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유찬근 Dec 20. 2019

그럼에도 이어갈 수 있는 삶을 위해

『아빠의 아빠가 됐다』

 나는 경기도의 한 공립 유치원에서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한다. 아침 8시부터 오후 5시까지, 특수반에서 장애를 가진 어린이들을 돌본다. 유치원의 하루는 정신없이 흘러간다. 아이가 등원해 옷을 정리하고, 우유를 마시고, 놀이를 하고,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방과 후 수업을 듣고 하원할 때까지, 아이 곁에서 그의 하루를 함께한다. 힘든 날은 “아이고 되다”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고되지만, 그만큼 배우고 느끼는 것도 많다. 내가 아이들에게 주는 만큼, 나도 그들에게 받는다.

 하지만 나는 고작해야 6시간, 하루의 4분의 1 정도를 아이들과 함께할 뿐이다. 내 몫의 돌봄노동은 늦어도 오후 4시면 끝나지만, 아이들은 계속해서 돌봄을 필요로 한다. 유치원을 졸업한들 돌봄으로부터 졸업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아마 특수학교로 자리를 바꿔 보다 전문적인 돌봄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러니까 내가 경험한 돌봄이란 아주 짧고, 피상적인 셈이다. 마지막 아이가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 문을 나서면, 자리에 앉아 이런 생각을 한다. 난 과연 아이들에 대해, 그리고 돌봄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유치원의 불이 꺼져도, 돌봄은 끝나지 않는다


 돌봄을 잘 알지도 못하면서, 돌봄에 대한 글을 썼다. 조기현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를 읽은 건 글을 쓴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페이지를 넘겨가며, 후회와 부끄러움에 귓바퀴가 빨개졌다. 이 책을 조금만 일찍 알았더라면 결코 돌봄을 논하는 글 따윈 쓰지 않았을 것이다. 이 얇은 핑크빛 책은 그만큼 깊고 너른 시야로, 담담하고 따뜻하게 돌봄을 성찰한다. 감히 올해 읽은 책 중 최고라고 이야기할 수 있다.   

  

조기현의 『아빠의 아빠가 됐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묘사되는, 갑자기 죽을병에 걸린 부모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청년의 모습은 지극히 평면적이다. 장기가 적출되어 죽음을 맞이하거나, 고난 끝에 수술비를 마련해 부모를 살리거나 둘 중 하나다. 어느 쪽이든 짧고, 굵게 ‘마무리’된다.(p.165.) 

 현실 속 조기현이 마주한 돌봄은 이와는 전혀 다르다. 2011년 양옥집을 수리하던 아빠가 갑자기 쓰러져 중환자실로 실려 온 뒤부터 그의 돌봄자가 된 조기현의 삶은, 그럼에도 계속 흘러간다. 아들의 아들이 된 아빠의 삶 역시 마찬가지다. 두 번이나 중환자실에 실려가도, 당뇨와 고혈압, 갑상선 약을 달고 살아도, 발에 라면국물을 쏟아 심각한 화상을 입어도, 아빠는 꾸역꾸역 살아나간다. 사람은 쉽게 죽지 않는다.(p.81.)   

  

조기현과 그의 아빠

 

 계속해서 흘러가는 삶 속에서 조기현은 영웅서사에 도취할 수도, 자기연민에 파묻힐 수도 없다. 돌봄이라는 고난을 ‘극복’했다며 뿌듯해하거나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냐며 절망하기엔 남은 삶이 너무 길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조기현은 섣불리 돌봄자로서의 삶을 끝내기보다는, 이를 적극적으로 이어나가고자 한다. ‘흐름’이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닥쳐오는 운명이라면, ‘이음’은 삶에 의미를 부여하여 서사를 만들어가려는 주체적인 노력이다. 그는 돌봄을 거부하지도, 자신의 꿈을 포기하지도 않는 새로운 삶을 이어가보려는 결심을 한다.

 그렇게 조기현이 이어간 삶의 궤적은 견고하고, 또 아름답다. 그는 충북 음성의 공장에서 산업기능요원으로 일하면서도 취침시간을 쪼개 책을 읽는다. 공장에서 나온 뒤에는 시민단체에서 서정성과 사회성의 간극을 좁히고자 노력한다. 오랜 꿈이었던 영화 역시 절대 손에서 놓지 않는다.     


 아빠는 그런 조기현에게 짐인 동시에 버팀목이다. 아빠의 존재는 그를 지독히도 힘들게 만든다.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쫓아온다며 뛰쳐나가 애를 먹이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깝다. 두 번이나 죽음의 문턱을 넘을 뻔한 아빠를 돌보며 조기현은 적금 깨는 정도로는 안 된다고, 배우고 싶고 하고 싶은 일을 오랫동안 못할 수도 있다고 담담히 체념한다.(p.78.)

 하지만 돌봄을 통해 조기현은 비로소 아빠를 이해하고, 그와 더 친밀해진다. 돌봄이 안겨준 고민들은 그로 하여금 자신이 살아가는 사회를 더욱 치열하게 성찰할 수 있게 도와주었다. 무엇보다 돌봐야 하는 아빠의 존재는 세상의 파고에 홀로 휩쓸리지 않게끔 그를 단단히 붙잡아준다. 마치 《라이프 오브 파이》에 나오는 인간 파이와 호랑이 리처드 파커처럼, 조기현과 아빠는 서로 의지하고 또 갈등하며 망망대해를 해쳐나간다.     


영화 《라이프 오브 파이》

 이러한 조기현의 ‘이음’을, 세상은 쉽사리 긍정하지 않는다. 그는 아버지를 돌보면서 자신의 서사를 써나가려는 건강한 ‘시민’이 아니라, 기특하고 불쌍한 ‘효자’로 취급될 뿐이었다. 가난한 흙수저가 사회변혁이나 예술 같은 ‘숭고한’ 꿈을 꾸는 일 역시 허용되지 않았다. 

 맘대로 ‘불행’의 낙인을 찍었으면 지원이라도 제대로 해줬어야 마땅하지만, 그렇지도 않았다. 아빠가 처음 쓰러졌을 때는 8년 전에 이혼한 엄마가 아빠 앞으로 들어놓은 실비보험과 빈번히 이루어진 금전거래 탓에 긴급 복지 지원을 받지 못했다. 3년 뒤 기초생활수급자 지정을 위해 찾은 주민센터에서는 복지 담당자의 정교한 논리에 가로막혀 끝내 삶을 볼모로 말의 칼을 휘둘러야 했다.

 돌봄을 받는 입장인 조기현의 아빠 역시 삶을 이어갈 수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직 일을 통해서만 자신의 존재가치를 확인받던 그는 중환자실에 실려간 뒤로는 사회적으로 쓸모없는 사람이 되어버렸다. 요양병원에 들어간 뒤에도 아빠는 여전히 “움직거리고” 싶어하지만(p.157.),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기껏해야 화분에 물을 주거나 청소하는 것밖에 없다.     


 조기현은 이야기한다. 돌봄이 낙인이나 형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돌봄을 주는 쪽이든 받는 쪽이든 자신의 삶을 이어갈 수 있어야한다고 말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그간 짙은 그림자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돌봄을 전 사회의 문제로 끄집어내는 일이다. 누구든 세상에 태어난 이상 최소 한 번 이상은 다른 사람의 돌봄을 받아야만 한다는 점에서, 돌봄은 그 무엇보다 공적이다. 그런 만큼 돌봄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가정’과 ‘여성’의 울타리에만 머무를 수 없다.

 물론, 돌봄이 공적인 문제라 해서 모두가 의무적으로 돌봄에 참여해야한다는 건 아니다. 오히려 조기현은 상황에 따라 돌봄을 내려놓을 수도 있어야한다고 주장한다. 아마도 8년간 아빠를 돌보며 숱하게 미래를 단념해야만했던 자신의 경험이 반영되어 있으리라.


서울시의 돌봄 SOS센터

 

 그의 아빠처럼 돌봄을 받는 사람들 역시 무력하고 쓸모없는 존재로만 남아있을 수 없다. 돌봄 받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움직거릴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야하며, 이를 위해선 ‘생산성’을 기준으로 시민권을 부여하던 종래의 합의를 재고해야 한다. 어쩌면 돌봄을 중심으로 세상을 생각한다는 건 근대 이후 이어져온 패러다임 자체를 완전히 뒤엎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치매 노인들이 함께 살아가는 네덜란드의 호헤베이크 마을

 

《시사IN》과의 인터뷰에서, 조기현은 가난과 돌봄을 모르는 사람들을 미워한 게 미안해서 더 열심히 글을 썼다고 털어놓았다. 누구보다 당당해도 될 때에 오히려 미안해하는 저자는, 내게 하나의 놀라움으로 다가온다. 자신의 경험을 특권하기보다는 이를 딛고 더 넓은 세상을 보는 저자, 적을 상정하고 사정없이 몰아붙이기보다는 차분히 대안을 고민하는 건강한 서사는 정말이지 오랜만이다. 

  조기현 본인이 이야기했듯, 사회복지사가 누군가를 돌보는 경험을 사회적으로 승화하는 유일한 길은 아닐 것이다.(p.168.) 이미 그는 서사와 이미지를 통해 얼마든지 사회적 이슈에 접근할 수 있다는 걸 자신의 첫 책을 통해 여실히 보여주었다. 나는 앞으로도 그가 글을 쓰고 영화를 만들기를, 삶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그리고 언젠가 그가 가장 강연해보고 싶은 장소로 꼽은 공공도서관에서, 그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기를 희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