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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Dec 25. 2019

세상을 북돋는 도덕

『R. H. 토니- 삶, 사상, 기독교』

 무려(?) 14일간 국회 앞에서 농성을 벌이다 끝내 병원으로 실려간 자유한국당 대표 황교안.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로 이낙연 총리와 자웅을 겨루는 그이지만, 열성 지지자만큼이나 안티도 많아 지지층 확장에 애를 먹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애매한 태도, 강한 반공주의, 리더십 부재, 권위의식까지, 아직까진 그를 지지해야 할 이유보단 그렇지 않은 이유가 많다. 그 중에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황 대표에 대한 지지를 주저하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은, 다름 아닌 그의 신앙심이다.

 황 대표는 독실한 침례교 신자다. 사법연수원 시절 신학대학원을 졸업해 전도사가 되었고, 개신교 계열의 민영교도소인 소망교도소 설립에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세상법보다 교회법이 우선이라고 이야기해 논란을 빚기도 했으며, 지난 석가탄신일에는 절을 찾고도 합장을 하지 않아 이슈의 중심에 섰다. 엄연한 세속주의 국가인 대한민국에서 황 대표의 행보는 ‘사적’인 신앙을 ‘공적’인 자리에 끌고 들어온, 비판받아 마땅한 언동이리라.


국회 앞에서 농성하는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

 

하지만 신앙을 개인의 내면에 ‘가둬두는’ 게 가능할까? 동서를 막론하고, 전근대에 종교는 개인의 사적인 믿음이 아니라 삶에 안정감과 리듬을 부여하는 거대한 체계였다. 신성은 고고한 성채가 아니라 범속한 일상에 깃들었고, 일상은 신성을 통해 비로소 의미를 가질 수 있었다. 양자는 무 자르듯 깔끔하게 나뉘지 않았다. 유럽과 아메리카의 세속정부가 무려 20세기 초반까지 이어간 교회와의 싸움 역시, 본질은 사람들의 삶을 통제할 권한을 누가 갖느냐에 있었다. 어쩌면 황 대표는 그 누구보다 종교의 본령에 충실한 사람일지도 모르겠다.

 종교는 기껏해야 믿을 자유 따위에 만족할 수 없다. 세속주의에 떠밀려 무력하게 사라지거나, 세상을 북돋을 새로운 도덕을 마련해야 한다. 20세기 전반 영국 노동당에서 활동한 정치인이자 사상가, 경제사학자였던 R. H. 토니는 후자의 입장에 섰다. 그 역시 황 대표와 마찬가지로 당대의 문제는 종교가 개인의 내면에 안분지족한데 따른 것이라는 인식에서 출발했지만, 다다른 결론은 완전히 달랐다. 고세훈의 『R. H. 토니- 삶, 사상, 기독교』는 토니의 삶과 사상, 그리고 그 안에 자리한 기독교라는 지반에 대해 탐구한 훌륭한 책이다. 다소 산만한 감이 있지만, 한국인이 이런 책을 썼다는 사실이 놀랍고 감사하다.     


고세훈의 『R. H. 토니- 삶, 사상, 기독교』

 1880년 인도 캘커타에서 엘리트 관료의 아들로 태어나 1962년 런던에서 세상을 떠날 때까지, 토니의 삶에는 항상 기독교가 함께했다. 명문 사립고인 럭비(Rugby School)에선 훗날 캔터베리 대주교가 되는 윌리엄 템플과 우정을 쌓았고, 옥스퍼드 베일렬 칼리지에선 성공회 사제 찰스 고어를 통해 사회적 도덕주의에 눈 떴다. 특히 찰스 고어는 토니 평생의 스승으로, 앵글로-가톨릭주의를 혁신하여 교회가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에 뛰어들 것을 주문한 그의 신념은 토니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다. 

 물론 토니는 그리 성실하게 믿음생활을 하진 않았고, 주변으로부터 ‘나이롱 신자’라는 비아냥을 사기도 했다. 그럼에도 토니의 마지막 제자인 에일머의 말마따나, 그는 가장 먼저 크리스천이었고, 그 다음에 민주주의자였으며, 그 다음에 사회주의자였다.(p.16.)


토니의 지우(知友) 윌리엄 템플과 평생의 멘토가 되어준 찰스 고어


 자신이 살았던 20세기 영국의 문제를 고민하는 과정에서, 토니는 우선 역사를 들여다보았다.  그는 시체가 아니라 살아있는 것을 소환하여 당대의 문제를 새로운 각도로 조명하기 위해(p.253.) 종교개혁을 전후로 한 유럽의 역사를 훑었고, 그 결과가 바로 세기의 명저인 『16세기 농업혁명』(1912)과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1926)이다. 특히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이하 『발흥』)은 당대 최고의 베스트셀러로 등극했고, 1540년에서 1640년까지의 잉글랜드를 “토니의 세기”로 불리게 할 만큼 역사연구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토니는 학부 졸업을 끝으로 제도권 교육을 마무리했으니, 그야말로 ‘척척석사’인 셈이다.    

 

1540년에서 1640년까지를 "토니의 세기"로 만들어준 『기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토니는 『발흥』에서 세간의 통념과 달리, 자본주의는 이미 중세에 그 싹을 틔웠다고 이야기한다. 수도원이 운영한 대농장은 체계적이고 효율적인 관리로 부를 일궈갔고, 이탈리아의 가톨릭 은행가들은 전 유럽에 지점을 세우고 광대한 금융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종교개혁이 일어난 16세기 초 유럽 최대의 도시는 저지대의 안트베르펜으로, 당연히 가톨릭을 믿었다. 

 종교개혁의 사도 루터가 공격한 것도 당대 만연했던 물질주의였다. 그는 로마에 또아리를 튼 탐욕스런 적그리스도가 독일의 부를 쪽쪽 빨아들이는 현실에 크게 분개했고, 사제를 거치지 않고 오직 믿음을 통해 개개인이 주와 직접 대면할 수 있는 새로운 신앙을 주창했다. 그 유명한 이신칭의론과 만인사제론이다.

 하지만 루터는 중대한 실수를 저질렀으니, 교회조직의 타락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세상에 대한 교회의 역할을 일체 부정해버린 것이다. 비록 잘 되지는 않았지만, 가톨릭은 절제되지 않은 부를 규율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아퀴나스를 비롯한 스콜라 철학자들은 자연법에 의거해 이자를 통제할 정교한 방안을 고민했고, 청지기사상(stewardship)의 전통에 따라 재산권은 항상 그에 상응하는 책임을 수반하는 것으로 간주했다. 

 안타깝게도, 루터는 기성교회를 격렬히 비판했을 뿐 그간 교회가 맡아온 역할을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에 대한 비전이 없었다. 그에게 중요한 건 누구도 해할 수 없는 개개인의 양심이었지, 생활고에 찌든 독일 농민들이 일으킨 봉기가 아니었다. 루터로 인해 이기심을 통제할 수 있는 사실상 유일한 조직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은 반면, 믿음은 사람들의 내면으로 퇴각해버렸다. 그 결과, 욕망을 무제한적으로 추구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말았다. 루터는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리고 만 것이다.      


개인의 양심에만 관심이 있었던 루터는 독일 농민전쟁을 외면했다

 

루터와 달리 칼뱅은 체계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을 갖고 있었으며, 쥬네브에서 이를 현실로 옮길 수 있는 기회까지 얻었다. 그는 이익추구를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이를 신의 뜻에 종속시키는 쪽을 택했다. 그 결과 고안된 개념이 바로 ‘소명’으로, 본디 일상의 노동마저 수도승처럼 경건하고 성실하게 수행하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실제로 칼뱅이 컨시스토리(consistory, 일종의 자문회의 겸 감찰기관) 의장으로 평생 시민들을 단속했던 쥬네브에서, 상행위는 철저히 종교에 종속되었다.

 반면 청교도가 박해받는 소수파였던 잉글랜드에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결과가 발생했다. 종교가 상행위를 붙잡아두기는커녕 상행위가 종교를 방패삼아 그 정당성을 인정받은 것이다. 분명 칼뱅주의의 소프트웨어는 반자본주의적이었다. 허나 그 하드웨어, 예컨대 예정설이나 소명의식, 엄격한 기율 등은 자본주의와 ‘선택적 친화성’을 가졌고, 잉글랜드에서 살아남은 건 소프트웨어가 아닌 하드웨어 쪽이었다. 토니 자신의 우아한 비유처럼, 영적 화살을 쏘는 사람들은 그것이 어디에 떨어질지에 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p.298.)   

  

칼뱅은 컨시스토리를 통해 쥬네브 시민들을 엄격히 통제했다


 1660년의 왕정복고를 기점으로, 잉글랜드에서 교회는 사회제도들을 길들이는 독자적인 가치기준을 마련하려는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빈곤은 사회문제에서 개인의 책임으로 전락했다. 로크는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책무는 재산의 보존이라 천명했다. 이 신성불가침한 재산권을 행사하는 데 뒤따르는 책무는, 물론 전혀 없었다. 

 18세기에 이르면 경제는 윤리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인 자기규제 메커니즘이며, 그 언어는 수학과 물리학이라는 인식이 점차 자리를 잡았다. 애덤 스미스의 말마따나, 이제 사람들은 특별히 윤리적인 행위를 할 필요 없이 그저 성실하게 이윤을 추구하면 될 터였다. 개개인의 이기심도 보이지 않는 손을 거치면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19세기를 거치며 ‘탈취사회’가 도래한다. 탈취사회란 첫째로 권리와 기능이 분리되고, 둘째로 사유재산을 신성시하며, 셋째로 경제이익의 무한한 추구를 긍정하는 사회를 일컫는다. 탈취사회를 특징짓는 소유방식은 이른바 ‘무기능자산’으로, 사회적 이윤을 다하지 않고 이윤을 추구하는 데만 쓰이는 자산을 일컫는다. 무기능자산은 탐욕스럽게 제 몸집을 불려가고 사회의 분열은 점점 더 심해져가는 가운데 맞이한 20세기를, 토니는 깊이 우려했다.      


로크는 신성불가침의 재산권을, 스미스는 시장의 자기조절 메커니즘을 옹호했다

 

그렇다면 탈취사회를 극복할 대안은 무엇인가? 우선 토니는 페이비언 협회의 개량적 사회주의는 답이 아니라고 단호하게 얘기한다. 공리주의적인 마인드로 생활수준의 개선에만 치중한다면 사람들은 서비스의 혜택을 입는 소비자에서 벗어날 수 없고, 자본주의 극복 역시 요원하다는 게 토니의 입장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방을 청소하면서 영혼의 창은 닫아두는 우를 범했다. 토니가 보기에 개개인의 도덕적 각성이 없는 물질적 진보는 오히려 탈취사회의 폐단을 심화시킬 뿐이었다.

 토니에게 무엇보다 시급하고 중요한 과제는 다름 아닌 도덕, 구체적으로는 기독교 정신의 회복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위계가 뚜렷한 중세 가톨릭의 영적 유기체 사회로 돌아가길 바랐던 건 아니다. 토니는 무한하고 전능한 신 앞에서 모두가 똑같이 작아짐으로써 평등을 이루는 사회, 동료애로 연대하며 민주적으로 문제를 해결해가는 사회, 자산이 더 이상 이윤추구 그 자체가 아니라 공통의 도덕에 이바지하는 사회를 꿈꾸었다. 국가와 시장이 아닌, 도덕의 지도아래 모두가 연대하여 나름의 쓸모를 담당하는 사회, 토니는 이를 ‘기능사회’라 명명한다.      


토니의 『탈취사회』

 

토니는 자신이 살았던 20세기를 위한 도덕을 구태여 새로이 창안할 필요는 없다고 보았다. 오랜 세월 서구가 공동의 자산으로 가꿔온 기독교라는 샘에서 지혜를 길어 올리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아마도 시민 대부분이 동의할 수 있는 도덕적 지반을 갖고 있다고는 말하기 어려울 것이다.

 오랜 세월 이 땅의 지배이념으로 군림해온 성리학은 19세기의 위기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빠르게 소멸해버렸다. 무력한 황실을 뒷방으로 밀어내고 조선을 접수한 일본의 총독부는 식민지 조선에 일체의 정치적 공간을 허용하지 않았다. 지식인이란 문인 아니면 테크노크라트인 사회에서 사회를 통합할 도덕을 마련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해방 이후에도 도덕을 갖지 못하는 상황은 계속되었다. 분단과 친일이라는 ‘과오’를 안고 출발한 정부가 강요하는 도덕은 사람들 사이로 쉽사리 녹아들지 못했다. 위에서 내리누르는 도덕과 아래에서 치고 올라오는 도덕이 계속 경합했으나, 그 어느 쪽도 절대적인 우위를 점하지 못했다. 2019년을 얼마 남기지 않은 지금, 그간 사회를 아우르는 도덕을 제시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던 ‘산업화 서사’와 ‘민주화 서사’는 각각 박근혜 탄핵과 조국 사태로 완전히 무너져 내린 형편이다.      


산업화 서사는 박근혜 탄핵으로, 민주화 서사는 조국 사태로 완전히 무너져내렸다


 다시 황교안 대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황 대표, 그리고 그의 행보를 지지하는 적잖은 기독교인들은 최소한 하나의 진실을 보여준다. 바로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회를 통합할 수 있는 도덕을 향한 갈망이다. 그렇다면 국가는 이러한 갈망 앞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인가? 애매한 다원주의로 일관할 것인가, 아니면 ‘산업화 서사’와 ‘민주화 서사’를 대신할 새로운 도덕을 제시할 것인가? 어쩌면 성리학이 저지른 최악의 잘못은 조선을 끝내 멸망의 구렁텅이에 몰아넣은 게 아니라 너무 빨리, 그리고 추하게 무너짐으로써 이 땅에 다시는 세상을 북돋을 도덕을 세울 엄두를 내지 못하게 만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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