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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an 12. 2020

‘K-지역개발’은 조선을 어떻게 바꿨나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

 영어에 대한 동경 때문인지, ‘순우리말’에 대한 집착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대다수의 한국인들은 한자와 그다지 친하지 않다. 알파벳은 술술 읽어도 한자 앞에서는 숨이 턱 막혀버리는 사람은 별나다기보다는 차라리 평범하다. 하지만 자기 이름 하나 한자로 못 쓰는 ‘한자 까막눈’일지라도 자신 있게 끼적일 수 있는 한자가 몇 있으니, ‘밭 전(田)’ 역시 그 중 하나다. 역시 먹는 것만큼 중요한 일은 없다는 걸까.

 그런데 이상한 점이 있다. 바로 한국인의 ‘주식’인 쌀(벼)은 밭에서 자라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물을 대지 않는 작물, 가령 밀이나 보리, 메밀 등을 재배하는 경지가 밭이다. 그럼 쌀은 어디서 나느냐, 바로 논이다. 한자로는 ‘답(畓)’이라 한다. ‘밭(田)’ 위에 ‘물(水)’을 올린 모양새다. 이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다. 하나, 오늘날과 달리 과거, 최소한 한자가 등장했을 무렵의 동아시아에선 논농사보다 밭농사가 일반적이었다. 둘, 논농사의 성패는 전적으로 물에 달렸다. 


‘밭 전(田)’과 '논 답(畓)'


 먼 옛날에도 당연히 지금처럼 쌀로 지은 밥을 먹었으려니 했을 현대 한국인, 특히 도시생활자에게는 퍽 놀라운 사실일 수 있다. 하지만 논농사는 결코 쉽지도, 자연스럽지도 않다. 괜히 프랑스 역사학자 브로델이 동아시아의 논농사를 정원 가꾸기에 비유하며 그 세심함과 정교함에 경탄한 게 아니다. 특히 여타 지역보다 겨울이 춥고 강수량이 고르지 못한 한반도에서 무사히 쌀을 길러내기란, 원예를 넘어 분재(盆栽)에 가까운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역사학자 김성우의 의문은 바로 여기서 시작한다. 겨울이 길기에 파종 시기가 늦을 수밖에 없고, 비가 많이 오지 않아 제때 물을 대기 어려운 한반도에서 어떻게 쌀이 주식이 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논농사가 ‘보편’으로 자리잡아가는 과정에서 한반도의 풍경은 어떻게 바뀌었을까? 그의 책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은 조선전기의 ‘최선진지대’인 경상도를 중심으로 이 의문을 풀어나간다. 단순한 지역사라기보다 경상도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조선시대사에 가까운 책으로, 문장 역시 명료하고 깔끔하다.  

   

김성우의 『조선시대 경상도의 권력중심이동』

 

 앞서 이야기했듯, 한반도에 논농사가 뿌리내린 건 비교적 최근이다. 구체적으로 한반도에서 마른 땅(旱田)에서 띄엄띄엄(休耕) 짓던 농사를 물을 댄 땅(水田)에서 연이어(常耕) 짓게 된 건 13세기 후반이고, 지역적으로는 경상도가 시작이었다. 고려 말이나 되어서야, 그것도 경상도라는 좁은 공간에서만 겨우겨우 우리가 아는 형태의 논농사가 막 걸음마를 뗀 것이다. 

 고려의 뒤를 이은 조선은 이전의 그 어느 왕조보다 농업을 중시했고, 쌀의 놀라운 생산력 또한 잘 알고 있었다. 각종 농서 편찬, 저수지 조성 등 태종~성종 대까지 활발하게 실시된 각종 권농정책은 왕조가 논농사의 확산과 정착에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가를 잘 보여준다. 

 물론 노력을 쏟는다고 곧바로 결과가 나오는 건 아니었다. 가령 세종 대 편찬된 『농사직설』(1429)이 전면에 내세운 조도(早稻)의 수경직파법(水耕直播法)이 이루어졌던 곳은 경상도, 그중에서도 일부 지역뿐이었다. 조선 농업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증거로 추켜세워졌던 『농사직설』은, 사실 “이렇게 되어야한다”는 당위적 성격이 강한 ‘이념형 농서’에 가까웠던 셈이다.     


'이념형 농서'에 가까웠던 『농사직설』

 

 이처럼 논농사를 정착시키려는 왕조의 바람은 쉬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주머니 속 송곳처럼 홀로 치고 올라가는 지역이 있었으니, 바로 경상도다. 역대 국왕들이 유독 경상도를 아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이미 ‘기본기’가 잘 갖춰진데다 경상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들이 첨단 농법을 제 고향에 야무지게 적용한 결과라 하겠다. 실제 『세종실록지리지』(1432)에 기록된 전국의 저수지 43곳 중 무려 46.5%인 20곳의 저수지가 경상도에 설치되었다. 15세기 중반에 이르면 경상도의 저수지는 720곳, 몽리면적은 2만 300여 결로 급증했는데, 수리정책을 처음으로 시도한 태종 대로부터 각각 3500%, 1238% 증가한 수치다.


조선시대 선산부 지도

 

 당대의 최선진지역인 경상도에서도 가장 앞서나갔던 곳은 경상도 서북부, 당시 표현으로는 우상도(右上道)에 위치한 선산(善山, 오늘날의 구미)이었다. 영남대로와 낙동강이 지나는 교통의 요지이자 완만한 평야와 구릉이 펼쳐진 선산은 신생왕조의 권농정책을 실험할 최적의 장소였다. 지리적 이점과 국가의 지원이 맞물리며, 고려 말까지만 해도 한적한 속현(屬縣)이었던 선산은 상주나 성주와 같은 전통의 강호들과 어깨를 겨루는 ‘슈퍼루키’로 거듭났다. 길재, 김종직, 김굉필 같은 조선 성리학의 기라성은 물론이요, 정초, 박서생, 하위지처럼 국가의 권농정책을 입안한 테크노크라트 역시 선산 출신이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난다”는 말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인재의 산실 선산향교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며, 선산의 선진적인 농법은 남쪽으로 방향을 튼다. 경상도 서남부, 그러니까 우하도(右下道)에도 수경직파법이 도입된 것이다. 낙동강 하류의 드넓은 평야가 밭에서 논으로 바뀌어감에 따라 이제는 우하도가 경상도, 나아가 전 조선의 중심으로 떠올랐다. 임진전쟁 때 누구보다 맹렬하게 일본에 맞서 싸움으로써 권력을 틀어쥐었으나, 끝내 인조반정으로 장렬한 최후를 맞이한 북인의 거점이 바로 이곳 우하도였다. 남명 조식으로부터 이어지는 이들의 거침없고 호방한 기질은, 어디까지나 곳간에 그득히 쌓인 쌀포대 덕에 가능한 것이었다.


북인을 대표하는 조식, 곽재우, 정인홍


 15~16세기의 선산과 16~17세기의 진주에 이어, 17세기 이후 경상도의 새로운 중심으로 등극한 곳은 안동이었다. 경상도 동북부인 좌상도(左上道)에 위치한 안동은, 그러나 이전까지의 중심들과는 완전히 달랐다. 선산과 진주는 오늘날 사람들이 으레 떠올리곤 하는 ‘농사짓기 좋은 땅’의 전형으로, 큰 강을 끼고 너른 평야와 구릉이 펼쳐져있다. 반면 안동은 어떻게 이런 곳에서 먹고사나 싶은, 그야말로 첩첩산중이다. 저 옛날 퇴계 선생이 고고히 리(理)와 기(氣)의 오묘한 원리를 궁리하시기에나 알맞을 법한 이 궁벽진 동네가, 어떻게 경상도의 중심을 꿰찰 수 있었을까?

 원인은 15세기 후반 처음 시작되어 점차 퍼져나간 이앙법(移秧法, 모내기)에 있다. 일단 봄철 가뭄을 이겨내고 물만 잘 대면 잡초제거에 들어가는 노동력을 현저히 줄일 수 있다는 건 이앙법의 가장 큰 매력이었다. 문제는 안정적으로 농업용수를 공급할 방법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오늘날의 통념과 달리, 하천 유역은 의외로 물을 대기 까다로웠다. 대규모 수리시설을 축조하고 꾸준히 관리하지 않는다면, 넘실대는 강물은 농사에 도움을 주기는커녕 상습적인 범람으로 애써 기른 작물을 휩쓸어갈 뿐이었다.


모내기의 확산은 경상도의 중심을 바꿔놓았다

 

 모내기에 도전해보고 싶지만 대규모 제방이나 저수지를 세울 여력은 없었던 사람들의 눈에 들어온 게 바로 조선 땅에 널리고 널린 산골짜기였다. 계곡에서 졸졸 흘러나오는 물만 잘 받아도 모내기에 필요한 농업용수를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계곡물을 막는 작은 둑인 천방(川防)을 세우는데 들어가는 노동력은 저수지의 그것에 비해 현저히 적었다. 마침 연산군-중종-명종으로 이어지는 암군의 시대에 접어들며 수리시설을 축조·관리하려는 국가의 의지와 역량이 쇠퇴한데다가, 인구는 인구대로 늘어났기에 사람들은 평야를 떠나 산으로, 산으로 올라가기 시작한다. 산투성이 안동이 경상도의 중심이 될 수 있었던 이유다. 

  

퇴계 이황을 모시는 안동의 도산서원

  

 17세기 중반 이후 안동이 새로운 중심으로 떠오르며, 경상도의 풍경 또한 크게 달라졌다. 교통의 요지였던 선산과 달리 첩첩산중인 안동은 외부와 문물을 주고받기가 훨씬 어려웠다. 자연히 안동은 퇴계의 학설을 종교 수준으로 추종하는 폐쇄적인 사회로 변해갔고, 이웃 지역들을 깔보기 시작했다. 물류의 중심인 한성에 자리한 만큼 나름의 포용력과 유연성을 보여준 근기(近畿)의 노론과 달리, 안동의 남인은 가뜩이나 ‘조선의 섬’이 돼버린 경상도 안에서도 섬처럼 고립되었다.      


경상도의 중심은 선산에서 진주로, 진주에서 안동으로 이동했다


 산으로, 산으로 농경지를 확대하다 끝내는 외부와 단절된 폐쇄적인 공동체로 전락한 안동은, 당시 조선에서 결코 특수한 사례가 아니었다. 오히려 저자는 안동이야말로 중국이나 일본과 구분되는, ‘한국식 지역개발’의 전형이라고 이야기한다. 중국과 일본 역시 평야에서 논농사를 시작해 산으로 올라간 것까지는 비슷하지만, 끝내는 양쯔 델타와 간토로 내려와 ‘뻘밭’을 옥토로 가꾸었다. 반면 요즘말로 ‘K-지역개발’이라 부름직한 조선의 개간은, 망국 직전까지 계속해서 위로만 올라갈 뿐이었다. 황해도와 전라도의 드넓은 평야가 비옥한 곡창지대로 거듭난 건 일제의 자본과 기술이 투입된 식민지시기에 이르러서다. (이와 관련해선 윤춘호의 『봉인된 역사』를 참고하라)


식민지시기  호남평야의 만경강 개수공사


 산 속에 고립된 조선의 촌락이 어떠했을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외부로부터 물자를 공급받기 극도로 어려운 환경인만큼, 자원은 한정된 것이기에 공동체 내의 누군가가 부를 일구면 이는 필시 다른 누군가의 몫을 뺏은 결과라는 생각이 자리 잡는다. 따라서 부자라 해도 주기적으로 큰 잔치를 열거나해서 가난한 이웃에게 베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분위기가 형성된다. 당시 조선의 촌락을 움직인 것은 법이나 이기심이 아니라 체면과 위신, 도덕이었다. 19세기 초 말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들이 한목소리로 이야기하듯, 지구상에서 조선만큼 ‘도덕경제’가 잘 돌아가는 곳도 없었다. 호미 헐버트의 표현을 빌리자면, 조선은 ‘봉건제적 공산주의’ 사회나 다름없었다.

 양반과 상민이 도덕과 관습으로 얽혀 운명공동체를 이룬 19세기 조선의 촌락은 동시대 잉글랜드의 자본가와 노동자가 빚어낸 살풍경보다는 확실히 따뜻해 보인다. 하지만 저자는 강고한 도덕경제야말로 조선이 ‘19세기의 위기’를 맞이한 중요한 원인 중 하나라고 냉정히 지적한다. 아무리 가난하고, 또 부유할지언정 결국 도덕에 의해 ‘평균’으로 수렴하므로 빈자든 부자든 열심히 일할 인센티브가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무기력은 대부분의 촌락이 산간에 자리할 경우 더욱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산림을 공들여 가꾸지 않은 만큼 비가 조금만 내려도 온 마을이 떠내려갈 수 있기 때문이다. 안타깝게도 19세기의 조선이 그러했다.      


19세기의 민둥산

 

 외부와의 교류가 극히 제한된 자족적이고 폐쇄적인 촌락들의 집합체라는 저자의 조선상(朝鮮像)은, 그 참신함만큼이나 아쉬움과 궁금증 역시 자아낸다. 우선 저자가 역사의 주요 행위자로 설정한 국가권력의 압도적인 존재감이 계속해서 눈에 걸린다. 저자에 따르면 이른바 ‘K-지역개발’이 경상도를 넘어 전국으로 확대되고, 끝내는 19세기의 위기를 초래하게 된 건 일차적으로 국가권력의 부재 때문이었다. 16세기에 암군의 시대가 계속되며 국가가 더 이상 대규모 저수지를 축조·관리할 수 없었기에 농민들이 쉽게 물을 댈 수 있는 산골짜기로 향했으며, 19세기의 세도정치 역시 농민들을 한계지대로 내몰았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그 부재로 인해 결국 나라가 멸망에 이르렀을 정도로, 국가권력의 존재감이 컸던 것일까? 그렇게 전능한 국가였다면 지방의 촌락들이 중앙으로부터 사실상의 ‘독립’을 이뤄가는 걸 무려 60년 넘게 지켜보고만 있었을까? 애초에 저자는 조선중기 사족들이 혼인과 세습을 통해 강고한 카르텔을 구축하며 국가로부터 자율성을 확보하는 과정을 연구한 것으로 알고 있다. 19세기의 위기를 규명하는 데에도 단순히 국가권력, 구체적으로는 국왕의 역할 부재만을 내세우기보다는 사족 역시 중요한 변수로 고려해보면 좋을 듯싶다.


16세기 조선의 '유교적 전환'을 다룬 계승범의 『중종의 시대』,  그리고 세도정치의 문을 연 김조순

 

 저자가 제시한 ‘19세기 조선상’은 그간 이 시기를 이해하는 유력한 관점이었던 ‘소용돌이의 사회’와 충돌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소용돌이의 사회’란 20세기 중반 주한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한 문정관 그레고리 헨더슨이 처음 제시한 개념으로, 한국인은 정당이나 결사와 같은 중간단체를 거치지 않고 권력의 중심부를 향해 소용돌이가 휘몰아치듯 곧바로 질주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래저래 문제가 많지만 오늘날에도 조선후기 이래 형성된 한국인의 ‘특질’을 설명하기 위해 심심찮게 동원되곤 하는데, 저자의 주장은 이와는 영 딴판인 것이다.

 

그레고리 헨더슨과 그의 책 『소용돌이의 한국정치』

 

 생각해보라, 산골짜기에 틀어박혀 자급자족하는 촌락의 농민들에게 중심부의 소식이 전해질 턱이 있겠는가? 만약 19세기 조선사회가 정말 저자의 생각과 같았다면 소용돌이는커녕 산들바람조차 살랑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대다수의 사람들은 ‘소용돌이의 사회’가 현대 한국을 이해하는 데 꽤 유용하다고 여기고, 저자의 주장은 그것대로 설득력이 있어 뵌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양자를 잘 버무려 또 하나의 ‘테제’를 만들어야만 할까?

 그보다는 조선후기부터 21세기 대한민국에 이르기까지, 한국은 줄곧 이러했다고 설명하려는 욕구를 버리는 게 나을 듯싶다. 개인적으론 ‘소용돌이의 사회’와 같은 그럴싸한 거대서사를 퍽 좋아한다만, 장기지속하는 ‘한국인’의 ‘특질’을 규명하려는 노력은 자칫 매우 위험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럼에도 긴 시간에 걸쳐 한 사회의 성격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규명하고픈 욕구는 어쩔 수 없다. 따라서 약간 방향을 틀어, 다음 서평에서는 경상도와 더불어 조선에서 기호(畿湖)에 비벼볼 수 있는 둘 뿐인 지역이었으나, 지리적 위치부터 시작해 지형과 기후, 심지어는 사람들의 기질까지 경상도와는 정 반대였던 지역을 살펴보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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