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롭지 않을 권리』
여러분, 결혼은 사랑이 아니라 의리로 하는거에요
재수 시절 가장 좋아했던 논술선생님이 건넨 이야기였다. 평소엔 유쾌하기 그지없던 선생님의 웃음기 쫙 뺀 모습에 놀라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쇼킹했던 건 그 내용이었다. 물론 갓 스물이 된 그때도 한순간의 불타오름(!)만으로 평생을 함께 하는 게 과연 맞는 일인지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이는 결혼이란 제도 자체에 대한 불신으로 이어졌을 뿐이다. 사랑이 아닌 다른 무언가를 보고 결혼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당시로는 정말이지 듣도 보도 못한 것이었다. 그렇게 유달리 진지했던 그날의 선생님은 내게 하나의 별난 에피소드 정도로 치부되고 마는 듯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선생님의 말씀은 흐릿해지기는커녕, 더더욱 뚜렷하게 각인되기만 했다. 사람은 결코 혼자 살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달았기 때문이다. 일단 외로움도 외로움이었지만, 세상은 혼자 살아가기엔 너무 험난한 곳이었다. 같은 곳을 바라보고 함께 미래를 설계해갈 사람이 필요했다. 굳이 비유하자면 고블린 무리에 맞서 등을 맞댄 채 칼을 휘두를 수 있는 용사들 같은 관계를 원했고, 이때 요구되는 건 사랑보다는 의리 쪽이었다.
문제는 내 입장에서 함께 고블린을 격퇴해갈 ‘용사님’과 꼭 결혼을 할 필요는 없었다는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아직 혈기왕성할(?) 나이지만, 어느덧 ‘반오십’이 된 나로서는 함께 살아가고픈 사람의 조건으로 구태여 ‘성적인 매력’을 고려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안정감’과 ‘재미’를 모두 갖춘 사람, 구체적으로는 주호민 같은 사람이면 같이 살기 딱 좋겠다 싶었다. 성별? 어차피 사랑보다 의리가 중요한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런 나와 달리, 국가는 ‘사랑’과 ‘성별’에 아주 관심이 많았다. 혈연관계가 없는 성인이 ‘가족’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방법은 사실상 결혼이 유일하고, 한국에서 결혼이란 사랑하는 두 이성(異性)의 결합에 다름 아니다. 물론 누군가는 그냥 동거만으로도 충분하지 않느냐고 반문할 테지만, 아무런 법적 구속도 없는 관계에서 의리가 꽃피기란 매우 어렵다. 무엇보다 비록 ‘성애’가 존재하지 않는 관계일지언정, 사회로부터 상대방이 내게 그저 남이 아니라 소중한 가족이라는 인정을 받고 싶다. 결국 관계란 둘만 잘 지낸다고 장땡이 아닌, 보다 넓은 관계망 속에 제대로 안착해야 하는 것이니 말이다.
결혼을 할 수 없는, 혹은 하지 않는 관계라도 법적으로 의무와 권리를 부여받으며 당당하고 행복하게 살 수는 없을까? 황두영의 『외롭지 않을 권리』는 그 해답으로 ‘생활동반자제도’를 제시한다. 생활동반자, 이미 지난 해 김하나와 황선우의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를 통해 대중에게 알음알음 알려진 제도다. 하지만 두 사람이 그려낸 생활동반자제도가 그저 망원동에 거주하는 고급 지식노동자들의 ‘힙한’ 라이프스타일 정도로밖에 느껴지지 않았다면, 황두영은 국회의원 보좌관 출신다운 꼼꼼하고 치밀한 자료조사를 통해 그것이 보다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안이 될 수 있음을 설득력 있게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 이보다 더 잘 쓸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탁월한 비유와 묘사, 스토리텔링 능력은 덤이다. 괜히 스승이자 책의 추천사를 써준 ‘칼럼계의 아이돌’ 김영민이 그를 ‘작가’라고 부른 게 아니다.
우선 저자는 벼랑 끝에 내몰린 한국의 가족제도를 냉정히 되짚으며 책을 시작한다. 한국에서 가족은 그저 조건 없는 사랑을 주고받는 따뜻한 쉼터가 아니라, 냉혹한 세상을 함께 헤쳐나갈 경제공동체였다. 사회학자 장경섭이 ‘가족자유주의’라는 개념으로 탁월하게 포착했듯, 한국에서 가장 기본적인 사회구성원은 개인이 아닌 가족이었던 것이다. 그럼 개인은 무엇이었느냐, 나이와 성별에 따라 가족이라는 ‘유기체’의 특정 역할, 가령 생산, 소비, 유지·관리 등을 전담하는 ‘장기’ 혹은 ‘세포’에 불과했다.
이러한 ‘가족자유주의’는 효율은 극대화하는 한편 사회복지에 드는 비용은 최소화했다는 점에서, 어쩌면 여타 비서구와 구분되는 한국의 놀라운 경제발전을 가능케 한 원동력이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2020년 현재, 한국의 가족은 사실상 파산선고를 앞두고 있는 형편이다. 가장 중요한 원인은 그간 가족을 지탱해온 중요한 믿음, 구체적으로는 자식의 성공을 통한 부모의 노후보장이 불가능한 환상으로 판명되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말마따나 한국에서 자식을 키우는 일은 흔히 ‘농사’에 비유되곤 한다. 즉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자본과 노동을 투입해 최대한의 이익을 뽑아내는 ‘산업’이라는 이야기다. 문제는 자녀라는 농작물에 들어가는 시간과 돈, 고생의 총량은 늘어난 반면, 신자유주의라는 ‘이상기후’가 지속되며 수확은 영 신통치 않아졌다는 사실이다. 지난해 전국적인 화제를 모은 JTBC의 《스카이캐슬》이 잘 보여주었듯 부모들이 영혼까지 팔아 자녀에게 물려주고 싶어하는 미래는 고작해야(?) 서울대 의대, 그러니까 안정적인 중상류층의 지위가 최선이다. 물론 대부분의 가정에선 《스카이캐슬》만큼의 자원을 투입해도 자녀를 서울대 의대에 보낼 수 없는 게 현실이고, ‘실패’의 대가는 그만큼 비참하다.
이처럼 한국의 ‘가족자유주의’가 더 이상 지속가능한 모델이 아니라는 점은 모두 동의할 것이다. 문제는 이를 어떻게 손볼 것이냐다. 물론 우선적으로는 혈연가족을 중심으로 설계된 지금까지의 사회복지체계를 개인이 개인으로 자립할 수 있게끔 재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아무리 촘촘하게 행정의 그물을 짠들, ‘국가’와 ‘개인’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영역은 반드시 존재할 수밖에 없다. 가령 역대급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2018년 8월, 서울 강북구 삼양동 옥탑방에서 혼자 살던 41세의 독신 남성 A씨가 사망한 채 발견된 건 국가의 무관심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로 공과금 연체 등 이상신호를 감지한 공무원이 옥탑방 문을 두드렸지만 A씨는 만남을 거부했다. 일상을 함께하며 건강을 챙기고 외로움을 달래줄 존재의 부재가 A씨를 죽음에 이르게 한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보통 그런 존재를 ‘가족’이라 부른다.
요컨대 한국에서 가족은 어떻게든 손을 봐야 하지만 그렇다고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는, 참으로 애매하고 어려운 존재다. 아니 애초에 가족을 어떻게 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대구의 대학생에게도(최종렬, 『복학왕의 사회학』) 수도권의 맞벌이 화이트칼라 여성에게도(조주은, 『기획된 가족』) 가족은 삶을 영위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초적인 단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하나, 가족을 최대한 정의롭게 재구성하는 ‘김수현 드라마’식 해법뿐이다.
장애, 동성애, 이혼 등의 다양한 이슈를 언제나 선량한 가부장이 봉합하고 해결해간다는 점에서, 김수현의 드라마는 분명 보수적이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적극적인 욕망을 갖고 있으며, 가족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이를 실현할 수 없을 경우 미련 없이 가족을 떠난다. 이승한의 표현에 따르면, 김수현에게 “가부장제는 상수이며 많은 이들이 그 자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김수현은 “그것을 부정하거나 대안을 제시하는 대신, 기왕 존재할 거면 더 정의롭고 포용하는 체제가 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이승한, 「[TV 데모크라시] ‘김수현 드라마’는 개혁적 보수?」, 『시사IN』 , 2016. 09. 22.)
저자가 주장하는 생활동반자법 역시 이러한 ‘김수현 드라마’식 해법의 일환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일각의 비판처럼 생활동반자법은 기존의 가족제도를 뒤흔드는 법이 결코 아니다. 실제로 생활동반자법은 성별이나 혈연관계, 성애의 유무를 따지지 않고 성인이라면 누구든 책임감을 갖는 특별한 한 사람을 가질 권리를 인정하며, 동성결혼과 달리 민법을 개정할 필요조차 없다. 그 점에서 생활동반자법은 가족제도의 외연을 넓힘으로써 이를 안정화하는 ‘체제순응적인’ 법안이지만, 그때의 가족은 결코 이전의 가부장적 가족과는 같지 않을 것이다.
구체적으로 생활동반자법이 제정될 경우 주거지원, 소득세 인적공제 인정, 국민건강보험 직장가입자 피부양자 인정, 돌봄·출산·육아휴직, 의료결정권, 인신구제 등 그간 혈연가족이나 배우자에게만 부여되었던 권리들을 생활동반자 관계에서도 누릴 수 있게 된다. 요컨대, 생활동반자법은 이미 사실상의 가족이었으나 제대로 된 대우를 받지 못했던 ‘비정규직’ 가족들을 ‘정규직’으로 전환하는 법인 셈이다. 이렇게 써놓으니 별 거 없어 보이지만, 그 의의는 결코 적지 않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고의 개혁이란 ‘de facto’를 ‘de jure’화하는 것이었으니 말이다. 대표적으로 조선의 대동법이 그러했다.
물론 생활동반자 관계가 혈연가족이 누릴 수 있는 모든 권리를 똑같이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법적인 가족관계가 바뀌지 않는 만큼 상속권이 제한되며, 동거인의 자녀를 친양자로 입양할 수 없다. 형법이 규정한 친족 특례가 생활동반자 관계에서도 적용될 수 있는지도 명확하지 않다. 앞서 살펴보았듯 한국 가족제도의 파산이 혈연가족에게 지나치게 많은 권리와 의무를 부여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떠올린다면 이러한 ‘제한’은 나름대로 이해할 여지가 있다. 무엇보다 오랜 시간 진선미 국회의원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던 저자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법을 통과시키기 위해 보다 ‘현실적인’ 고려를 할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의문은 남는다. 과연 이토록 가벼운(?) 생활동반자 관계라면 혼인 등을 통해 가족을 이루는 일에 비해 어떠한 우위를 가질 수 있을까? ‘이론적으로는’ 가족이 주는 무거움에서는 해방되면서도 함께 사는 즐거움은 온전히 누릴 수 있다는 점이 생활동반자 관계 최고의 장점이겠다. 하지만 과연 사람들은 그저 혼자 살면 외롭다는 이유만으로 생활동반자를 원하는 것일까? 그보다는 어느 정도의 짜증과 고통이 수반될지언정 서로를 단단히 옭아맴으로써 함께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든든한 동반자를 원하는 게 아닐까? 만약 그렇다면 생활동반자는 어딘가 하자가 있어 안정적인 ‘정상가족’을 꾸릴 수 없는 이들이 어쩔 수 없이 선택하는 ‘B급 관계’로 전락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가볍다 할지언정, 난 생활동반자법을 강하게 지지한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고 유치하다. 생활동반자법이 없는 쪽보다는 있는 쪽이 훨씬 낫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처럼 사랑 아닌 의리로 살아갈 용사들뿐 아니라, 사랑하지만 결혼할 생각이 없는 동거커플, 배우자를 먼저 떠나보내고 친구와 함께 사는 중장년 여성들(실제로 이들에게서 생활동반자법에 대한 호응이 좋았다고 한다)까지, 보다 다양한 관계들이 떳떳하게 가족으로 인정받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대통령 샤를 드골이 독일의 분단을 두고 했다던 말을 정 반대의 맥락에서 비틀어보자면, 나는 가족이 너무 소중하다. 그래서 가족의 형태가 한 n개는 되면 좋겠다! 생활동반자법은 ‘n개의 가족’을 위한 첫 번째 단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