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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an 04. 2020

결국은, 사회의 품격

『과학의 품격』

 질문 하나. 오늘날 수많은 분과학문 중 유독 ‘유사’ 논쟁에 휘말리는 분야는 무엇일까? 바로 역사학과 (의학을 포함한 넓은 의미의) 과학이다. 한데 이 둘이 자신의 ‘유사’ 쌍둥이들에게 시달리는 이유는 좀 다르다. 역사학이 특유의 ‘만만함’ 때문에 이른바 ‘재야 사학자’들의 좋은 먹잇감이 된다면, 과학은 외려 그 ‘어려움’으로 인해 극렬한 반감의 대상이 된다.


역사학과 과학은 유독 '유사' 논쟁에 쉽게 휘말리는 대표적인 분과학문이지만, 그 이유는 완전히 다르다

 

 평범한 시민에게 과학은 막연한 동경과, 그만큼의 공포를 함께 불러일으키는 존재다. 일상 언어와는 몇 억 광년정도 떨어진 것만 같은 난해한 수식, 그걸 또 아무렇지 않게 사용하는 너디한 ‘전문가’들, 그리고 이들이 내놓은 결과물의 가공할 파괴력까지! 시민 입장에서는 도저히 과학과 맞대결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여기에 근대문명 전반에 대한 낭만주의적인 반감까지 가미될 경우, 선량한 시민은 차라리 유사과학의 너른 품에 안기기를 선택하고 만다.

 하지만 아무리 무섭고 싫어도 과학에 등을 돌리면 안 된다. 시민과 과학의 거리가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과학을 악용해 제 잇속을 채우려는 이들이 활개칠 공간이 넓어지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시민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덕목은, 과학에 대한 숭배나 혐오, 혹은 무관심이 아니다. 과학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자 진지하게 고민하고 또 노력하는 자세다. 과학 전문 기자이자 지식 큐레이터인 강양구가 꾸준히 시민과 과학의 만남을 주선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번에 나온 강양구의 책 『과학의 품격』 역시 과학 전문가가 아닌, 민주사회의 시민으로서 과학과 어떻게 관계를 맺을지 치열하게 고민한 결과가 담겼다. 서점에 깔리기 훨씬 전부터 저자가 외국의 이름난 언론에 실린 과학 기술 에세이와 비교해도 “정보의 넓이, 고민의 깊이, 해석의 참신함 면에서 떨어지지 않는다고”(p.16.) 장담한 책인데, 읽다보면 괜히 표지에 얼굴을 내건 게 아니라며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한 사회의 지적 역량은 모어로 쓰인 교양서의 수준에서 드러난다고 생각하는 사람으로서 ‘교양의 품격’, 나아가 ‘저자의 품격’을 보여준 이 책이 매우 반갑다.     


강양구의 『과학의 품격』

 

 미리 경고부터 해두자. 만일 놀랍고도 경이로운 과학의 원리와 자연의 신비를 알고 싶은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실망할 수도 있다. 강양구의 관심은 과학이 이렇게나 대단하다고, 혹은 자연이 이렇게나 아름답다고 열을 올리는데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과학이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체계라는 근대 이래의 오래된 믿음에 도전하며, 자연과 사회의 이분법을 흩뜨려놓는다. 강양구가 고민하는 건 ‘과학’이 아니다. 어디까지나 ‘사회 속의 과학’이다. 

 그렇게 강양구가 그려낸 사회 속 과학의 풍경은, 안타깝게도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몇 가지 사례를 들어 보자.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누구와도 소통할 수 있는 ‘초(超)연결 사회(hyper-connected society)’가 도래했음에도 사람들은 집단 지성을 발휘하여 슬기로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비슷한 성향의 사람들끼리 똘똘 뭉쳐 ‘집단 바보’가 되어갈 뿐이다. (「‘집단 지성’인가, ‘집단 바보’인가」)

 기술의 발전이 여성을 가사노동에서 자유케 하리라는 전망 역시 빗나갔다. 세탁기나 청소기처럼 가사노동을 수월케 해주는 기계가 도입됨에 따라 이전까지 남편이나 아들의 몫이었던 ‘힘든 일’ 역시 여성에게 떠넘겨졌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계의 도움은 여성으로 하여금 가사노동을 더욱 자주, 꼼꼼하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내몰았다. 끝없는 가사노동에 시달리다 끝내 손목이 망가져 병원을 찾은 김지영이 의사에게 집안일은 기계가 다 해주는데 요즘 여자들은 힘들게 뭐냐는 모욕을 받은 『82년생 김지영』의 한 장면은, 그래서 더 아프다. (「지영 씨, 세탁기 때문에 행복하세요?」)


과학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82년생 김지영은 여전히 가사노동에 시달린다

 

 그래, 과학기술의 진보가 꼭 사회의 진보를 가져오지 않는다는 건 인정한다. 이미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어온 말이기도 하고. 하지만 강양구는 여기서 멈출 생각이 없다. 오히려 그는 과학탐구의 대상이자 ‘사회’와는 별개라고 여겨지던 ‘자연’의 존재마저 의심한다. 

 책 맨 앞에 실린 「추천의 글」에서, 물리학자 김상욱은 “자연에 인간이 만든 어떤 의미나 품격은 없다”고 일갈한다.(p.7.) 하지만 글쎄, 지금 당장 인간이 멸종한다면 고양이를 제외한 거의 모든 동물들이(심지어 쥐나 바퀴벌레까지도!) 도시에서 사라지고(「인간 없는 도시의 주인」), 강제로 국립공원을 지정해 원주민을 몰아내고 반달곰을 ‘복원’하는 상황에서(「설악산은 ‘자연’이 아니다」), 자연을 인간과는 완전히 무관한 그 무엇으로 생각할 수 있을까? 자연을 스스로(自) 그러한(然) 것으로 여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파국을 막기 위한 아무런 ‘인위적’ 노력도 기울이지 않고 숙명론에 빠지는 것이야말로, 강양구가 진정 경계하는 일이 아닐까?      


설악산 케이블카만큼이나, 설악산 자체도 '인공'적이다

 

 이처럼 “과학 기술은 그 자체로 ‘문화’다.”(p.14.) 뿐만 아니라 지구에서 인류의 존재감이 지나치게 커져버린 결과, 사회와 자연은 서로를 분간해내기 어려울 정도로 얽혀 들어갔다. 이제 인간과는 무관한 ‘순수한’ 자연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시민이 과학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나아가 과학의 품격을 지키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강양구 본인이 명시적으로 언급하진 않았지만, 행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해법은 크게 두 가지다.      


 첫째, 과학 기술에 대한 꾸준한 감시와 비판, 그리고 윤리에 대한 고민이다. 저자가 책 1부를 통째로 할애한, 이른바 ‘황우석 사태’를 둘러싼 치열한 투쟁이 대표적이다. 강양구가 들려주는 사건의 전모는 이를 모티브 삼아 만든 임순례 감독의 영화 「제보자」처럼 극적이진 않다. 하지만 합리적인 의심을 시작으로 기자와 과학자, 평범한 시민들이 힘을 합쳐 끝내 진실을 밝혀내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두툼한 사회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힌다. 무려 20년간 과학 기술의 민주화를 위해 성실하게 논리를 개발하고 제도를 제안해온 시민 과학 센터 역시 좋은 사례다.(「시민 과학 센터, 너의 이름을 기억할게!」)     


영화 「제보자」

 

 둘째, 과학을 품은 사회 자체의 개혁이다. 과학 기술이 아무리 발전한들, 사회가 여전히 정체해있다면 세상은 좋아지지 않는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세탁기와 청소기라는 새로운 기술이 가부장제라는 기존의 억압을 더욱 강화시킨 사례 역시 얼마든 찾을 수 있다. 

 심지어 과학은 이제 사람들이 당연히 과학의 문제라 여기는 것들에서조차 맥을 못 추고 있다. 날이 갈수록 심각해지기만 하는 기후변화가 대표적으로, 과학은 이 희대의 난제 앞에서 자신의 전매특허인 ‘확실성’을 포기해야만 했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이 심화됨에 따라, 안 그래도 복잡한 기후 과학의 불확실성이 더욱 증폭됐기 때문이다.(「기후 변화, 과학이 정치를 만날 때」)

 인간으로 인해 자연은 점점 더 변덕스러워지고 끝내는 병들고 말았지만, 강양구는 여기서도 희망을 본다. 어쨌든 인간이 자연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니만큼, 자연을 충분히 덜 아프게 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2억 5000만 년인 고생대 페름기에 일어난 다섯 번째 대멸종 전문가 더그 어윈(Doug Erwin) 역시 아직 여섯 번째 대멸종이 시작하지 않았기에 지금 우리의 고민과 선택, 행동이 의미를 갖는다고 이야기한다.(「여섯 번째 ‘대멸종’」)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과학의 품격이라기보다는, 과학을 품은 사회의 품격이다.     

 

이른바 '인류세'의 도래는 절망적이지만, 강양구는 그 안에서도 희망을 본다

 

그렇다면 어떻게 품격을 갖춘 사회를 만들어갈 것인가? 강양구는 이에 대해선 구체적인 대안을 내놓지 않는다. 햇볕과 바람, 심지어는 유기물을 태워 에너지를 얻는 바이오매스까지 포함해 다양한 에너지원이 섞인 ‘모자이크 에너지’ 모델을 상상하자거나(「에너지, 슈퍼 히어로는 없다」) 환경이 유전자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만큼 보다 따뜻하고 평등한 공동체를 만들자는 등(「행복했던 마을의 몰락」), 단편적인 대책만을 제시할 뿐이다.

 그렇다고 강양구가 사회의 품격에 대한 아무런 비전도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의 글을 꾸준히 찾아 읽는 독자로서 미루어보건대, 아마도 강양구는 생태주의를 (유일하지는 않을지언정) 유력한 대안 중 하나로 여기는 듯하다. 실제로 그는 《녹색평론》 편집자문위원이며, 동 잡지의 발행인인 김종철을 스승으로 모시고 있기도 하다. 


《녹색평론》 발행인 김종철

 

 누구보다 명민하고 까칠한 ‘과학’ 전문 기자인 강양구가 한국에서 가장 강경하고 전면적인 ‘반(反)근대문명론’을 설파하는 《녹색평론》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사실은 자못 흥미롭게 다가오는 동시에, 여러 생각을 안기기도 한다. 다른 사람도 아닌 강양구가 그렇게 이야기하니 근대문명 자체에 정말로 어떤 문제가 있는 건 아닌지, 과연 지금의 삶을 지속할 수 있는지 한 번쯤 회의가 드는 것이다. 

 지금껏 내가 읽은 강양구의 글들은 전부 짤막한 칼럼이거나, 그 모음집이었다. 안 그래도 감질나던 차에, 그가 ‘과학 전문 기자가 본 생태주의’를 주제로 한 권의 완결된 책을 써주었으면 좋겠다. 『사회의 품격』이라는 제목이 붙어도 좋을 그 책에서, 지금껏 세상을 향해 던진 번뜩이는 질문들을 갈무리해 멋진 대답을 마련해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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