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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Dec 29. 2019

이야기를 엮어 만든 바다의 나라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

 지난 10월 31일, 오키나와의 슈리성이 화재로 잿더미가 되었다. 비록 태평양 전쟁 때 미군의 폭격으로 한 번 전소된 것을 1992년에 복원한 ‘모조품’일지언정, 독립적인 해상왕국이었던 류큐의 역사를 상징하는 슈리성이었던 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의 상실감은 컸다.


불타는 슈리성

 

과거 바다 건너 한반도와도 활발히 교류했던 류큐 왕국의 궁궐이 불에 타버렸다는 소식에 많은 한국인들 역시 애도의 마음을 전했다. 흔히 사람들이 ‘일본’하면 떠올리는 높게 솟은 천수각이 아닌, 조선의 경복궁과 유사한 정전(正殿)의 모습도 한국인들의 안타까움을 더했으리라. 실제로 슈리성의 주인인 류큐 왕국은 당시의 ‘글로벌 스탠다드’인 조공-책봉 체계에 적극적으로 편승하여 평화와 번영을 누렸던, 전근대 동아시아 세계의 당당한 일원이었다. 열도 한구석에 처박혀 자족적으로 살아온 ‘왕따’ 일본과는 달랐다.

 하지만 류큐 왕국은 조선처럼 ‘전형적인’ 유교국가는 아니었다. (사실 페어뱅크 등에 의해 전근대 동아시아 조공국의 ‘전형’으로 취급되어 온 조선은, 외려 매우 ‘특수한’ 케이스였다) 사진만으로는 알 수 없지만, 슈리성은 동쪽을 등지고 서면(西面)하고 있다. 대체로 북쪽을 등지고 남면하고 있는, 경복궁을 비롯한 전근대 동아시아 왕조의 정전과는 다르다. 게다가 슈리성 정전의 2층에는 국왕을 제외한 남자의 출입이 금지된, 여성 사제들만의 비밀스런 공간이 자리하고 있었다. 동아시아 앞바다에 봉긋이 솟아오른 이 작은 섬나라에는, ‘유교’나 ‘조공-책봉’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던 것이다.


슈리성 정전과 경복궁 근정전


 정진희의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이 주목하는 건 바로 이러한 특별함이다. 동아시아 여타 지역에 비해 국가의 성립이 늦었던 류큐는 백성들을 다스리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무속과 신화를 적극 활용했다. 기코에오기미(聞得大君)를 정점으로 한 여성 사제 조직이 각종 의례를 주관했고, 국왕은 성지(聖地)에서 매년 영험한 힘을 부여받았다.

 신화 역시 나라를 떠받치는 중요한 대들보였다. 나라에 위기가 닥칠 때마다, 류큐의 사람들은 신화를 통해 고난을 이겨내고 바람직한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했다. 책을 읽다 보면 류큐 왕국은 신화라는 이야기를 엮어 바다에 띄운 나룻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정진희의 『신화로 읽는 류큐 왕국』

 

류큐 왕국의 본섬인 오키나와에 ‘국가’라 불릴만한 정치체가 들어선 건 14세기 무렵이다. 그 이전까진 여러 아시(按司)들이 각지에 ‘구스쿠’라는 성채를 쌓고 경쟁하는, 일종의 춘추전국시대가 계속되었다. 여러 아시들은 스스로를 태양이라는 뜻의 ‘데다’로 일컬었는데, 이는 군사적 용맹성의 표상이었다. 일단 구스쿠를 쌓고 아시의 자리에 오르면 누구나 데다를 자임할 수 있었으니, 당시 류큐의 하늘엔 태양이 여러 개 떠있었던 셈이다.

 상황이 달라진 건 영조왕(재위 1260~1299) 때부터다. 류큐 개벽신화에 등장하는 천손씨의 후손이자 선양에 의해 중산왕(中山王)의 자리에 오른 영조왕은 데다가 아닌 ‘데다코(日子)’로 불리었다. 겨우 ‘아들 자’ 하나 더 붙은 게 무어 그리 대수냐 생각할 수 있지만, 아들이란 부모로부터 무언가를 ‘독점적으로’ 물려받은 존재다. 이제 너도나도 데다를 칭하는 시대는 지나고, 초월적인 태양으로부터 세상을 다스릴 능력을 부여받은 단 한명의 지배자만 남은 것이다.      


나카구스쿠


 중국의 천자에 상응하는 데다코의 등장과 함께, 각종 의례도 재편되기 시작한다. 세상을 다스리는 영험한 마나인 ‘세지’는, 본래 각 구스쿠의 아시들이 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힘이었다. 허나 영조왕 이후 바다 저편의 초월적 타계인 ‘니라이 카나이’로부터 세지를 받을 수 있는 존재는 데다코 한 명 뿐이었다. 세지를 충전하는 성지(聖地)인 ‘데다가아나(태양의 굴)’ 역시 동쪽 바다에 위치한 작은 섬인 구다카지마(久高島) 한 곳으로 굳어졌다.

 류큐의 국왕은 매년 2월 험한 바다를 건너 구다카지마에서 세지를 충전하고 돌아옴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부여받는 한편 해상왕국의 정체성을 되새겼다. 서문에서 언급했던, 서쪽을 바라보는 슈리성의 정전 역시 동쪽으로부터 세지를 부여받는 태양왕의 관념을 형상화한 것이다.


구다카지마


 노로(祝女)라는 여성 사제로 이루어진 전국적 무녀조직도 태양왕의 권력을 뒷받침했다. 상진왕(재위 1477~1526)이 임명한 최초의 기코에오기미부터가 본디 왕의 누이였던 사람이다. 국왕과의 혈연관계가 오라비를 지켜주는 누이 신인 ‘오나리 가미’에 대한 류큐의 전통적인 신앙과 포개지며, 기코에오기미는 오라비 국왕을 서포트해주는 누이 사제로 자리매김했다.

 기코테오기미의 즉위식은 구타가지마 맞은편 해안에 위치한 섬인 세화 우타키(齊場御嶽)에서 이루어졌다. 또한 슈리성 정전의 2층은 국왕을 제외한 남성의 출입이 금지되었는데, 국왕은 매일 아침 이곳에서 여성 사제들과 함께 동쪽을 향해 의례를 지냈다. 이 모든 게 성(聖)과 속(俗)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준다. 국왕의 세지는 누이 사제를 통해 날마다 새로이 차올랐고, 갱신된 세지는 국왕이 나랏일을 보는데 매우 요긴하게 쓰였다. 다마키 마사미의 말을 빌리자면, 기코에오기미는 “최대의 왕권 이데올로그”였다.(p.117.)     


기코에오기미와 세화 우타키


 성과 속이 한데 얽혀 서로를 북돋으며 나라살림을 꾸려가던 류큐의 풍경은, 그러나 1609년 이후 크게 뒤바뀌기 시작한다. 시마즈 가문이 이끄는 사쓰마번(현 가고시마현)이 류큐를 침략해 수도인 슈리(首里)를 초토화하고 국왕인 상녕을 포로로 끌고 간 것이다. 이후 류큐는 전통적인 종주국인 중국과 더불어 사쓰마번과 에도 막부 역시 상전으로 섬기는, 이른바 양속(兩屬)체제에 놓이게 된다. 이때부터 메이지 신정부에 의한 오키나와현 설치(1879)까지의 시기를, 사쓰마번 침략 이전 시기인 ‘고류큐’와 구분해 ‘근세 류큐’라 부른다.

 수도가 불타고 국왕이 잡혀간 초유의 사태 앞에서, 류큐의 지도층은 무엇보다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냄으로써 국난을 극복하고자 했다. 대부분의 국가기록이 전소되기도 했거니와, 앞으로 나아갈 길을 정하기 위해서라도 지금까지의 역사를 재해석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는곧 미래를 담는 그릇이라는 사실을, 이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사쓰마의 류큐 침공

 

시작은 한자와 가타카나를 표기문자 삼아 일본어로 쓴 『중산세감』이었다. 편찬자 향상현(向象賢, 일본식 이름은 하네지 초슈)은 일본에서 유학하며 일본적 교양을 익혔을 뿐 아니라 류큐를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시마즈 가문의 위력을 몸소 체험한 인물이다. 일본에서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그는 류큐의 창세신화를 일본의 기기신화(『고사기』와 『일본서기』에 수록된 일본신화)와 비슷하게 재구성한다. 일본에 예속되고자하는 ‘식민지 근성’이 아닌, 류큐 역시 일본과 같은 신국(神國)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실제로 향상현을 지배한 감정은 일본에 대한 동경보다는, 일본에 무력하게 무너진 고류큐에 대한 적개심이었다. 섭정의 자리에 오른 그는 무녀조직의 영향력을 줄이고자 노력했고, 국왕의 구다카지마 행행(行幸)을 끝내 폐지시켰다. 류큐 창세신화의 재구성 역시 이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향상현은 고류큐의 각종 의례와 관습을 ‘태초의 것’으로 봉인해버림으로써 새로운 토대를 구축할 여지를 만들었다.     


향상현과 『중산세감』

 

향상현의 뒤를 이은 학자관료 채탁과 그의 아들 채온이 편찬한 『중산세보』에 이르러, 신화라는 이야기는 다시금 재구성된다. 부자 모두 유학자였을 뿐 아니라 일본의 지배에 대한 반발로 외려 중국에 대한 동경이 강해지고 있었기에, 창세신화에 유학적 색채가 짙게 녹아든 것이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게 바로 문자로, 『중산세감』과 달리 『중산세보』는 가나문자 없이 순수하게 한문으로 쓰였다.

 문자만 달라진 게 아니다. 중국의 복건성을 기준으로 류큐의 위치가 구체적으로 기록되었을 뿐 아니라, 음양론에 기반한 유교적 합리주의가 태양왕 데다코를 몰아냈다. 데다코라는 왕가의 신화는 류큐라는 국가의 신화로부터 분리되었고, 창세신화의 자리를 꿰찬 건 후자 쪽이었다. 그간 왕권을 지탱해오던, 기코에오기미를 정점으로 한 무녀조직의 위상 역시 꾸준히 약해져갔다. 그 빈자리를 채운 건 농경의 수호자라는, 유교의 이상적인 군주에게 어울리는 ‘민본주의적인’ 상징이었다.     

 

채온과 『중산세보』


 이처럼 류큐의 지도층이 난관을 극복할 새로운 이야기를 엮어나가는 과정은 굉장히 흥미롭게 읽히면서도, 몇 가지 의문과 아쉬움 역시 남긴다. 가장 큰 궁금증은 역시, 엄연한 해상왕국인 류큐의 신화 속에서 유달리 두드러지는 농경의 중요성이다.

 저자는 16세기부터 서구 세력이 아시아로 진출하고 명나라가 해금을 철폐하여 류큐의 해상무역 경쟁력이 약화된 데다, 1609년 사쓰마의 침략 이후 각종 수탈이 횡행했기에 왕조가 불가피하게 농업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렇다면 창세신화에서 농경을 강조한 것 역시 변화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한 고육책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를 감안하더라도 류큐의 창세신화에서 바다가 갖는 중요성은 농경의 그것에 비해 확 떨어진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바다는 기껏해야 흰 항아리에 담긴 보리와 조, 콩을 운반하는 매개(『유로설전』에 남아 있는 구다카지마 행행의 기원)거나 중산왕 찰도가 해상무역으로 부를 쌓아 끝내 왕으로 추대되게끔 도와주는 수단에 불과하다.(『채온본 중산세보』) 그나마도 찰도가 바다를 오가며 사고팔았던 건 농기구를 만들기 위한 철괴였다.

 애초에 사쓰마의 침략이 초래한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왕조가 찾은 해법이 농경이었던 것도 이해하기 어렵다. 류큐의 본진인 오키나와섬(1206.99㎢)은 제주도(1833.2㎢)보다도 좁다. 신숙주가 『해동제국기』에서 이야기했듯 류큐는 땅은 좁고 사람은 많은데, 아무리 농경에 ‘올인’한들 그 많은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었을까. 부자는 망해도 3년은 먹고산다고, 몇 세기에 걸쳐 구축해온 무역 네트워크도 남아있었을 텐데 말이다.


류큐에게 바다란 무엇이었나

 

최근 학계에선 해상세력의 움직임을 육상 정치권력(왕조)의 ‘종속변수’가 아닌, 역동적인 ‘독립변수’로 바라보려는 시도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작년에 민음사에서 나온 『바다에서 본 역사』 역시 해상세력의 입장에서 재구성한 동아시아사 연구가 매우 높은 수준에 이르렀음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학계의 트렌드에 비추어보았을 때, 류큐의 창세신화에서 드러나는 농경의 엄청난 존재감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지기까지 한다. 아무리 온 바다를 누비고 다닌들, 국가가 자리한 곳은 배가 아닌 육지이기에 어쩔 수 없었던 걸까? 아니면 저자가 (필연적으로 농경을 강조할 수밖에 없는) 국가의 공식적인 창세신화에 집중한 나머지, 바다의 존재를 미처 살피지 못했던 걸까? 원래 쓰기로 마음먹었다던 류큐에 대한 교양서를 혹 다시 내게 된다면, 저자가 류큐에게 바다란 무엇이었는가를 예의 그 고운 문장으로 조곤조곤 알려주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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