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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Mar 28. 2020

조한 없는 조한 심포지엄을 상상한다

조한혜정을 위한 변명

찬근아, 왜 그렇게 안타까워해?     


 커피를 마시던 친구가 물었다. 조한혜정 선생님 이야기였다. 지난 2월 23일, 조한은 〈탈바꿈을 위한 재난학교를 만들자〉라는 제목의 칼럼을 《경향신문》에 기고했다. 동 신문의 새로운 필진으로 참여한지는 2달, 오랜 시간 써오던 《한겨레》 칼럼을 그만둔 지로부터는(2018.04.17.) 2년만이었다. 개인적으로는 별다른 감흥이 없는 칼럼이었다. 그냥 “조한 선생님께서 또 조한 하셨군” 정도? 하지만 다른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던 모양이다. 언젠가부터 조한의 칼럼은 비난과 조롱의 대상이 되어버렸지만, 이번에는 그 정도가 유독 심했다. 급기야 전 직장(?)인 《한겨레》에 조한의 실명을 거론한 반박칼럼이 실리기까지 했다. 친구의 질문은 바로 이 일련의 사태에 대해 내가 보인 태도를 향한 것이었다. 그리고 아마도, 친구가 정말 던지고 싶었던 질문은 다음과 같았을 것이다.     


너도 조한 선생님 싫어하잖아     


 그렇다, 난 한때 열렬한 ‘조한키드’였으나 오래 전에 ‘탈덕’한 ‘냉담자’다. 칼럼이 아닌 조한의 글을 처음 읽은 건 2013년,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그 유명한 『탈식민지시대 지식인의 글 읽기와 삶 읽기』(이하  『글 읽기와 삶 읽기』)였는데, 솔직히 제대로 읽은 건 아니었다. 그저 조금 뒤적거리다 말았을 뿐. 그럼에도 자유롭기 그지없는 연세대학교의 수업풍경, 무엇보다 ‘겉도는 말 헛도는 삶’에 대한 조한의 문제의식만큼은 뇌리에 선명히 남았고, 이후에도 내 삶에 계속해서 영향을 주었다. 조한의 제자인 엄기호의 책들을 찾아 읽으며 이런 글을 쓰고 싶다는 바람도 가져보고, (성적과는 상관없이) 연대 문화인류학과를 가겠다는 목표도 세웠으니 어지간히 빠져 있었던 셈이다.     


난 한때 열렬한 '조한키드'였다


 그리고 고등학교 3학년인 2014년, 세월호가 침몰했다. 사람마다 세월호에 대한 기억은 다 다르겠지만, 내게 세월호란 한국이 ‘탈근대’는커녕 ‘근대’에도 이르지 못했다는 참담한 선고로 받아들여졌다. 위험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한다는 최소한의 의무조차 수행하지 못하는 국가에서 ‘권력’과 ‘통제’를 논하는 건 지나친 사치였다. 차라리 권력으로부터 제대로 된 통제라도 한 번 받아보고 싶다는 게, 당시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자연히 근대를 비판하는 조한과는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사실 조한이 이야기한 것 역시 하버마스나 울리히 벡 식의 ‘성찰적 근대성’이었지만, 그의 책을 제대로 읽지 않았으니 알 턱이 없었다.      


세월호 이후 난 조한으로부터 멀어졌다


 무엇보다 세월호를 겪으며 난 말이 얼마나 무력한가를 뼈저리게 깨달았다. 제아무리 섬세하고 성찰적인 언어로 ‘우리의 이야기’를 써내려간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인가! 속절없이 가라앉는 세월호 하나 건져내지 못하는 말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부끄럽지만, 고3의 유찬근이 할 수 있는 생각이란 고작 이 정도였다. 그렇게 난 조한과 작별인사를 했고, 대신 보다 거대한 ‘구조’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대학 역시 문화인류학과가 아닌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물론 경제학은 나와 굉장히 맞지 않았지만, 문화인류학과를 갔어도 그리 행복하진 않았을 것 같다. 특히나 사회학과와 분리된 이후 고유의 색을 잃고 ‘서울대 인류학과 신촌 브랜치’가 된 것처럼 보이는 지금의 연대 문화인류학과라면 더더욱.     


 우연의 일치겠지만, 나의 ‘탈덕’ 이후 조한의 말과 삶 역시 조금씩 겉돌고 헛돌기 시작했다. 2013년 교직에서 물러난 뒤에도 조한은 꾸준히 글을 쓰고 사회운동을 했지만, 이전과 같은 울림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사고가 『글 읽기와 삶 읽기』를 쓰던 90년대에 갇혀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단순한 일차함수처럼, 조한은 어떤 주제든 이를 자기 식대로 해석해 언제나 똑같은 결론을 도출해냈다. 덕분에 언젠가부터 그의 글에선 읽지 않아도 마치 읽은 것 같은 씁쓸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선생님, 90년대 선생님의 수업을 듣던 X세대가 이제 그 때의 선생님보다 나이가 많아요. 그들은 달라진지 오랜데, 왜 선생님만 그대로세요!” 속으로 몇 번이나 외쳤는지 모른다.     


X세대는 달라진지 오랜데, 왜 선생님만 그대로세요!


 조한을 향한 비난과 조롱 역시 도를 넘어가고 있었다. 고전에 대한 얄팍한 이해로 학생들에게 같잖은 허위의식이나 심어준다는 이론사회학자 김경만부터 미적분으로 때려주고 싶다는 한 양방러 대학원생까지, 공부한다는 사람치고 조한에 대해 한마디 하지 않는 사람이 드물었다. 물론 사회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지식인이라면 겪을 수밖에 없는 일이겠지만, 조한의 경우 그것은 유독 악랄한 측면이 있었다. 아마 조한 특유의 ‘쿨함’이 사람들의 어떤 스위치를 눌러버린 것이리라. 한때 청년들의 그루이자 시민운동계의 대모였던 조한은, 이제 만인의 지탄을 받는 고장 난 벽시계로 전락해 있었다.     


조한을 향한 비난은 유독 악랄한 측면이 있었다


 어쨌든 한때의 우상에 대한 조리돌림을 계속 지켜보기란 참 힘든 일이었으므로, 그가 《한겨레》 칼럼을 그만두었을 때 늦었지만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올해 그는 다시 《경향신문》 필진으로 돌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문제의 칼럼이 개제되었다. 어느 쪽이 먼저 제안했건 간에 조한만큼이나 그를 다시 불러들인 《경향신문》의 잘못도 크다고 생각한다. 이런 일이 일어날 줄 정말 몰랐던 걸까. 조한 까기는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 지 오래인데.


 조한에 대한 사람들의 가시 돋친 시선을 이해할 수 없는 건 아니다. 조한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나 역시 그에게 적잖은 상처를 받았으니까. 확실히 예의 그 ‘나이브함’은 사람의 신경을 제대로 긁어놓는 면이 있었다. 가령 『사회인문학과의 대화』에 실린 인터뷰에서 조한은 유럽에서 유학한 박사들이 책만 읽지 말고 인문학 카페를 차리면 좋겠다거나, 영어공부는 사실 그렇게 힘든 게 아니니 무슨 학문을 하던 외국에 다녀올 필요가 있다고 ‘명랑하게’ 이야기했다. 아니 선생님, 사람들이 인문학 카페를 열지 않는 게 정말 교수 아닌 다른 길은 거들떠도 안 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미국 유학을 안 가는 건 어려운 영어에 지레 겁을 먹어서고요? 설령 그렇다 해도 그 시대에 미국 유학을 다녀와 한국 나이로 서른셋에 연세대 교수가 되신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지 않나요?     


선생님, 그건 선생님께서 하실 말씀은 아니죠!

 다시 한 번 이야기하지만, 난 조한의 ‘안티’까진 아니어도 확실히 ‘탈덕’했다. 더 가슴 아픈 일이 생기기 전에 《경향신문》 칼럼도 빨리 그만두면 좋겠다. 그럼에도 난 조한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아니 요즘 같은 시대라 더더욱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그의 트레이드마크라 할 수 있는 페미니즘이나 대안교육 이야기가 아니다. 비록 잘 부각되진 않았지만, 그는 한국사회에서 꾸준히 돌봄의 문제를 고민해온 몇 안 되는 지식인 중 하나다. 사실 난 그가 페미니즘과 대안교육 역시 돌봄의 맥락에서 사유해왔다고까지 생각한다.      


 언제나 우려먹어 좀 죄송한 기분이지만, 유치원에서 일하며 가장 절실히 깨달았던 건 돌봄이란 사람이 살아가는 이상 주고받을 수밖에 없는 권리이자 의무라는 사실이다. 전 국민의 사회적 거리두기가 강조되는 지금도, 여전히 몇몇 아이들은 유치원에 나온다. ‘코로나 시대’에 매일같이 집 밖으로 나가는 유일한 집단이 질병에 가장 취약한 아이들이라는 사실은 퍽 아이러니하지만, 돌봄이 그만큼 중요하고 필수적인 일이란 걸 보여주기도 한다.     


공장은 멈춰도 유치원은 멈출 수 없다


 조한이 일찍부터 주목했던 것 역시 삶으로부터 결코 떼어낼 수 없는 돌봄의 불가피성일 것이다.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었겠지만 그는 돌봄이 오직 여성만의 일로 취급되는 현실에 분개해 여성운동을 했고, 가족이란 벽을 넘어 돌봄의 공공성을 회복하고자 대안교육과 마을 만들기에 뛰어들었다. 그렇기에 오늘날 조한은 돌봄을 그리 중요한 문제로 생각하지 않는 넷페미들과 청소년 운동가들에게 외면 받는 것이겠지만, 뒤집어 생각해보면 오직 조한만이 돌봄을 진지하게 고민하는 페미니스트이자 대안교육 운동가라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그런 만큼 난 조한이 이제는 좀 쉬기를 바랄지언정, 지금처럼 너무 쉽게 매도당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우리는 조한이 걸어온 삶의 궤적을 면밀히 살펴 그로부터 버릴 것과 추릴 것을 가려내야 한다. 20세기 한국의 지식인이 대체로 그러했지만, 조한은 학자인 동시에 사회운동가인 ‘지사(志士)’형 인물이었던 만큼 사회에 미친 영향이 깊고도 넓기 때문이다. 그가 주도한 또하나의문화는 한국 여성운동사에서 어떠한 위상을 갖는가, 하자센터와 성미산마을은 결국 보다 확대된 의미의 가족주의(a.k.a 벽치기)로 귀결된 건 아니었나? 다양한 질문이 나와야하고, 필요하다면 ‘조한 심포지엄’이라도 열어야한다고 생각한다.     


하자센터와 성미산마을


 다만 조한 본인은 조한 심포지엄에 참석해선 안 된다. 만약 조한이 자리할 경우 심포지엄은 2013년 그의 정년을 맞아 열린 〈우정과 환대의 지성공동체〉처럼 그들만의 ‘말잔치’에 그칠 가능성이 높다. 조한의 비판자들까지 포함해, 정말로 그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사람들끼리 한 자리에 모여 무엇을 조한의 ‘유산’으로 남길지 치열하게 토론해봐야 한다. 조한이 숱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칼럼란에 얼굴을 비치는 이유도, 결국 자신이 제대로 ‘정리’되지 못했다는 찝찝함 때문은 아닐까.     


조한 없는 조한 심포지엄을 상상한다


 본인 없는 심포지엄을 열어야 할 사람은 조한만이 아니다. 작년 여름을 휩쓴 『반일 종족주의』 논란 역시 조한의 칼럼이 올라왔을 때와 마찬가지 양상을 보였다. 한 때 한국사회를 이끌었으나 이제는 학문적으로 의미 있는 결과를 생산해내지 못하는 한 노교수의 발언에 사람들은 벌떼처럼 들고 일어나 비난과 조롱을 퍼부어댔고, 그렇지 않은 소수 역시 ‘선생님’에 대한 옹호에 급급했다. 그의 무엇을 비판하고 무엇을 계승할지 차분하게 고민했던 사람은, 내 기억엔 거의 없었다. 사실 그냥 한국사회 자체가 ‘정리’에 무관심한 것 같기도 하다. 그러니까 소련이 망하자마자 그 치열했던 사구체 논쟁을 집어치우고 다들 신자유주의로, 사민주의로, 그것도 아니면 먹고사니즘으로 내뺀 것 아니겠는가.     


왜 우리는 사구체론을 유산화하지 못했는가


 하지만 잔치는 끝났을지언정, 누군가는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워야한다. 그래야만 새벽이 오기 전에 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아 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밀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점에서 조한혜정과 이영훈은 물론이요, 심지어 『먼 나라 이웃나라』의 작가인 이원복까지, 오늘날의 ‘한국’을 만든 지식인들을 추려 본인 없는 심포지엄을 열고 이를 엮어 ‘지식인 총서’라도 발행할 수는 없을까? 21세기의 한국어 화자들이 향유할 수 있는 지적 전통이 좀 더 풍요로워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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