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일상사』
하나의 유령이 한국, 아니 지구를 배회하고 있다, 코로나19라는 유령이. 세계의 모든 지도자들, 즉 트럼프와 로하니, 문재인과 아베, 영국의 보수당과 이탈리아의 오성운동이 이 유령을 사냥하려고 신성동맹을 맺지...는 않았지만 어쨌든 각자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 불길은 쉽사리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고, 코로나 19는 마치 점포 하나까지 알뜰히 털어먹는 일수꾼마냥 온 세상을 신나게 헤집어놓는 중이다. ‘코로나 시대’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 코로나19를 전후하여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도래했다는 의견도 심심찮게 나오고 있다.
과연 ‘코로나 시대’가 역사의 새로운 분기점이 될지 아니면 인터넷 밈으로 그칠지, 현재로선 알 길이 없다. 하지만 코로나19는 사람들에게 적어도 한 가지 깨달음만큼은 확실히 안겨준 듯하다. 바로 과학은 그 자체로는 철저히 무력하다는 깨달음 말이다. 실제로 중국과 일본, 독일 등 내로라하는 과학강국의 엘리트 연구진이 백신을 개발하고자 밤낮없이 노력중이지만, 아직까진 별다른 소식이 없다. 중국 연구진이 원숭이로부터 코로나19 항체를 확인했다는, 희망을 갖기엔 너무나 미약한 발견만이 뉴스를 통해 전해질 뿐이다. 이번 사태에서 과학은 결코 ‘데우스 엑스 마키나’가 되어주지 못했다.
사람들이 코로나19를 통해 실감한 건, 과학보다는 오히려 (좋든 나쁘든) 사회의 위력이다. 가히 ‘하이퍼 모더니즘’이라 불릴만한 한국의 방역 총력전, 신천지가 드러낸 한국 기독교의 민낯, 구로 콜센터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환경, 과로 끝에 사망한 택배노동자까지, 마치 작정이라도 한 듯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의 온갖 측면을 들쑤셔놓았다. 덕분에 지금 한국에선 국경폐쇄, 재난기본소득, 노동조건 개선, 마스크 배급제부터 심지어는 민주주의와 권위주의라는 ‘거대담론’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사회’에 대한 백가쟁명이 벌어지는 중이다. 만일 이전과 구분되는 ‘코로나 시대’만의 특징이 있다면, 그건 전염병이라는 (자연)재해가 과학이 아닌 사회의 문제라는 자각일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과학’의 무력함과 그에 비례해 ‘사회’의 중요성이 어느 때보다도 부각되는 지금, 박대인과 정한별의 『과학기술의 일상사』는 양자의 바람직한 관계에 대한 훌륭한 통찰을 안겨준다. 팟캐스트 〈과학기술정책 읽어주는 남자들〉(이하 〈과정남〉)을 엮어 낸 이 책은, 과학의 ‘위대한 발견’을 흥분조로 소개하는 여타 교양서와는 확실히 다르다. 저자들이 주목하는 건 ‘위대한 발견’의 이면, 그러니까 무언가 의미 있어 보이는 결과를 학술지에 등재하거나 제안서의 형태로 가공하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이다. 뿐만 아니라 저자들은 그렇게 탄생한 ‘발견’이 어떠한 투쟁과 타협을 거치며 사회와 영향을 주고받는지도 차분하고 꼼꼼하게 탐구해간다.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에게 꼭 필요한 책으로, 필독서로 지정해 전국의 모든 고등학생들에게 읽히고 싶다. (뜬금없이 느껴지겠지만 내 입장에선 교양서에 대한 최고의 칭찬이다!)
과학과 사회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하고자, 저자들은 ‘과학기술’이란 낡은 개념을 다시금 꺼내든다. 과학기술사 연구자인 김태호에 따르면, 그간 한국에서 ‘과학기술’은 그것이 처음으로 구체적 의미를 갖게 된 박정희 시대 이래 ‘생산성 향상을 통한 소득증대’로 받아들여졌다.(김태호, 「‘과학영농’의 깃발 아래서-박정희 시대 농촌에서 과학의 의미」, 『역사비평』 2017년 여름호 or 『‘과학대통령 박정희’ 신화를 넘어』)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의 정보통신기술(ICT) 정책과 이명박 정부의 녹색성장, 박근혜 정부의 창조경제, 그리고 문재인 정부의 4차 산업혁명까지 민주화 이후 역대 정부의 과학기술정책 역시 이름만 바꿔왔을 뿐 본질은 박정희 정부와 다르지 않았다. 그저 시대에 따라 ‘있어 보이는’ 키워드들을 죄다 우겨넣는 식으로 ‘업데이트’해왔다는 차이만 있을 뿐.
하지만 ‘과학기술’은 단지 생산성을 높여 국가에 이바지하는 도구도, 그렇다고 ‘과학’과 ‘기술의’ (한국과 일본에서만 사용하는) 기계적 결합도 아니다. 저자들은 STS(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 학자 브뤼노 라투르(Bruno Latour)의 도움을 받아 ‘과학기술’에서 ‘테크노사이언스(Technoscience)’로의 ‘도약’을 시도한다. 테크노사이언스란 간단히 말해 과학지식을 정치, 경제, 사회가 얽히고설킨 복잡한 맥락 속에서 이해하려는 관점으로, 과학지식 자체보다는 그것이 만들어지고, 유통되고, 제도화되는 메커니즘에 주목한다. 김태호, 양승훈, 최형섭 등, 한국에도 테크노사이언스로서의 과학기술사/정책을 연구하고 이를 대중이 이해할 수 있는 쉬운 언어로 풀어내는 이들이 조금씩 등장하고 있다.
그렇게 저자들이 테크노사이언스를 통해 재구성한 과학기술의 중요한 특징은, 그것이 어디까지나 ‘사람의 일’이라는 점이다. 과학기술은 ‘매드 사이언티스트’의 음습한 연구실이나 프린스턴의 고풍스런 교정을 거닐던 아인슈타인의 머릿속에서 뿅! 하고 나오지 않는다. 구체적으로 과학기술은 중소기업 사장이나 다름없는 교수가 이끄는 연구실에서, 수많은 석박사와 기술자의 협업을 거쳐 탄생한다. 연구만 한다고 다가 아니다. ‘물주’인 국가기관이나 기업을 설득하기 위해 미팅을 잡고 제안서를 수정해야 하며, 세간의 주목을 받는 연구일 경우 언론과의 인터뷰도 빼놓을 수 없다.
이처럼 과학기술 연구란 천재 ‘과학영웅’의 단독작업이 아닌 만큼, 철저히 사회적이고 정치적일 수밖에 없다. 막말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작업하는데 인간관계 트러블이 안 일어날 리가 있겠는가? 사소한 감정싸움부터 보다 큰 스케일의 파벌싸움에 이르기까지, 온갖 종류의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갈등이 뒤따를 수밖에 없다. 안타깝게도 이 과정에서 학생 신분이란 이유로 노동자로서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대학원생과 학생연구생, 그리고 너무나도 쉽게 경력이 단절되곤 하는 여성 과학인의 목소리는 배제되기 일쑤다.
정부의 지원을 받기 위해 써내야만 하는 각종 지원서 역시 고도로 정치적인 작업이다. 정부가 원하는 바를 구체적으로 명시하는 경우야 좀 낫겠지만, 연구과제 제안 요청서(Request for Proposal, RFP)의 경우엔 정부의 ‘니즈’를 찰떡같이 알아먹고 가격 역시 ‘적정수준’에 맞춰야한다. 당연히 중공업계나 건설업계를 방불케 하는 수주 경쟁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심지어 비공식적으로 ‘REP 요청서(연구과제 제안 요청서 요청서)’라 불리는, 이러이러한 연구가 국가에 도움이 될 법하니 관련 공모를 열어달라고 요청하는 문서도 존재한다! 흔히 과학의 ‘차가움’을 비판하며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을 이야기하는데, 이미 과학은 지극히 ‘인간적’인 셈이다. 다만 그 ‘인간다움’이 우리가 원하는 모습이 아닐 뿐.
그렇다면 ‘과학기술’에 ‘정책’을 더한 ‘과학기술정책’은 어떨까? 과학기술 자체도 이토록 정치적일진대, 그것이 정책과 제도로 구체화되는 과정이야 말할 것도 없겠다. 대표적으로 최근 몇 년 간 한국사회를 뜨겁게 달군 공유경제 논란을 살펴보자. 우버와 에어비앤비, 타다 등 정보통신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에 힘입은 이들 서비스는 이내 기존 이해관계자의 강렬한 반대에 부딪쳤다. 결국 우버가 한국에서 철수하고 타다 금지법이 국회에서 통과됨으로써 공유경제 논란은 일단락되었지만, 타다의 이재웅 전 대표를 비롯한 기업인들은 여전히 이를 도도한 혁신의 물결을 거스르는 ‘반동’으로 규정하며 ‘이성적 판단’을 호소하고 있다.
확실히 이들의 말마따나 공유경제 서비스는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에 따라 ‘자연스럽게’ 등장한 ‘역사의 필연’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필연’이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공유경제 서비스가 일으킨 파장은 그간 정보통신기술이 우리 삶에 얼마나 깊게 뿌리내렸는지, 그럼에도 우리가 이를 얼마나 인지하지 못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다시 말해 공유경제란 기술발전의 ‘결과’라기보다는, 이를 확인하는 ‘지표’에 지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이다.
공유경제라는 리트머스 시험지를 통해 드러난 건 이뿐만이 아니다. 우버와 타다 덕분에 우리는 이미 한국사회에 광범위하게 퍼진 정보통신기술만큼이나, 택시기사나 숙박업자와 같은 기존 사업자들의 강력한 영향력과 존재감 또한 실감했다. 보수언론이나 기업계의 주장처럼 이들이 혁신을 막는 ‘적폐’일 수도 있겠지만, 어쨌거나 엄연한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것도 사실이다. 만일 이를 무시하고 슘페터가 이야기한 ‘창조적 파괴’를 밀어붙일 경우, 과연 ‘창조’로 인한 이익이 ‘파괴’로 인한 손해보다 크다고 자신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파괴’를 제대로 밀어붙일 수나 있을까? 우버가 퇴출된 이후 비슷한 사업을 시도한 카카오가 결국 ‘택시’라는 틀을 빌릴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그렇기에 저자들은 과학기술이란 보검을 내세워 이 복잡한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에 잘라버리려는 시도를 경계한다. 한 때 서점가를 휩쓸었으나 이제는 만인의 지탄을 받는 책 제목을 빌리자면, 결국 해답은 ‘닥치고 정치’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저자들은 어차피 한국이 과학기술로 세계를 선도하는 탑티어 국가가 (당분간은) 되지 못하는 이상, 아예 크게 방향을 틀어 ‘무엇을’ 보다는 ‘어떻게’에 집중하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한다. 가령 미국이나 독일이 인공지능 같은 선제적이고 융합적인 분야를 선점한다면, 우리는 이를 어떻게 한국이란 사회에 ‘연착륙’시킬지 고민하자는 것이다. 인공지능 연구자들에 대한 지원과 인권보장, 인공지능기술의 발전을 북돋되 그 폐해를 교정할 수 있는 적절한 규제 마련 등이 이에 해당하겠다.
과학기술이 정치의 문제로 인식되는 순간, 시민의 역할도 이전과 같을 수 없다. 냉정히 말해, 그간 ‘교양’으로서의 과학은 만유인력의 법칙이나 상대성이론처럼 어렵지만 ‘있어 보이는’ 과학지식을 습득하고 이에 감탄하는 일에 불과했다. 아마 저자들은 과학기술을 둘러싼 복잡한 문제를 이해하려면 차라리 SF를 읽는 게 훨씬 낫다고 이야기할 것이다. 흔히 ‘공상’과학소설로 잘못 번역되곤 하는 SF야말로 과학기술이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또 사회는 과학기술의 개발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가장 정교하고 우아한 언어로 풀어낸 사고실험이기 때문이다. (사고실험으로서의 SF에 관심이 있다면 배명훈의 따끈따끈한 신작 『SF 작가입니다』를 추천한다!)
물론 SF보다 좋은 건 따로 있다. 바로 ‘소양’으로서의 과학기술정책이다. 과학기술이 제도와 정책으로 구체화되는 과정에 관심을 기울이고, 정책의 대상과 목적, 파급효과를 면밀히 따져가며 비판적으로 문제를 제기할 능력이야말로 시민의 덕목이자 의무라는 게 저자들의 주장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는 이미 시민의 의무를 충실히 수행하며 지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서론에서 이야기했던, 코로나19로 촉발된 백가쟁명이 그 증거다. 물론 그것이 단순한 개싸움으로 끝나지 않고 보다 건설적인 결과로 이어지려면 더 많이 읽고, 쓰고, 공부해야겠지만 말이다. 그렇기에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마치 모든 일을 예견한 듯 재난에 대한 장까지 따로 마련해 둔 『과학기술의 일상사』야 말로 ‘코로나 시대’를 살아가는 시민이라면 꼭 읽어야 할 교양서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