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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19. 2020

바벨과 다리 사이, 새로운 리터러시를 고민한다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몰라도, 나는 무엇보다 ‘읽는 존재’다. 주변에 꼭 한 명씩 있다는 천재들처럼 돌도 지나기 전에 한글을 뗐다는 전설적인 일화는 없지만, 글을 깨친 순간부터 읽기는 내 삶 자체나 다름없었다. 책과 신문은 말할 것도 없고 제품 설명서나 과자 포장지에 이르기까지, 일단 글자가 있다면 너무나 좋았기에 닥치는 대로 읽고 봤다. 그 결과, 나는 영화나 드라마 같은 영상매체마저 보지 않고 읽는 수준에 이르렀다! 실제로 내가 영화관을 찾는 횟수는 일 년에 많아야 두세 번이고 넷플릭스는 아예 가입조차 되어있지 않지만, 웬만한 영화나 드라마는 기사와 위키, 리뷰를 통해 ‘해결’한다. 그 유명한 데카르트의 경구를 빌리자면 나는 읽는다, 고로 존재한다. 보르헤스의 말마따나 천국은 도서관의 모습을 하고 있으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말이다.      


데카르트와 보르헤스


 이런 내가 요 근래 가장 걱정하는 건 단연 유튜브의 막강한 위세다. 단순히 사람들이 유튜브만 들여다보느라 책을 읽지 않아서가 아니다. 정보를 습득하는 주된 방식이 ‘읽기’에서 ‘보기’로 바뀌며 사람들의 사고나 심성마저 크게 달라지고 있다는 위기감이 도처에서 엄습해오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선생님들께선 너희들은 문단을 못 썼지만 지금 가르치는 애들은 문장도 못 쓴다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신다. ‘구세대’ 티를 팍팍 내는 것 같아 말하기 부끄럽지만, ‘요즘 애들’은 카톡이 아닌 틱톡이라는 동영상 앱으로 소통한다는 이야기에 기함했던 기억도 생생하다.


'요즘 애들'은 카톡이 아닌 틱톡을 쓴다


 나 역시 유치원에서 아이들에게 종종 그림책을 읽어주곤 하는데, 그때마다 2010년대 중반생인 이 친구들이 ‘서사(narrative)’가 있는 이야기책에 심각할 정도로 집중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퍽 놀라곤 한다. 아이들은 더 이상 존 버닝햄이나 앤서니 브라운, 이억배의 그림책에 빠져들지 않는다. 최근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상을 받아 화제를 모은 백희나 역시 어른들 사이에서나 인기 있을 뿐 유치원에선 찬밥신세다. 아이들이 앞다투어 빌려가는 최고의 인기작은 다름 아닌 『내셔널지오그래픽 키즈』다. 이유는 간단하다, 다큐멘터리 캡쳐나 다름없는 만큼 ‘리얼’ 그 자체인데다 무엇보다 서사가 없기 때문이다. 이 얘기를 방과후 선생님들께 하니 그것도 몰랐냐는 듯 핀잔 한마디를 건네신다.


아이들은 더 이상 존 버닝햄이나 앤서니 브라운, 백희나의 그림책에 빠져들지 않는다


아유 찬근쌤, 그것도 몰랐어? 애들한테 『WHY?』 시리즈 사주면 그걸로 책읽기는 끝이야!   
   


 이처럼 유튜브가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이상의 변화를 몰고 올 것이 거의 확실시되는 가운데, 나 같은 활자중독자는 앞으로 먹고살 길을 고민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가 없다. 일단 난 ‘새 시대의 맏이’가 되느니 ‘구시대의 막내’가 되는 길을 선택(당)했다. 속되게 말해 한국에서 그나마 글을 가장 많이 읽고 쓴다는 386과 X세대의 ‘순장조’가 되기로 한 것이다. 여러 모로 부족하지만 어쨌든 매주 서평을 올리는 것 역시 지금이 386과 X세대가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 시기라는 예감이 들어서다. 이들이 물러나고 유튜브 세대가 주류로 올라서기 전에 막차라도 타야겠다는 게 내 솔직한 심경이다. 그럼에도 마음 한켠에 남은 불안감은 사라질 줄 모른다. 과연 글 쓰는 일로 10년, 20년 뒤에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아니, 그때 내가 읽을 글 자체가 남아있기는 할까?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읽는 존재’들의 이러한 두려움에 응답하는 훌륭한 책이다. 오랜 시간 말과 글의 문제에 천착해온 두 사람의 대담으로 이루어진 이 책은 비단 유튜브 시대의 ‘문해력’을 고민하는데서 끝나지 않고, 이를 보다 다양한 층위의 미디어를 오고갈 수 있는 ‘리터러시’의 문제로 확장한다. 교양서, 그것도 대담집이지만 내용 역시 가볍기는커녕 무척이나 충실하고 밀도가 높다. 요새 한국어 화자가 한국어로 쓴 교양서의 수준에 새삼 놀라곤 하는데, 그중에서도 이 책은 유달리 돋보인다. 단언컨대 올해 한국출판문화상 교양부문 수상, 못해도 최종심에는 들어갈 것이라 확신한다.


김성우와 엄기호의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


 우선 저자들은 제목처럼 유튜브가 책을 집어삼킬 것인지, 다시 말해 정보를 ‘보는’ 시대의 도래로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가 소멸 혹은 쇠퇴할지를 묻는다. 다행히도(?) 저자들의 대답은 “그렇지 않다”이다. 읽고 쓰는 행위만이 갖는, 대체 불가능한 장점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생각하는 텍스트 최대의 장점은 ‘유연성’과 ‘경제성’, 그리고 ‘추상성’이다. 텍스트는 언제 어디서든 펜과 종이, 혹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무한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유연하고, 또 경제적이다. 과거 웹툰 작가 주호민은 “여기는 우주다”하고 말만 하면 그냥 우주가 되는 라디오 드라마처럼 만화 역시 손쉽게 그런 상황을 표현할 수 있다고 이야기했지만, 사실 손가락 한 번 퉁겨서 우주를 만들기엔 글만큼 싸고 편한 게 없다.

     

손가락 한 번 퉁겨서 우주를 만들기엔 글만큼 싸고 편한 게 없다


 무엇보다 텍스트는 오늘날 인류가 가지고 있는 모든 미디어 중 가장 압도적인 추상성을 자랑한다. 글은 인간 앞에 놓인 ‘세계’의 다양한 층위를 이해하고 이를 적합한 개념에 담아내어 길고 촘촘한 서사나 고도로 정교한 논리를 구축하는데 가장 적합한 도구다. 적어도 추상화에서만큼은 말과 영상이 아직까진 글을 따라갈 수 없다는 게 저자들의 생각이다. 따라서 유튜브 시대가 도래했다며 섣불리 텍스트 중심 교육을 놓아버리기보단, 보다 ‘잘’ 읽을 수 있게끔 학생들을 독려하는 교육과정을 계발하는 게 중요하다.

      

 이처럼 저자들은 유튜브 시대 전통적인 ‘문해력’의 위기를 점검하는 한편, 이와는 전혀 다른 방식의 ‘리터러시’에 대한 감각을 요구한다. 문해력이 높은 탑을 쌓는 능력이라면, 리터러시는 다리를 놓는 능력에 가깝다. 구체적으로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를 오가며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역량, 그것이 바로 넓은 의미의 리터러시다. 이 때 중요한 건, 다리를 놓는다는 것이 결코 ‘공감’의 동의어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이다.


'공감'은 결코 다리 놓기가 될 수 없다



 오늘날 인터넷 게시판에 올라오는 폭로나 고백글에서 숱하게 찾아볼 수 있는 “공감합니다”란 댓글은, 사실 굉장히 위험할 수 있다. 상대방의 구체적인 맥락을 읽지 못한 채 무턱대고 내가 그와 같다고 전제해버림으로써 엄연히 존재하는 차이를 소거해버리기 때문이다. 결국 청자 혹은 독자에게 남은 건 대체 불가능한 존재로서의 타자가 아니라, ‘슬픔’ 혹은 ‘분노’라는 원초적이고 납작한 감정뿐이다. 화자 혹은 글쓴이 역시 자신의 감정을 섬세하게 읽고 이해해줄 사람을 찾기 못하고 페이스북의 ‘따봉’이나 다름없는 공감을 추수하며 위안이나 얻게 되고 말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감정은 차분하게 성찰되기보다는 격하게 증폭되기 일쑤다. 이것이 바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리터러시의 위기다. 

    

 역설적이지만, 사람과 사람, 매체와 매체 사이에 다리를 놓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름 아닌 ‘차이’를 인지하는 능력이다. 다르기 때문에 다리를 놓을 수 있고, 또 놓아야 한다. 언제나 미세하게 끝이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나의 생각과 경험을 일반화하지 않고, 섣부르게 나와 남의 ‘같음’을 발견하기보다는 ‘다름’을 받아들이는 것. 나아가 말하는 이가 누구인지, 매체가 무엇인지에 따라 그에 맞는 언어를 능숙하게 구사함으로써 이해의 폭을 넓히는 것. 그것이야말로 저자들이 이야기하는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다. 

     

흔들리는 나침반처럼

 

 그리고 이러한 역량을 가장 잘 기를 수 있는 건, 당연하겠지만 ‘읽기’다. 다른 매체와 비교할 수 없는 촘촘한 내러티브를 지닌 글을 ‘잘’ 읽어내는 훈련은 역시 두껍고 복잡한 맥락을 지닌 사람이란 텍스트도 ‘잘’ 읽어낼 수 있게끔 도와주기 때문이다. 이로써 얼핏 따로 노는 것처럼 보였던 문해력과 리터러시는 ‘사람에 대한 이해’ 아래 하나로 합쳐진다. 정말이지 탁월한 솜씨라고밖에 이야기할 수 없는 구성이지만, 동시에 몇 가지 의문도 남는다. ‘읽기’란 단순히 두꺼운 내러티브를 이해하는 것으로 환원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책에서 김성우와 엄기호는 글을 크게 두 가지 종류로 구분한다. 하나는 복잡한 논리와 증명으로 이루어진 (광의의) ‘과학(김성우)’ 혹은 ‘천문(天文, 엄기호)’이고, 다른 하나는 흔히 ‘이야기’라 불리는 ‘내러티브(김성우)’ 혹은 ‘인문(人文, 엄기호)’이다. 저자들은 ‘내러티브/인문’에 대한 문해력이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를 함양하는데 도움을 준다고 이야기함으로써 전통적인 읽기와 쓰기의 중요성을 되살려낸다. 하지만 이러한 ‘엮기’는 글을 이루는 나머지 절반인 ‘과학/천문’에 대한 문해력을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도외시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실제로 저자들은 책 전반에 걸쳐 ‘과학/천문’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암기식 교육을 비판한다. 뿐만 아니라 학습을 통해 지식의 총량을 늘리는 일을 ‘바벨탑 쌓기의 리터러시’라 정의하고 이를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와 대비하며 은근히 전자보다 후자가 낫다는 인식을 내비치기도 한다. 물론 저자들의 말마따나 누가 더 많이 아느냐, 혹은 어려운 글을 잘 읽어내느냐를 잣대로 남을 평가하고 깔보는 태도는 잘못되었지만, 그렇다고 ‘과학/천문’에 대한 문해력과 이를 위한 지식의 습득 자체가 꼭 나쁜 건 아니지 않을까?

      

'바벨탑 쌓기'는 꼭 나쁘기만 할까?


 오늘날 자유로운 비판정신의 대명사처럼 일컬어지는 르네상스 시대의 인문주의자들을 키운 건 팔 할이 지독한 암기식 교육, 2할이 가혹한 매질이었다고 한다. (반면 중세의 스콜라 철학자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리학에 의거해 진리에 대한 자유롭고 비판적인 토론을 벌였다고 알려져 있다) 아무리 검색 한 번으로 세상의 모든 지식을 알 수 있다 하더라도, 머리에 든 게 있어야 검색어라도 끼적여볼 수 있다. 그 점에서 암기식 교육,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과학/천문’ 텍스트의 독해는 여전히 중요하다. 문제는 암기식 교육 자체가 아니라, 이에 대한 평가(구체적으론 오지선다형)다. 저자들 역시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음에도 ‘문해력’과 ‘다리 놓기의 리터러시’라는, 상당히 이질적인 역량을 하나로 엮어내려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빠뜨렸다고 생각한다.


르네상스 인문주의자들을 키운 건 8할이 암기식 교육, 2할이 가혹한 매질이었다

 

 유튜브가 몰고 올(온?) 변화에 대한 저자들의 지나친 낙관 역시 퍽 의아하게 느껴진다. 사실 책을 읽는 내내 “선생님들 유튜브 안 보시죠?”라는 말이 목 끝까지 올라왔는데, 그도 그럴 것이 저자들이 ‘이런 건 결코 영상으로 대체할 수 없다’고 단언하는 것들이 이미 초보적인 형태로나마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저자들이 텍스트만의 장점으로 꼽은 유연성(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음), 경제성(값이 쌈), 추상성(현상을 간단한 개념으로 압축)은 점점 영상에서도 구현가능해지는 추세다.

      

 가령 요즘 10대들은 더 이상 카톡이 아닌 틱톡이라는 동영상 앱으로 소통하며 너도나도 유튜브에 개인 채널을 개설하려 든다. 영상을 찍고, 가공하고, 공유하는 게 그만큼 쉬워졌기 때문이다. 편집 역시 전문 방송국 뺨치는 수준으로 기깔나게 뽑아내는 능력자들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게 잘 실감이 안 된다면 요즘 유튜브 최고의 화제작인 〈종로스타〉를 추천한다) 심지어 텍스트 최고의 강점이라 일컬어졌던 추상성도 이젠 현란한 인포그래픽에 밀려 조금씩 위협받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유튜브 최고의 화제작인 〈종로스타〉


 요컨대, 저자들은 당분간 글의 위세는 여전할 것이란 전제하에 논의를 시작했다. 하지만 이제 그 전제 자체를 의심해봐야 한다는 건 너무도 자명하다. 그 점에서 차라리 엄기호 대신 이쪽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전문가와 김성우의 대담으로 책을 구성했다면 좋았을 것 같다는 아쉬움도 든다. (물론 난 예나 지금이나 ‘엄기호 키드’고 그의 수업을 들은 제자이기도 하지만, 이번 책은 그간 엄기호가 해왔던 이야기들의 반복에 불과하다는 아쉬움을 지우기 어렵다)

     

 이처럼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그 장점만큼이나 한계도 뚜렷한 책이다. 문해력과 다리를 놓는 리터러시를 엮어낸 건 좋았지만 그 결과 ‘과학/천문’에 대한 문해력과 이를 위한 밑바탕으로서의 암기식 교육이 도외시되었다. 뿐만 아니라 유튜브가 몰고 올 변화, 구체적으로 유튜브라는 미디어가 만들어낼 새로운 인간상에 대한 고민 역시 제대로 담아내지 못했다. 그러나 난 이 책이 바로 그 한계 때문에 오히려 가치를 갖고, 널리 읽혀야한다고 생각한다.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저자가 혼자 북치고 장구치는 책은 좋은 책이 아니다. 독자로 하여금 더 이상의 생각을 이끌어내지 못하고 그냥 저자가 하는 말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이게 만들기 때문이다.

      

독자에게 비판의 여지를 열어주는 책이 좋은 책이다


 반면 저자가 의도적으로 몇 개의 허점을 만들어놓을 경우, 독자는 (자신이 저자의 의도대로 움직이고 있다는 건 생각지 못하고) 신나게 저자를 비판하며 자신만의 생각을 만들어낼 여지를 갖게 된다. 따라서 완성도의 측면에선 전자가 후자에 비해 압도적이겠지만, 사회적 영향력의 측면에선 후자가 전자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특히 되도록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는 것을 목표로 삼는 교양서의 경우, 일부러라도 모든 걸 얘기해서는 안 된다고까지 생각한다.

      

 그 점에서 『유튜브는 책을 집어삼킬 것인가』는 독자에게 비판의 여지를 열어 주는 훌륭한 책이다. 단언컨대 저자들은 이 책에 딸려 나올 비판, 가령 ‘과학/천문’에 대한 등한시나 유튜브에 대한 과소평가 등을 충분히 예상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비판으로 끝나지 않고 더 나은 논의로 이어지는 마중물이다. 암기식 교육이 여전히 중요하다면 이를 어떻게 평가할지, 유튜브의 도래로 새로운 인간형이 출현했다면 이들에게 맞는 리터러시 교육은 어때야 할지를 이야기해볼 수 있다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책의 외연은 오히려 풍성해진다.


 아마 이 책은 전국의 교사, 강사, 교수, 그리고 여러 독립서점과 독서모임 사이에서 널리 읽힐 것이고, 그만큼의 호응과 비판 역시 불러일으킬 것이다. 그리고 이는 아마도 한국사회로 하여금 처음으로 ‘잘’ 읽는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할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제공할 테고 말이다. 저자들은 이제 굉장히 바쁠 일만 남았다. 전국 각지의 학교와 서점, 독서모임에 불려 다니게 될 테니.


전국 각지의 학교와 서점, 독서모임이 저자들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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