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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an 15. 2020

농업 없는 상업의 가능성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오늘날엔 북조선의 ‘본진’이자 냉면의 고장 정도로밖에 인식되지 못하는 평안도는, 사실 한반도의 근대를 선도한 지역이었다. 안창호, 이승훈, 김동인, 이광수, 조만식 등 개화기와 식민지기의 지식계와 언론계를 이끈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모두 평안도에서 나고 자랐다. 


한반도의 근대를 선도한 평안도 엘리트들

 

 해방 후에도 장준하, 김준엽, 서영훈, 백낙준을 비롯한 평안도 출신 월남민들은 동아시아에서 보기 드문 리버럴 우파로 자리 잡았다. 2017년 출간돼 소소한 반향을 일으킨 김건우의 『대한민국의 설계자들』은, 기실 이들 ‘서북 리버럴’에 바치는 헌사에 다름 아니다. (물론 난 이들이 대한민국을 정말로 설계했다기보다는, 설계했다면 ‘좋았을’ 이들이라 생각한다. 대한민국의 진정한 설계자는 박정희를 위시한 ‘영남 국가사회주의자’가 아니었을까?)


대한민국을 설계했다면 '좋았을' 평안도 월남민들

 

 비단 몇몇 인물만의 활약상만이 돋보인 게 아니다. 20세기 초 평안도는 조선의 어느 지역보다도 교육열이 높았다. 있는 집 자식들은 앞다투어 일본으로 떠났고, 평양의 고등보통학교나 사립 전문학교에 다니는 학생들도 많았다. 여학생의 비율 역시 다른 곳보다 높았다. 경제적으로도 평양은 ‘조선의 오사카’, ‘조선의 기타큐슈’로 불릴 만큼 공업이 흥기했다. 총독부의 정책적 배려도 있었겠지만, 평양의 기업인들이 일본 기업과 당당히 경쟁해서 얻어낸 결과였다. (김두얼, 『한국경제사의 재해석』 참고)     


식민지시기 평양의 전경

 

 20세기 초반 평안도가 이토록 눈부신 활약을 보일 수 있었던 이유는, 일차적으로는 그네들이 조선 왕조 오백년간 ‘아웃사이더’였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오랜 세월 야만의 땅으로 멸시받아온 만큼, 옛 질서를 미련 없이 던져버리고 새 질서에 재빠르게 올라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단지 정치적, 문화적 주변부라는 점만으로는 평안도의 번영을 설명할 수 없다. 조선시대에 똑같이 소외받았던 함경도나 강원도, 제주도는 근대가 도래한 뒤에도 여전히 변방이었다. 서울을 위시한 근기(近畿)의 턱밑까지 치고 올라갈 수 있었던 지역은, 오로지 평안도뿐이었다. 

 왜 이런 차이가 벌어졌을까? 이유는 간단하다. 근대 이전부터 평안도에는 그럴 만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 시대의 변방이 언제나 다음 시대의 중심으로 등극하는 건 아니다. 새 시대의 중심을 꿰차는 건 어디까지나 옛 시대의 슈퍼루키다. 메이지유신을 이끈 사쓰마와 조슈 역시 열도 서남부의 변방이었지만 그 위세는 가히 웅번(雄藩)이라 불릴 정도로 어마어마했고, 막부 역시 이들을 무시하지 못했다. 


비록 열도 서남부의 변방이었지만, 사쓰마와 조슈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평안도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차별받았던들 이들에겐 돈이 있었고 사람이 있었다. 18세기 평안도의 인구는 전통의 강호 경상도에 이은 2위였다. (물론 평안도의 면적이 인구밀집지대인 전라도와 충청도를 합친 것보다도 넓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평양은 한성, 개성과 더불어 물류와 엔터테인먼트의 중심으로 이름을 날렸다. 요컨대, 평안도는 정치적, 문화적으로 소외되었을 뿐 근대 이전에도 충분히 잘 나갔던 것이다. 

    

평양 부벽루 연회도


 이러한 평안도의 번영은, 그러나 한 가지 사실 앞에서 의심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만다. 바로 평안도가 논농사에 극히 불리한 환경만을 그러모은 지역이라는 사실이다. 저번 서평에서 다루었듯, 논농사는 가히 원예에 비견될 만큼 정교하고 섬세한 기술이 요구된다. 기술만 있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지리적, 기후적 조건 역시 중요하다. 구체적으로 동아시아의 논농사는 온난하고 비가 많이 오는 산간지대에서 시작되었다. 중국의 강남, 일본의 간사이, 한국의 영남 모두 위의 세 조건을 만족하기에 논농사 최선진지대가 될 수 있었다.


논농사 최선진지대였던 안동 하회마을의 전경

 

 반면 평안도는 일부러 이렇게 만들기도 어렵겠다 싶을 정도로 논농사에 불리한 환경만 갖추고 있다. 우선 평안도는 춥다. 평안도 최남단의 평양만 해도 최한월 평균기온이 영하 6도까지 내려간다. 매스컴이 한겨울의 평양을 취재할 때면 으레 등장하는, 너도나도 푹 눌러쓴 러시아 털모자는 결코 ‘패션’이 아니다.


평양 시민들의 털모자는 결코 '패션'이 아니다

 다음으로 평안도 남부(평안남도)는 너른 평야와 구릉이 펼쳐져있다. 이중환이 『택리지』에서 기상이 웅대하다며 추켜세운 이 평야지대는, 그러나 논농사에는 극히 불리하다. 간단한 천방(川防)만 만들면 되는 산간지대에 비해 농업용수를 공급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대규모 수리시설을 축조·관리하지 않는 이상, 넘실대는 대동강은 ‘그림의 떡’일 뿐이다. 범람해서 농작물을 쓸어가지나 않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끝없는 평야가 펼쳐진 평양의 전경

 

 마지막으로 평안도 남부는 가뜩이나 비 안 오는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소우지다. 사실 이는 평야지대라는 지형적 조건의 결과이기도 하다. 산이 없으니 구름이 턱 부딪혀 비를 뿌리지 않고 그대로 통과해버리기 때문이다. 오죽 물이 귀했으면 봄철 토양의 수분 증발을 막기 위해 발로 꼭꼭 눌러주는 진압농법(鎭壓農法)이 등장했을까.     


평안도 남부는 한반도에서도 손꼽히는 소우지다

 

 이처럼 평안도, 그중에서도 평양이 위치한 남부는 한랭/평야/소우라는, 논농사에 전혀 적합하지 않은 환경에 놓여 있었다. 그럼에도 많은 문헌기록이 보여주듯 조선후기 평안도는 분명 ‘발전’했다. 여타 작물에 비해 압도적인 생산량을 자랑하는 벼가 쉬이 자랄 수 없는 환경임에도 인구가 증가하고 번영을 구가한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수창의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를 읽은 건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다 조선후기 평안도의 번영은 근대 이후 이 지역 엘리트들의 약진이 빚어낸 일종의 착시가 아닐까하는 결론에 이르렀을 때였다. 저자의 박사논문을 보완한 이 책은 평안도라는 창을 통해 당대의 조선사회를 근사하게 조망한다. 서울중심주의와 지역차별, 관(官)에 매우 의존적이었던 상업의 발전, 백성의 반발을 억누르기 위한 ‘당근’으로서 무과의 빈번한 시행 등, 나온 지 18년이 되어가지만 이 책에서 다루는 주제들은 지금도 조선시대사 연구의 핫한 주제들이다.    

  

오수창의 『조선후기 평안도 사회발전 연구』


 그러나 정작 내 눈길이 머문 곳은 따로 있었다. 바로 정조가 함경도(關北) 백성들에게 윤음을 내리며 너희는 “삼남(三南)과 같은 아름다운 벼와 솜이 나지 않고 또한 양서(兩西, 평안도와 황해도)와 같은 풍요(豊饒)한 재화(財貨)가 있지도 않다”고 어르는 대목이었다. (『정조실록』, 정조 7년 10월 정해) 삼남의 벼와 평안도의 재화를 명백히 구분하고 있다. 

 정조가 함경도 백성을 달래기 위해 생각 없이 던진 말이 아니다. 영조~순조 대 남부지방의 곡식과 평안도의 재화를 대비시키는 언사는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 『일성록』 등에서 꾸준히 등장한다. 가령 영조 대 평안감사를 역임하고 영의정에 오른 김상철은 양남(경상도와 전라도)은 전적으로 곡식에, 서로(西路, 평안도)는 전적으로 목면과 돈에 의지한다고 이야기했다. 정조 대 부수찬이었던 한광근 또한 과거 삼남에는 곡식을 저축한 사람이, 양서에는 돈을 저축한 사람이 많았으나 지금은 아무도 없다며 사치로 인한 국가의 빈곤을 책망했다. 

 ‘삼남’과 ‘양서’의 이러한 대비는, 적어도 두 가지 추론을 가능케 한다. 첫째, 조선후기 평안도는 무엇보다도 ‘부유한 지역’으로 인식되었다. 둘째, 평안도의 부는 남부지방과 달리 논농사를 통해 일군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면 평안도의 번영을 이끌었던 것은 무엇인가? 이 시점에서 우리는 20세기 초 유럽 역사학계를 풍미한 앙리 피렌의 주장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삼남'과 '양서'의 대비는 무엇을 의미할까?


 앙리 피렌, 벨기에 출신의 역사가로 유럽중세사 연구에서 괄목할 업적을 남긴 학계의 거인이다. 그가 제시한 이른바 ‘피렌 테제’는 중세 유럽을 연구한다면 좋든 싫든 한 번은 거쳐야 할 관문으로, 사실상 폐기된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 재밌는 통찰을 안겨준다. 


앙리 피렌과 그의 대표작 『마호메트와 샤를마뉴』

 

 ‘피렌 테제’의 핵심은, 유럽을 농업에나 종사하는 ‘프롤레타리아 대륙’으로 전락시킨 건 게르만이 아닌 이슬람이라는 주장이다. 게르만 용병들이 로마를 접수한 뒤에도, 지중해를 중심으로 이어진 광대한 무역 네트워크와 도시문명은 여전히 번성했다. 그러나 예언자 마호메트의 등장 이후 이슬람이 급속도로 세를 불려나가 8세기에 전 지중해를 장악했고, 바다를 잃어버린 유럽은 급속도로 가난해졌다. 물론 도시문명에서 농업문명으로 ‘퇴보’한 이 시기의 유럽에도 도시 비스무리한 인구밀집지대인 키비타스(civitas)와 부르구스(burgus)가 존재하긴 했다. 하지만 이는 도시라기보다는 각각 종교중심지와 정치·군사중심지에 가까웠다.


지중해가 이슬람의 호수가 됨으로써 유럽은 '프롤레타리아 대륙'으로 전락했다

 

 가난한 암흑의 대륙 유럽에 한 줄기 서광이 비친 건 10세기에 이르러서다. 대륙 동남부의 베네치아, 그리고 서북부의 플랑드르에서 상업이 흥기하고 도시가 발전하기 시작한 것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 도시를 견인한 게 농업생산력의 발전이 아니라 외부로부터의 자극이라는 사실이다. 베네치아는 당대 세계 최고의 대도시인 콘스탄티노플과, 플랑드르는 온 유럽의 바다를 휘젓고 다니던 노르만과 거래를 틈으로써 부를 거머쥐었다. 실제로 이들 지역은 유럽에서 손꼽히는 ‘뻘밭’으로, 결코 농사를 짓기에 적합한 땅이 아니었다. 피렌의 말마따나, “상업부활은 외부자극의 결과였다.” (앙리 피렌, 『중세유럽의 도시』, p.75.)     


유럽의 상업부활을 견인한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플랑드르의 캉브레

 

 조선후기 평안도의 번영 역시 외부와의 교역을 통해 이루어진 것이었다. 사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평안도는 상업조차 별 볼 일 없는, 그야말로 모든 면에서 낙후한 동네였다. 대표적으로 이 시기 상업발달의 지표라 할 수 있는 장시의 수와 규모에서 평안도는 삼남에 크게 뒤졌다. 변경의 군사지대라는 성격 역시 사람과 물자의 자유로운 이동을 어렵게 만들었다. 17세기 초 조선과 청이 벌인 두 차례의 전쟁은 평안도를 아예 초토화시켜놓기까지 했다. 


조선중기까지만 해도 평안도는 장시의 수와 규모에서 삼남에 크게 뒤졌다

 

 그러나 1683년 청의 대만 정복을 끝으로 동아시아에서 100년 가까이 이어진 ‘전쟁의 시대’가 일단락되며, 평안도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긴 평화의 시대가 도래하며 나라와 나라 사이에 총알과 대포가 아니라 사람과 물자가 오고가게 된 것이다. 조선은 세계 2위의 은 생산국인 일본과 세계 최대의 은 수입국인 청을 잇는 물류의 허브로 부상했다. 조선에서 중계무역을 통한 이익을 가장 많이 누리는 지역은, 단연 평안도였다. 


북경에 도착한 조선의 연행사


 마치 콘스탄티노플과의 교역을 통해 급성장한 ‘뻘밭’ 베네치아처럼, 평안도 역시 당대 최대의 도시인 북경을 등에 업고 조선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으로 거듭났다. 요컨대, 평안도에서 상업의 발전은 농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약간의 비약을 감수해보자면, 오히려 상업이 농업을 견인했다고 볼 여지도 있다. 오랜 번영이 끝나갈 무렵인 18세기 말에 이르면 평안도의 토지가 비옥하고 농민이 근면하다는, 이전까진 결코 찾아볼 수 없었던 수사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이 무렵엔 평양의 선상(船商)들이 바다가 험하기로 악명 높은 황해도의 장산곶을 가뿐히 넘어 일상적으로 삼남을 왕래하는 등, 국내교역 역시 활성화되었다. (『승정원일기』, 영조 47년 5월 14일 갑인)


평양 대동강의 뱃놀이

 

 물론 평안도의 사례가 피렌의 가설에 완전히 들어맞는 건 아니다. 가령 평안도의 상업발전에서 유달리 부각되는 ‘관(官)’의 존재는, 상업 고유의 자율성을 중시하는 피렌이 보기엔 영 마뜩찮을 것이다. 그럼에도 농업 없는 상업이 가능하며 그렇게 성장한 지역의 분위기는 확실히 다르다는 피렌의 주장은, 조선후기 평안도의 성격을 이해할 수 있는 유용한 통찰을 제공한다.      


평양의 전경

 

 오늘날 특정 지역을 희화화하거나 비하하는 ‘지역드립’은, 이른바 ‘문명인’이라면 입에 담지 말아야 할 금기 중 하나로 꼽힌다. 하지만 ‘지역드립’에 대한 강력한 제재는, 역으로 그것이 얼마나 일상화되어있고 또 나름의 설득력을 갖는지를 보여주기도 한다. 실제로 사람들은 여전히 술자리나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그곳 사람들은 어떠어떠하다고 이야기하기를 즐긴다. 이유는 단순하다. 그것이 재미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비록 정교한 통계나 방대한 문헌자료로 증명할 수는 없을지언정, 특정 지역의 성격 비스무리한 것을 ‘감’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지역드립’을 완전히 틀어막기보다는, 한 번 제대로 밀고 나가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콜린 우다드는 『분열하는 제국』(원제는 『American Nations』)에서 미국이 서로 다른 11개의 ‘민족(nation)’으로 이루어져있다고 주장하며 그 기원과 성격을 규명한 바 있다. 엄밀히 따지고 들어가면 문제될 거리가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나름의 설명력과 재미를 갖고 있는 주장이기도 하다.


콜린 우다드와 그의 책 『분열하는 제국』

 

 마찬가지로, 한반도의 역사도 몇 개의 작은 민족들이 벌이는 각축전으로 이해해볼 여지는 없을까? 앞서 살펴보았듯 경상도와 평안도는 지형과 기후가 달랐고, 이로 인해 주요 산업 역시 달라졌으며, 끝내는 사람들의 기질마저 달라졌다. 20세기 한반도를 풍미한 ‘서북 리버럴’과 ‘영남 국가사회주의자’의 뿌리는, 어쩌면 조선후기까지 거슬러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다른 지역은 어떨까? 가령 함경도나 전라도, 혹은 남한강 유역의 사람들 말이다. 이들 지역의 역사를 엮어 『Korean Nations』라는 ‘풍요로운 오류’를 빚어보고 싶다는 생각은, 일단 재밌는 망상으로 ‘킵’ 해둔다. 


이 지도의 '한국판'을 그려볼 수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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