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성옛터〉에서 〈어머나〉까지, 간추린 트로트의 역사

[1] 식민지시대: 도시 중산층의 세련된 유행가

by 유찬근

희망과 불안이 공존하는 ‘세기말적’ 분위기를 풍기던 1999년, 한 권의 책이 한국 출판계를 강타했다.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라』는 자극적인 제목을 단 이 책은, 소위 ‘근대성(현대성)’의 기원을 일제의 식민통치기에서 찾음으로써 한국근대사 연구에 일대 파장을 일으켰다. 바야흐로 ‘문화사’라 불리는 새로운 흐름의 시작이었다. 이후 고미숙의 『한국의 근대성, 그 기원을 찾아서』나 권보드래의 『연애의 시대』 등, 연구공동체 수유너머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이루어진 문화사 연구는, 비록 한국근대사를 일본제국의 지역사로 전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을지언정 한국의 근대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문화사 책들.PNG 문화사 연구는 한국의 근대성을 이해하는 새로운 시각을 제시했다


이 글에서 다루고자 하는 트로트 역시, 그 시작은 1920~30년대 형성된 도시 중산층 문화였다. 1910년 한반도를 접수한 일제는 보다 효율적인 수탈을 위해서라도 조선을 ‘근대화’할 수밖에 없었고, 이에 따라 철도 부설이나 도시 인프라 정비 등 일련의 근대적 정책이 추진되었다. 그 결과, 사이토 마코토(齊藤実) 총독이 문화통치를 펼친 1920년대에 이르면 적어도 식민지의 수부 경성의 분위기는 이전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있었다. ‘도시 중산층’이라는, 이전까진 결코 찾아볼 수 없는 계층이 전면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모던한 풍경들.PNG 식민지시대 도시 중산층의 등장


고상한 한시(漢詩)보다는 조선어와 일어로 쓰인 소설과 잡지를 읽고, 익명성(匿名性)이 주는 자유와 고독을 한껏 만끽하던 이들 도시 중산층은, 청각의 측면에서도 이전과는 구분되는 새로운 감수성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도시 중산층의 ‘니즈’를 만족시켜준 건 레코드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였다.


식민지시대 주요 레코드회사.jpg 식민지시대 주요 레코드회사


1920년대 미국의 레코드회사인 콜럼비아(Columbia)와 빅터(Victor)가 일본지사를 통해 간접투자하는 형식으로 시작된 조선의 음반산업은, 초기에는 도시 중산층 사이에서도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하였다. 조선은 물론이요 동아시아 자체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던 미국 본사의 방침에 따라 유성기 판매에 치중했을 뿐, 음반시장에 대한 열의를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콜럼비아 빅터.jpg 1920년대 조선의 음반시장을 양분한 콜럼비아와 빅터


그러나 1920년대 후반에 접어들며 상황은 조금씩 변하기 시작한다. 우선 일본 콜럼비아가 녹음할 가수를 모집하는 차원에서 ‘명창대회’를 개최하는 등 독자적인 음반기획 및 제작을 시도했다. 이어 후발주자인 오케레코드가 음반 가격을 1원으로 내리는 파격을 선보임에 따라 조선의 음반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단순히 서구나 일본의 음반을 수입하는 걸 넘어 조선인이 조선어로 부른 독자적인 음반을 기획·제작하게 된 것이다.


오케레코드 최종.PNG 오케레코드의 파격으로 조선의 음반산업은 새로운 전기를 맞이한다


라디오 역시 변화를 추동하는 중요한 매체였다. 1926년 11월 경성방송국이 개국하고 1927년 2월 16일 첫 방송을 내보냄으로써 시작된 조선의 라디오방송은, 음반산업과 마찬가지로 초창기엔 고전을 면치 못했다. 조선어 방송이 일본어 방송의 1/3에 불과했고, 수신지역이 제한적이었기에 ‘대중’매체로서의 위력을 충분히 발휘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경성방송국은 조선어 방송의 비중을 점차 늘려나가다 1933년 조선어 전용 채널(제2방송)을 신설했고, 수신기술을 발전시켜 1937년에는 전국적 청취가 가능해졌다. 청취료 역시 1938년 4월부터 월 1원에서 75전으로 인하됨에 따라 라디오는 보다 많은 사람들의 일상에 중요한 존재로 자리 잡는다.


경성방송국 최종.PNG 경성방송국과 라디오


레코드와 라디오라는 새로운 매체가 이뤄낸 이러한 변화는, 그러나 굉장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가장 큰 장벽은 무엇보다 가격이었다. 오케레코드의 음반 가격이자 경성방송국의 한 달 수신료인 1원은, 당시 고급호텔 런치 한 끼에 해당하는 가격이었다. 은행원, 의사, 귀금속 시계상, 신문기자, 교수 등 중상류층의 1932년 평균생활비가 90원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1원이란 가격은 대중음악의 주된 소비자인 도시 중산층에게도 결코 만만치 않은 액수였다.


따라서 음반과 라디오를 통한 대중음악 감상은, 아주 많지도 적지도 않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서만 이뤄질 수 있었다. 다시 말해 자신만의 공간에서 음악에 심취하거나, 거대한 공연장에서 다함께 ‘떼창’하는 일은 애시당초 불가능했다는 이야기다. 식민지시대 도시 중산층이 향유했다던 ‘유행가’의 본질은, 어디까지나 번듯한 가정집에 적당한 수의 사람들이 모여 조용히 감상하는 음악이었던 것이다.


식민지 중산층2.png 식민지시대 '유행가'는 어디까지나 소수의 음악이었다


이처럼 식민지시대의 유행가는 이름과는 달리 소수만이 누릴 수 있었던 고급문화였던 만큼, ‘흥’과 ‘뽕짝’으로 대표되는 오늘날의 트로트와 많은 차이를 보인다. 구체적으로 서양음계를 일본식으로 해석한 요나누키(ヨナ拔キ, 미-파-라-시-도)와 2박 계열의 리듬, 7-5조를 특징으로 삼는 당시의 유행가는 개인의 슬픔, 절망, 그리고 향수를 노래하는 애잔한 독백조의 음악이었다. 이는 당시 일본의 ‘류코카(流行歌)’를 그대로 조선에 들여온 것으로, 이후 트로트를 끈질기게 따라다닐 ‘왜색(倭色)’이란 꼬리표를 예고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무리 요나누키와 7-5조를 뼈대로 삼았을지언정, 유행가는 단순히 ‘일본’으로 환원할 수 없는 다채로운 흐름을 피와 살로 삼았다. 이러한 다양성 혹은 혼종성은, 다소 아이러니하지만 당시 조선 음악시장의 미성숙에 기인한 것이었다. 시장의 규모도 작았고 장르가 세분화되어있지도 않았던 만큼, 조선의 음악인들은 한 분야만 전문적으로 파서는 먹고살 수 없었다. 시쳇말로 ‘n잡’을 뛰어야 했던 것이다. 실제로 대중잡지 《삼천리》는 1935년 11월호에서 음반 판매량을 기준으로 당대 최고의 인기가수 10명을 뽑았는데, 여성가수는 5명 중 3명이 기생 출신이었고 남성가수는 5명 중 2명이 일본에서 클래식을 공부한 유학파였다.


《삼천리》가 꼽은 최고의 인기가수 10인


이러한 출신성분은 그들의 노래에도 영향을 주었다. 가령 기생 출신인 선우일선, 왕수복, 김복희의 노래에선 두성과 시김새라는 민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고급예능인인 기생 출신이었던 만큼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반면 일본에서 클래식을 공부한 채규엽과 강홍식의 노래에선 시종일관 약간의 떨림과 한 음 한 음을 조심스레 다루는 섬세함이 느껴진다. 조선 전통의 민요나 판소리, 그리고 1970년대를 풍미한 남진의 남성적인 발성과도 확연히 다른 이들의 음색은 명백히 서양 음악의 영향이다.


식민지시대 대표 가수들.PNG 선우일선, 왕수복, 채규엽, 강홍식


비단 가수들만 그랬던 게 아니다. 노래를 만든 작사가와 작곡가 역시 강제로라도 ‘르네상스형 인재’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환경에 놓였다. 이들은 음반사에서 ‘문예부장’이란 직책으로 음반의 기획과 홍보, 심지어는 가수의 매니저 역할까지 떠맡았다. 아예 다른 장르에서 활동하던 작사가와 작곡가도 부지기수였다. 대표적으로 가곡 〈봉선화〉와 동요 〈고향의 봄〉의 작곡가이자 소설 『최후의 악수』를 쓴 작가였으며, 이를 극본으로 각색해 음악과 연출을 맡은 연출가이기도 했던 ‘조선의 슈베르트’ 홍난파는 나소운이란 예명으로 13여 곡의 유행가를 발표했다. 그가 평소에 유행가의 유해성을 역설하는 글을 여러 차례 기고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이러한 이중생활은 퍽 묘하게 느껴진다.


홍난파 최종.PNG '조선의 슈베르트' 홍난파


최초의 트로트라 평가받는 〈황성의 적(황성옛터)〉를 지은 작사가 왕평 역시 음반사 폴리도르의 문예부장이자 다수의 희곡을 발표한 문학인이었다. 오늘날엔 다소 뜬금없다 느껴지는, 노래 초반의 장황한 연극조는 이러한 작사가의 배경이 반영된 결과라 하겠다. 실제로 당시의 유행가는 라디오나 음반 뿐 아니라 연극과 영화의 공백을 메워주는 막간음악으로도 대중과 마주했다. 1930년대 후반에는 오케레코드의 오케그랜드쇼단을 시작으로 아예 연극, 춤, 노래, 묘기, 연설, 만담, 짧은 영화가 짬뽕된 ‘패키지 쇼’가 음반을 밀어내고 보다 보편적인 음악 감상 형식으로 자리 잡는다. 트로트에 EDM, 아이돌 안무, 뮤지컬, 라틴댄스, 심지어는 에어로빅까지 접목시킨 《미스터트롯》의 원조인 셈이다.


식민지시대의 '패키지 쇼'와 《미스터트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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