소 의미를 갖는 것일까?

 저자는 종교개혁을 거치며 서구가 근대를 맞이했다는 통설을 비판하기 위해, 종교개혁 이전에도 자본주의와 민주주의, 과학적 탐구정신이 존재했다고 힘주어 주장한다. 이에 따라 중세의 수도원은 자본주의의 배양실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는 민주주의의 수원(水源)으로,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과학의 발전을 예비한 종교로 탈바꿈한다. 그 결과 종교개혁이 갖는 혁명적 의의는 퇴색했을지언정, 근대중심주의와 서구중심주의는 오히려 강화되고 말았다.

중세의 수도원

 근대를 앞당김으로써 전근대를 긍정하는 이러한 태도는, 비단 서구 학자들이 자기네 역사를 다룬 저술에서만 나타나는 게 아니다. 이미 효력이 다했음에도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는 ‘언데드’인 자본주의맹아론은 더 말해봤자 입만 아프니, 최근 들어 알음알음 퍼져나가고 있는 성리학 긍정론을 살펴보도록 하자.

 혹자는 만인의 성인됨을 긍정하고 일종의 ‘사회적 자아’를 만들어낸 성리학이야말로 동아시아의 근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지표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는 결국, 그동안 양명학에서 발견하고자 했던 근대적인 무언가를 이제는 성리학에서 찾아보려는 시도에 불과한 건 아닐까? 그렇다면 이러한 주장은 근대의 시점을 양명학이 등장한 16세기에서 성리학이 등장한 12세기로 올려 잡은 것을 제외하면 어떠한 의의를 가질까? 성리학, 그리고 가톨릭은 양명학과 개신교를 ‘예비’했다는 점 말고는 아무런 가치도 갖지 못하는 걸까?      

주희와 왕양명


 근대를 끌어들이지 않고도 전근대를 긍정할 방법을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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