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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an 19. 2020

권력과 웃음이 교차하는 동화(同化)의 동역학

『서울, 권력도시』

 시마무라 아야코(島村文子), 남만주철도주식회사 조선철도국에 발령받은 오빠를 따라 식민지의 수부 게이죠(京城)에 자리 잡는다. 여성에게 현모양처나 교사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꿈이 허용되지 않았던 시대, 워낙에 총명했던지라 자신의 운명 정도는 진작 간파했던 그는 용산역 철도관사 근처 만철경성도서관에서 하릴없이 시간을 죽인다. 

 그런데 갑자기, 칠흑같이 어두운 높은 벽이 그의 눈앞에 불쑥불쑥 나타난다. 오직 자신에게만 모습을 드러내는 성벽에 불길한 예감이 든 아야코는 서둘러 조선을 뜬다. 이윽고, 두 차례의 태풍이 철도의 중심이자 일본인의 새 수도 용산을 집어삼킨다. 1925년 7월의 일이었다. 쑥대밭이 된 용산과 달리, 한때 아야코가 모든 물자를 수운으로 공급받는 주제에 왜 그리도 강에서 멀리 떨어져있느냐며 의아해했던 조선의 옛 수도는 너무나도 멀쩡했다.     

일본인의 도시 용산을 집어삼킨 1925년의 대홍수

 

 다들 눈치 챘겠지만, 아야코는 실존인물이 아니다. 배명훈의 소설 『고고심령학자』(2017)에 등장하는 허구의 인물로, 사건해결에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한다. 서울이란 ‘도시’에 빙의하려는 코끼리 혼령을 막아보고자 고군분투하는 고고심령학자들의 이야기를 담은 이 소설은, 책의 제목이자 중심 소재인 고고심령학부터가 허구란 점에서 자칫 ‘판타지’로 비칠지 모른다. 하지만 한국에서 가장 지적인 작가답게 배명훈은 역사적 사실을 적절히 곁들임으로써 소설의 현실감과 몰입도를 높였는데, 이른바 ‘이중도시’ 역시 그러한 장치 중 하나다. 

  이중도시란 간단히 말해 두 개의 심장을 가진 도시로, 원래의 중심 옆에 이민족의 정복이나 교통의 발전 등으로 또 하나의 중심이 생겨남으로써 만들어진다. 인도의 델리-뉴델리, 오키나와의 슈리-나하, 몽골의 카라코룸과 더불어 서울 역시 이러한 이중도시에 해당한다. 조선왕조 오백년의 중심이었던 한양(사대문 안) 남쪽에, 용산이라는 군사와 철도의 중심이 일제에 의해 하나 더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코끼리 혼령이 서울, 구체적으로는 용산에 빙의하려 드는 이유도 도시의 중심이 두 개인 꼴을 보지 못해서다.      


'이중도시'를 중요한 소재로 삼는 배명훈의 『고고심령학자』

 

 만약 역사학자 토드 A. 헨리가 『고고심령학자』를 읽었다면, ‘이중도시론’이 문학적 알레고리로는 의미가 있을지언정 학문적으로는 진지한 재검토가 필요한 개념이라고 단언할 것이다. 그가 바라본 식민지 경성은 지리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중심이 뚜렷하게 갈리는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책 『서울, 권력도시』는 경성의 공공 공간을 중심으로, 총독부의 동화(同化, assimilation) 정책에 저마다의 방식으로 ‘반응’한 다양한 인종과 계급의 사람들을 그려낸다. 역자들이 공들인 흔적이 역력함에도 결코 읽기 쉽지 않은 책이지만, 소위 ‘식민지 근대’뿐 아니라 권력과 개인의 관계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통찰을 제공하는 만큼 도전할 가치가 있다.   

  

토드 A. 헨리의 『서울, 권력도시』

 

 저자는 식민지 조선에서 이루어진 총독부(식민국가 혹은 식민정부)의 동화정책을 크게 두 가지 측면에서 재구성한다. 첫째, 동화란 단순히 일본의 정신과 문화를 받아들이는데 그치지 않았다. 일본이 조선보다 훨씬 ‘진보’했다는 게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여진 만큼, ‘일본인 되기’는 곧 근면하고 청결한 ‘근대인 되기’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저자는 동화를 정신적(spiritual), 물질적(material), 공중적(civic, 公衆的) 동화로 구분하여 그 외연을 넓힌다.

 둘째, 동화는 총독부가 일방적으로 ‘내리꽂듯이’ 이뤄지지 않았다. 근래 한국 연구자들 사이에서도 조금씩 나오는 이야기지만, 총독부는 결코 ‘전능’하지 않았다. 늘 돈에 쪼들리며 다양한 이해관계자의 요구를 고려해야만 하는, 강력하지만 한계가 뚜렷한 정부야말로 총독부의 실상에 가까웠다. 지배의 대상인 조선인과 일본인 역시 단일한 정체성을 지닌 인구집단이 아니었다. 경성에 언제 터를 잡았는지, 사는 곳은 어디였는지, 얼마나 부유했는지 등은 사람들의 사고와 행동에 ‘인종’만큼이나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식민지 경성은 지리적으로도, 인종적으로도 중심이 뚜렷하게 갈리는 공간이 아니었다

 

 이처럼 총독부도 동화를 적극적으로 강요할 수 없었고, 다종다양한 정체성을 지닌 경성부민들도 이를 순순히 받아들일 생각이 없었던 만큼, 엘리트들의 논쟁이나 국가정책을 통해 동화의 실상을 파악하기엔 한계가 뚜렷하다는 게 저자의 생각이다. 그가 주목하는 건 경성의 ‘공공 공간’이다. 총독부와 경성부민들이 일상적으로 얼굴을 맞대는 이곳 ‘접촉 지대’야말로 동화의 너른 스펙트럼을 남김없이 펼쳐 보일 수 있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는 남산의 경성신사와 조선신궁, 조선왕조의 정궁인 경복궁에서 개최된 두 차례의 공진회와 박람회, 도시 곳곳에서 이루어진 위생검사와 캠페인을 각각 정신적 동화, 물질적 동화, 공중적 동화를 분석하는 공공 공간으로 설정한다. ‘시간’의 구분 역시 ‘공간’만큼이나 신박한데, ‘무단통치-문화통치-민족말살통치’라는 기존의 도식을 묘하게 비틀어버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압도적인 무력으로 불만세력을 ‘평정’한 1기(1910~1915), 통치방식의 전환이 모색되었으나 여전히 갈팡질팡하던 전환기(1915~1925), 명실상부 문화통치의 시대로 접어든 2기(1925~1937), 총력전과 함께 내밀한 사상통제가 시작된 3기(1937~1945)라는 새로운 시대구분을 제시한다.      


저자는 남산의 경성신사, 경복궁의 공진회와 박람회, 위생캠페인을 통해 동화의 세 측면을 분석한다

 

 다양한 사람들이 저마다의 인종/계급/젠더/거주지에 따라 총독부(사실은 총독부조차 단일한 실체가 아니었다!)가 제시한 동화라는 약속을 전유해간 양상은 굉장히 혼란스럽지만, 그만큼 흥미진진하다. 가령 1898년 세워진 남산의 경성신사는 총독부가 명실상부 조선의 최고 권력기관으로 등극한 뒤에도 경성의 일본 거류민을 위한 신사라는 본연의 정체성을 고집스레 이어갔다. 총독부는 1914년 일본 거류민단을 해체하고 1916년에는 마침내 단일한 도시 행정체계를 확립했지만, 경성신사만은 완전히 통제하지 못했다. 그저 각 지구의 제사를 주관하는 씨자총대((氏子總代)의 일부를 조선인이 맡게끔 강제할 수 있었을 뿐이다.


남산의 경성신사

 

 그러나 1925년 전 조선의 제의(祭儀)를 주관하는 매머드급 규모의 조선신궁이 완공되며 상황이 달라지기 시작한다. 똑같이 남산에 자리한 저 거대한 라이벌과 맞서기 위해서라도, 무엇보다 1919년 터져 나온 엄청난 저항의 에너지를 무마하기 위해서라도 조선인들을 경성신사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마침 조선신궁이 오로지 일본의 신과 천황만을 모시겠다며 자민족중심주의를 대놓고 선언하자, 잇속 바른 신사의 지도자들은 재빨리 단군을 비롯한 조선의 토착신을 경성신사에 합사(合祀)해버렸다. 1929년에는 아예 단군을 위한 별도의 신전(神殿)까지 만드는 등, 경성신사는 차츰 일본 거류민만의 신사에서 경성부민의 신사로 바뀌어갔다.


매머드급 규모의 조선신궁은 경성신사의 역할 변화를 초래했다

 

 급기야, 1931년에는 조선인 씨자총대들이 대제행렬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주체만 바뀐 게 아니었다. 모자와 바지는 신토 스타일로, 그 외에는 흰색 깃과 검정색 두루마기로 맞춘 ‘퓨전’ 의복이 처음 등장했다. 신여(神輿)를 진 일본인들이 외치는 “왓쇼이(わっしょい)”에 조선인 구경꾼들은 “얼싸둥둥”으로 화답했다. 식민통치도 어느덧 20년, 구호에 불과한 줄로만 알았던 ‘내선일체(內鮮一體)’가 드디어 이루어지기 시작한 걸까.

 안타깝게도(?) 이는 몽상에 불과했다. 대제행렬의 총책임자인 전성욱은 스스로를 문외한이라 낮추며 자기 대신 더 부유하고 저명한 일본인이 이 일을 맡아야한다고 제안했다. 오랫동안 씨자조직에서 활동해온 지역 명망가인 그조차도 외부의 권위를 빌려오지 않고서는 자신의 ‘일본인됨’을 확신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식'으로 이루어진 경성신사의 대제행렬

 

 최고의 엘리트조차 이러했을진대, 보다 아래에 위치한 조선인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대다수의 조선인들은 그저 신사 주위를 어슬렁거리거나, 기생과 게이샤에 열광하거나, 그것도 아니면 참배객들의 지갑을 슬쩍했다. 이들에게 경성신사는 경건한 참배의 공간이라기보다는 흥미로운 볼거리를 제공하는 유원지에 가까웠다. 앞서 언급한 조선인 구경꾼들의 “얼싸둥둥” 역시, 신사의 제전행렬을 나름의 방식으로 전유한 것일 수 있다고 저자는 추측한다.     


경성신사의 조선인들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

 

 물질적 동화 역시 마찬가지 결과를 낳았다. 1929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박람회는 ‘내지’ 관광객에겐 조선의 이국적인 흥취를 맛볼 수 있는 관광코스였으나, 조선인 민족주의자에겐 식민지 수탈의 적나라한 전시장이었다. 조선인이 3분의 2 가량을 차지한 여성 안내원에겐 ‘키스 비즈니스’를 통해 돈은 물론이고 ‘모던 보이’와의 연애까지 노려볼 수 있는 기회였으며, 시골의 농민들에겐 강요에 떠밀려 큰돈을 내고 참석당한 ‘관제행사’였다. 

 공중적 동화의 일환인 위생 캠페인이라고 다를 건 없었다. 총독부와 조선인 엘리트들은 경성이 ‘똥의 수도’ 혹은 ‘제국의 병든 도시’로 불릴 만큼 위생수준이 열악하다는 데에는 의견을 같이했다. 하지만 전자는 이를 조선민족의 열등성을 보여주는 근거로 삼은 반면, 후자는 공공자원을 충분히 확충하지 않는 총독부에 대한 비판의 무기로 삼았다. 말하자면 이들은 같은 침대(同床) 위에서 다른 꿈(異夢)을 꾼 셈이다. 물론 열악한 위생시설의 최대 피해자인 대다수 조선인 하층민들은 침대에 걸터앉을 수조차 없었다.   

  

1929년의 조선박람회

 

 이처럼 식민지의 수부 경성의 공공 공간에서 펼쳐진 동화의 동역학(動力學)은 정말이지 종잡을 수 없고, 사람에 따라 다양한 반응을 불러일으켰기에 하나의 정연한 흐름으로 정리하기 어렵다. (그것이 아마 이 책을 읽기 어렵게 만드는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그럼에도 이 복잡한 메커니즘 속에서 유달리 두드러지는 움직임을 찾을 수 있다면, 그건 아마 웃음 혹은 오락이 갖는 고유한 힘일 것이다.

 오락은 흔히 선전에 곁들여지는 양념 정도로 폄하되곤 한다. 권력에 대한 불만을 웃음으로 무마할 뿐 아니라, 그 속에 특정한 메시지를 녹여냄으로써 결과적으로 ‘민중’을 권력이 원하는 대로 길들인다는 것이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의 3S 정책부터 혐오를 농담화하는 일베의 전략에 이르기까지, 오락을 통한 선전의 효력은 지금껏 한국사회에서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다.     


오락을 통한 선전의 효력은 지금껏 한국사회에서 여러 차례 입증된 바 있다

 

 하지만 『서울, 권력도시』에서 보여주는 건 이와는 정반대의 양상, 그러니까 선전이 오히려 그 오락적 요소에 의해 무력화되는 모습이다. 경성신사는 게이샤와 기생을 불러 모으고, 아마추어 스모 대회를 개최하는 등 오락을 통한 은밀한 정신적 동화를 도모했다. 하지만 조선인들은 ‘일본 정신’을 받아들이기는커녕 경성신사를 유원지로 단정지어버림으로써 역으로 신사의 경건하고 엄숙한 분위기를 크게 해쳤다.

 1915년 경복궁에서 개최된 조선물산공진회에서도 선전은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이번에도 사람들은 기생에 열광했고, 최첨단 물 펌프를 폭포물 놀이시설로 착각했으며, 잔망스런 원숭이에 매료되었다. 망해버린 왕조의 유적과 국적불명의 ‘모-던’한 전시관을 대비시킴으로써 조선인들을 물질적으로 동화시킬 수 있으리라 믿었던 총독부의 바람은, 경성 사쿠라이 소학교 학생들이 남긴 피상적인 감상 앞에서 보기 좋게 무너져 내렸다. 일본인 소학생들에게도 공진회는 그저 이상하고, 놀랍고, 아름다운 체험이었을 뿐이다. 심지어는 가장 계몽적이고 엄숙해야 마땅할 공중적 동화조차 기생과 활동사진, 바이올린 연주에 의존함으로써 흥미 위주의 오락거리로 전락했다. 


동화의 성격을 불문하고 기생은 언제나 공공 공간에 함께했다


 결코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지만, 공략하기보다는 낙후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총독부의 동화정책에 성공적으로 저항한 경성의 조선인들은 ‘식민지 근대’를 이해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점에서도 흥미롭다. 수탈론과 근대화론, 근대성론을 막론하고 지금까지 한반도의 ‘근대’를 설명하는 유력한 이론들은 하나같이 그 압도적인 무게에 짓눌려있었다. 다만 ‘근대’가 조선을 철저히 털어먹었는지, 발전시켰는지, 아니면 규율권력을 창출했는지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다.


'식민지 근대'를 이해하는 유력한 이론을 제시한 신용하(수탈론), 이영훈(근대화론), 윤해동(근대성론)

 

 반면 저자는 정교한 선전을 오락으로 만들어버린 조선인들을 통해 ‘근대’란 기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다는 대담한 생각을 내비친다. 조선인들은 그 안에 담긴 총독부의 의도가 어떠했든 간에 오락을 오락으로 즐겼으며, 총력전이라는 엄중한 상황 속에서도 신사 앞에서 조선식 큰절을 했다. 그들은 ‘근대의 폭력’에 저항해야겠다는 거창한 사명감으로 움직인 게 아니다. 그저 ‘근대’를 의식조차 하지 않고 평소처럼 생활했을 뿐이다. 어쩌면 카터 에커트(Carter Eckert)가 말한 제국의 후예(Offspring of Empire)란, 강력한 발전국가나 이에 기생하는 재벌 따위가 아니라 이처럼 권력의 선전에 웃음으로 저항하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제국의 후예'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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