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윤중과 그의 시대』
이른바 ‘근대’란 무엇이냐는 질문은 사람을 참 곤란하게 만든다. 답변자의 지적 수준은 물론이고 이념적 좌표까지 단박에 드러내는, 그야말로 ‘만능키’같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세상 여느 질문이 그렇듯 ‘근대’에도 일종의 모범답안이 몇 있는데, ‘숫자’ 역시 그 중 하나다. 그저 수 잘 세는 게 중요하단 소리가 아니다. 이질적인 사물들을 추상화해 양적으로 파악하는 능력, 그것이야말로 ‘근대’의 가공할 힘의 원천이라는 이야기다. 오죽하면 『수량화 혁명』이란 책까지 나왔겠는가.
그 점에서 1910년 총독부가 실시한 토지조사가 조선의 농경지를 실제보다 과소평가했다는 사실을 근거로 식민지근대화론을 비판하는 몇몇 사회경제사가들은, 실상 ‘근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생각해보자, 조선을 갓 접수한 총독부가 토지조사를 위해 가장 우선적으로 활용한 자료가 무엇이겠는가? 대한제국의 양안(量案)이다. 요컨대, 대한제국의 수중에 있던 농경지는 딱 고 정도밖에 없었던 것이다.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말이 있듯, 그 실체가 불분명한 조선의 ‘역량’이 어떠하건 이를 제대로 파악·활용하지 못하면 사실상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 점에서 대한제국은 조선의 ‘포텐’을 좋게 말해 방치했고, 냉정히 말해 억눌렀던 셈이다.
물론 근대전환기 조선과 대한제국을 이끌었던 엘리트들도 이러한 사실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변화를 온몸으로 거부하는 수구파가 아닌 이상 대부분 재정개혁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있었고, 잘 되진 않았지만 보다 많은 재화를 효율적으로 파악·활용하고자 고심했다. 김태웅의 『어윤중과 그의 시대』는 그중에서도 정말이지 놀라운 능력과 열정으로 한평생 재정개혁에 헌신한 어윤중의 일생을 조명한다. 저자가 한국 역사학계의 ‘숨은 신’, 반농으로 ‘김자(金子)’라고도 불렸다던 김용섭 선생의 ‘도통’을 잇는 서울대 역사교육과 교수인 만큼 지나치게 ‘올드한’ 관점을 고수할뿐더러 문장과 구성 역시 빈말로라도 좋다고 말하기 어려운 책이지만, 그럼에도 읽어볼 가치는 충분하다. 어윤중이라는 ‘문제적 인물’이 19세기 조선에 대한 우리의 통념을 죄다 허물어버리기 때문이다.
우선 어윤중을 둘러싼 인적 네트워크부터가 범상치 않다. 어윤중의 친가 함종어씨는 노론 중에서도 중화와 오랑캐, 사람과 금수의 본성이 같다고 여긴 낙론(洛論) 계열로, 그의 고조부인 어용빈은 그 유명한 박지원과 활발히 교유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또 완전히 노론 외길만을 걸었던 건 아니라서, 어윤중의 조부 어명능은 근기남인인 정약용의 문하를 드나들며 그의 아들 정학연과 막역한 친구로 지냈다. 노론 낙론계의 여유와 개방성, 그리고 근기남인의 개혁의지가 어윤중의 핏줄 속에 흐르고 있었던 셈이다.
역시 피는 못 속이는 걸까, 어윤중 본인도 한평생 ‘경계’를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다. (후술하겠지만, 우리는 그것이 진정 ‘경계’였을지 질문해봐야 한다) 가령 그가 가장 믿고 의지하는 친구는 ‘온건개화파’이자 ‘친청파’인 김윤식이었으나, 동시에 그는 ‘급진개화파’이자 ‘친일파’인 박영효의 아버지인 박원양을 스승으로 두었다. 어윤중 본인의 노선은 분명 김윤식에 가까웠지만, 훗날 갑신정변의 실패로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한 상황에서 박원양이 세상을 떠나자 그는 김윤식과 함께(!) 위험을 무릅쓰고 스승의 시신을 매장해주었다.
비단 인적 네트워크만 그랬던 게 아니다. 어윤중의 공직생활 역시 여러모로 파격적이었다. ‘온건개화파’라는 타이틀에 어울리지 않게 그는 당대 기준에서 굉장히 급진적인 지세개혁을 평생에 걸쳐 일관되게 주장했다. 1877년 8월부터 1878년 5월까지 약 10개월간 암행어사로 전라우도를 시찰한 그는 환곡에 내는 일종의 이자인 모곡(耗穀)이 백성에 대한 수탈로 이어짐을 간파하곤 ‘심플하게’ 토지에만 세금을 매기자고 건의했다. 비록 조정은 그의 건의를 깔끔하게 씹어버렸으나, 훗날 평안도와 함경도를 순회하며 지방관을 감시하는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된 어윤중은 아예 이를 한층 업그레이드된 버전으로 강행해버린다.
뿐만 아니라 어윤중은 재지양반들이 장악한 향청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보수를 받는(이는 굉장히 중요하다! 아전들이 왜 백성을 쥐어짤 수밖에 없었는가를 생각해보자) 면임(面任)을 마을 단위로 천거하게끔 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가 1893년 충북 보은에 모인 동학교도를 ‘동비(東匪)’가 아닌 ‘민당(民黨)’이라 일컬으며 그 됨됨이와 애국심을 인정했다가 호된 비판에 시달렸던 건, 어쩌면 즉흥적인 감정이입보다는 오랜 신념의 발로였을지도 모른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점은 흔히 ‘친청파’로 알려진 그가 청에게 결코 고분고분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톈진에 있던 어윤중은 청에게 신속히 소요를 정리해줄 것을 요청했고 아예 청군과 함께 인천으로 귀국하는 등, 전형적인 ‘친청파’의 행보를 보였다. 하지만 이후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선 언제 그랬냐는 듯 태도가 돌변해, (비록 별다른 소득은 없었지만) 만국공법에 근거해 장정의 부당함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어윤중의 꼬장꼬장함은 후일 서북경략사로 재임하며 청과의 무역·국경문제를 논의할 때도 여실히 드러났다. 중강·회령장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그는 본디 계절에 따라 제한적으로 이루어지던 국경무역을 상시화했으며, 조선과의 무역을 주관하는 봉천성의 반대를 꺾고 세관을 설치했다. 영토문제에 대해서는 더더욱 적극적이어서, 조선과 청이 양국의 국경으로 정한 토문강이 두만강이 아닌 송화강의 지류라며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기까지 했다.
이처럼 어윤중은 당시 조선의 대내외적 어려움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고, 이를 타개하고자 치밀한 협상과 과감한 결단을 번갈아가며 구사할 줄 알았던 탁월한 정치가였다. 그 점에서 어윤중은 전형적인 ‘근대인’이었으나, 그렇다 해서 그가 자신이 나고 자란 조선의 지적 ‘전통’을 외면한 건 결코 아니었다. 아니, ‘전통’은 오히려 그로 하여금 ‘근대’를 상상하게끔 북돋는 일종의 매개 역할을 했다. 가령 그는 평안도에서 과거시험을 주관하는 경시관(京試官)으로 재임할 때 바람직한 토지제도의 방향을 물으며 그 전거로 고대의 정전제(井田制)를 들었다. 정전제는 곰팡내 나는 역사속의 유물이 아니라 19세기 조선이라는 시공간에 맞춰 혁신해야 할 이상이었던 것이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메이지 일본을 방문해 대장성을 시찰한 어윤중이 “일본이 재정을 확보함은 봉건을 폐지함에 있다”고 평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당시 청과 일본의 지식인들과 마찬가지로, 어윤중 역시 ‘봉건’과 ‘군현’이라는 프레임을 통해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을 상상했던 것이다. 물론 저자는 이 때의 ‘봉건’을 당대가 아닌 20세기 역사학, 구체적으로는 김용섭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있는듯하지만 말이다.
급진적인 지세개혁을 주장했으나 갑신정변에 가담하지 않았고, ‘친청(親淸)’이었으되 ‘종청(從淸)’은 아니었으며, ‘전통’을 고수한 덕에 ‘근대’를 받아들일 수 있었던 어윤중의 삶은 ‘19세기의 조선’에 대한 그간의 설명이 과연 유효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개화’와 ‘수구’, ‘급진개화’와 ‘온건개화’, ‘친청과’ ‘친일’, ‘전통’과 ‘근대’라는 프레임으로는 어윤중이란 인물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비단 어윤중만 그런 게 아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온건개화-친청파’로 커리어를 시작했으나 청일전쟁 이후 ‘친일’ 내각에 참여하고, 아관파천 이후 일국의 총리대신으로서 백성에게 죽는 건 천명이라며 백성에게 돌을 맞아 죽은 김홍집은 어떠한가? 반대로 ‘급진개화-친일파’였으나 철종의 부마라는 특권의식을 끝까지 버리지 못했을 뿐 아니라 후원자인 일본의 미움을 사 끝내 실각한 박영효는?
안타깝게도, 이들을 보다 ‘총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새로운 관점은 아직까지 마련되지 못한 듯하다. 물론, ‘19세기의 조선’에 대한 탁월한 연구는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다. 그럼에도 이때가 워낙 ‘비상한’ 시기였던 만큼 다들 특정한 목적의식에 경도되고, 외국의 사료까지 참고해가며 이루어진 훌륭한 실증연구도 그 인력(引力)에 의해 끝내 굴절되고 마는 경우도 적잖이 보았다.
그 점에서 노관범의 논문 「‘개화’와 ‘수구’는 언제 일어났는가?」(『한국문화』 87, 2019)는 퍽 시사적이다. 이 시기를 다룬 연구로는 드물게도 ‘당대’의 맥락만을 집요하리만치 추적한 끝에, 노관범은 개항 이후 ‘개화’와 ‘수구’가 치열하게 대립한 끝에 갑오개혁을 끝으로 전자가 승리를 거머쥔다는 ‘통설’에 종언을 고한다. 실상은 오히려 그 반대다. 그러니까 갑오개혁을 계기로 ‘개화’가 구체적인 의미를 갖게 되었고, 이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수구’가 탄생하며 비로소 양자의 대립이 본격화되었다는 것이다.
노관범의 말마따나 최소한 갑오개혁 이전까지 ‘개화’ 대 ‘수구’라는 도식을 통해 당대의 문제를 이해할 수 없다면, 자연히 ‘급진’과 ‘온건’, ‘친일’과 ‘친청’이란 도식 역시 폐기해야 하지 않을까? 평소에 ‘세계사/동아시아사 속의 한국사’를 강조해왔건만, 역사상 어느 때보다도 ‘외세’의 영향력이 강했던 19세기의 조선을 이해하기 위해선 역설적으로 (지지리도 싫어하던) ‘자주’와 ‘주체’를 전면에 내세울 필요가 있겠다. 요컨대, 19세기 조선을 이끌어간 엘리트들이 꿈꾼 국가의 모습은 어떠했으며, 이를 위해 ‘전통’과 ‘근대’, ‘외세’를 어떻게 활용했는가? 좋아하는 책의 제목을 빌리자면, 우리에게 필요한 건 새로운 ‘19세기 조선 엘리트 지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