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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Jan 02. 2021

대운하가 말해주는 중국의 제국시스템

『대운하와 중국 상인』

 냉전이 한창이던 1957년 미국, 예순을 갓 넘긴 유대계 독일인 망명객 카를 비트포겔(Karl August Wittfogel)은 곧 세상을 뒤흔들 한 권의 책을 내놓을 참이었다. 제목은 『동양적 전제주의(Oriental Despotism)』. 소련 체제의 기원을 동양에서 찾음으로써 엄청난 논란을 불러일으켰지만, 사실은 공산주의 비판보다도 막스 베버를 사사하고 그 자신 탁월한 중국연구자이기도 했던 비트포겔 평생의 연구를 집대성한 성격이 더 강한 책이었다.  

 

카를 비트포겔과 그의 책 『동양적 전제주의』


 비트포겔이 보기에 소련 공산당이 ‘정통’으로 공인한 단선형 발전론, 즉 세계의 모든 지역이 시간의 차이가 있을지언정 근본적으로 동일한 역사적 궤적을 그려간다는 가정은 완전히 틀린 것이었다. 고대 노예제-중세 봉건제-근대 자본주의로 이어지는 맑스의 도식은 사실상 유럽과 일본의 역사에만 적실성을 지니며, 중국과 인도를 비롯한 비서구는 수력사회(hydraulic society)라는, 영속적이고도 억압적인 체제를 건설했기 때문이다. 명칭에서 알 수 있듯 수력사회는 주로 대규모 치수(治水)가 필수적인 반건조지대에서 형성되지만, 몽골지배 이후의 러시아처럼 자연조건이 맞지 않을지라도 유목민이라는 ‘감염원’을 통해서 얼마든 뿌리내릴 수 있다. 비트포겔은 심지어 태평양의 도서지역인 하와이마저 수력사회로 분류하니, 수력사회란 사실상 봉건제를 거치지 않은 세계의 모든 지역에 해당하는 셈이다.


대표적인 수력사회인 인도, 중국, 러시아


 구체적으로 수력사회에선 무소불위의 지배자와 그를 보좌하는 관료집단에 의해 모든 것이 좌지우지된다. 사회는 국가에 완전히 종속되며, 상업과 수공업은 최소한의 수요를 뒷받침할 수준으로만 발전한다. 아무리 부유한 자라 할지언정 자식에게 균등하게 재산을 상속하기에 그 규모가 점점 영세해질 뿐 아니라 그나마도 약탈적 관료집단에게 수탈당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때문에 수력사회에서는 사적소유권에 기초한 대의민주주의도, 자유로운 상거래를 통한 자본주의의 발전도 모두 난망한 일이다. 억압과 굴종, 가난을 영구히 이어가는 것만이 수력사회에 주어진 운명이며, 이를 유일하게 반전시킬 수 있는 건 오로지 선진적인 외세의 침략뿐이다. 물론 수력사회의 관성은 매우 강하기에 기껏 주어진 해방의 기회조차 도리어 더욱 억압적인 체제로 귀결될 따름이다. 1차 세계대전의 결과 러시아에 민주적인 공화국이 아니라 차르전제의 업그레이드판인 소련이 들어섰단 사실은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외세의 침략이 없는 이상 비서구엔 꿈도 희망도 없다는 비트포겔의 이야기는 분명 고약하고 오만하다. 하지만 그에 맞서 비서구도 서구와 같은 역사발전과정을 겪었다고 주장하는 건 되려 비트포겔이 짜놓은 판에 놀아나는 꼴이다. 생각해보라, 그간 얼마나 많은 비서구 지식인들이 자국 역사에서 ‘중세’와 ‘봉건’을 발견, 혹은 발명하려 들다가 끝내 주화입마에 빠지고 말았는가? 따라서 정말로 비트포겔에게 한 방 제대로 먹이고 싶다면, 오히려 그의 동양적 전제주의와 수력사회론을 받아들이되 그 실상을 조금은 다르게 그려내는 것도 좋은 방법일 수 있다. 그리고 조영헌의 『대운하와 중국 상인』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겠지만 비트포겔에 대한 가장 탁월한 전유(專有)처럼 읽히는 책이다. 수력사회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대운하를 둘러싼 우여곡절과 이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휘주상인의 흥망사를 따라가다 보면, 동양적 전제주의란 꼭 일방적인 지배와 굴종, 그리고 가난으로 점철되지만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조영헌의 『대운하와 중국 상인』


 황하를 다스림으로써 순(舜) 임금의 뒤를 이었다는 우(禹) 임금의 전설에서 알 수 있듯, 치수는 중국에 문명을 꽃피운 가장 중요한 요인이자 제국을 지탱하는 원동력이었다. 물을 다스리려는 노력은 천명이 바뀔지언정 면면히 이어졌고, 마침내 수나라 양제(煬帝)는 화북과 강남을 연결하는 대운하를 건설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당시의 대운하는 그 북쪽 종착점이 고작해야 낙양이었던 데다, 황하, 회하, 장강이라는 자연하천을 연결한 데 지나지 않았기에 한계가 뚜렷했다. 북경과 항주를 잇는 총연장 1794km의 대운하가 완공된 건 원대에 이르러서다. 그나마도 몽골 조정은 유목민답지 않게(?) 운하를 통한 하운(河運)보단 바다를 통한 해운(海運)을 선호했던지라 중요성은 그리 크지 않았다. 대운하가 천하를 다스리는 중요한 인프라로 부상한 건 한족 왕조인 명이 원을 북쪽의 고비사막으로 쫓아내고 중원의 지배자로 등극하면서부터다.

 

 다들 알다시피, 명조의 첫 수도는 유서 깊은 한족의 도시 남경이었다. 그러나 명태조 주원장의 4남인 연왕(燕王) 주체가 쿠데타(정난의 변)를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오른 후 남경의 수도 지위는 매우 위태로워졌다. 북경 천도가 공공연히 논의되기 시작한 것이다. 황제가 된 주체, 아니 이젠 영락제로서는 불순분자들이 득시글대는 남경을 떠나 자신의 홈그라운드에서 마음 편히 포부를 펼치고 싶었으리라. 하지만 단순히 영락제 개인의 선호로 치부하기엔 문제가 조금 복잡했다. 사실 명은 중국사를 통틀어 이전 왕조를 완벽히 소멸시키지 못한 유일한 왕조였다. 천명이 자신들에게 완전히 넘어오지 않았다는 명분상의 약점은 물론, 막북(漠北, 고비 사막 이북)의 몽골이 언제든 중원을 위협할 수 있었다는 보다 실제적인 위협도 안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영락제는 과감하게 오랑캐가 건설한 식민도시인 북경으로 천도, 북방의 군권을 직접 통솔하며 북으로는 몽골을 견제하고 남으로는 중원을 다스리고자 했던 것이다.


영락제는 명태조 홍무제(좌)보다는 원세조 쿠빌라이(우)의 후계자에 가까웠다


 물론 북경이 수도로 확정되기까지의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북경 천도를 지지하던 신하들은 송의 수도 개봉이 의지할 험요함이 있으나 막힘없는 수로가 없고(有險可依而無水通利也), 당의 수도 장안이 막힘없는 물길이 있으나 의지할 험요함이 없는 반면(是有水通利而無險可依也) 북경은 이 둘을 모두 갖추었으니 새 수도로 손색이 없다며 황제의 뜻을 옹호했다. 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북경은 의지할 험요함도, 막힘없는 수로도 쉬이 확보하기 힘든 곳이었다. 어느 쪽이든 국가의 인위적인 개입을 통해 보강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기에 명은 북으론 만리장성을 쌓아 험요함을 더했고, 남으론 대운하를 뚫어 수로를 마련했다. 이후 북쪽의 장성과(정확히는 장성이 상징하는 북방경비) 남쪽의 대운하, 그리고 양자를 연결하는 수도 북경은 명과 그 이후의 청대까지 제국의 성격을 규정짓는 근본적인 특징으로 자리 잡는다. 저자가 ‘북경 수도론’을 내세우는 이유다.

   

장성과 운하는 각각 북과 남에서 수도 북경을 지탱했다


 문제는 장성도, 운하도 한 번 쌓거나 뚫는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것이다. 둘 다 자연을 거슬러 만든 인공물인 만큼 꾸준한 유지·보수공사가 필수적이었다. 특히 운하의 경우 명왕조가 바다를 걸어 잠그고 조운을 비롯한 모든 물류를 대운하로 일원화했기 때문에 막대한 부담이 가해질 수밖에 없었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심각한 곳이 이른바 회·양 지역이었다. 회하(淮河)와 홍택호를 끼고 있는 회안(淮安)에서 시작해 장강을 마주보는 양주(揚州)까지를 일컫는 이 지역의 문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첫째로 대운하의 상류에서 황하의 막대한 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둘째로 중류에서 택국(澤國)이라 불릴 정도로 많았던 이 지역의 호수들이 걸핏하면 대운하에 간섭해 수심이 일정치 않았으며, 셋째로 하류에서 하수(河水)를 양자강과 바다로 배출하기 쉽지 않았던 데다 자칫하면 전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양회염전에 영향을 줄 수 있었다.     


명청대 대운하와 회·양 지역의 위치


 요컨대, 풍요로운 강남의 물류를 화북으로 실어 나르는 초입에 위치한 회·양 지역은 조운과 염정(鹽政), 그리고 하공(河工, 운하 공사)의 삼대정(三大政)이 마치 이 지역의 수로마냥 복잡하게 얽혀 있는 곳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마테오 리치의 말마따나 “아무것도 생산하지 않지만 어떠한 부족함도 없는” 도시인 북경의 풍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회·양의 삼대정을 해결해야 했고, 아무리 ‘전제적’일지언정 이는 국가가 단독으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자연히 국가는 북경을 수도로 유지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부담을 나눌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나섰고, 이에 기꺼이 응한 자들이 바로 상인, 그중에서도 휘주(徽州) 상인들이었다.     


청대 휘주상인을 주인공으로 한 중국 드라마


 휘주는 안휘성(安徽省)의 한 부(府)로, 산지가 많아 예로부터 농사로 먹고살기는 어려운 곳이었다. 이 궁벽한 동네가 천하를 쥐고 흔드는 상인들의 고장이 될 수 있었던 건 일차적으로는 소금, 보다 근본적으로는 북경이라는 ‘돈 먹는’ 수도 덕분이었다. 예로부터 소금은 철과 더불어 중국 역대 왕조의 가장 중요한 관리대상이었는데, 명 왕조는 개창과 함께 개중법(開中法)을 제정해 소금을 국방과 연결시켰다. 개중법이란 상인에게 북방 변경의 지정된 장소로 곡물을 운송하면 양주의 염운사에서 소금의 운송·판매권인 염인(鹽引)을 지급하는 법으로, 수도 북쪽의 방비를 탄탄히 하고자 고안된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곡물의 운송부터 소금의 판매에 이르는 전 과정을 동일 상인이 부담해야 했으므로, 당시 소금으로 부를 거머쥔 건 지리적으로 변경과 가까웠던 산서(山西)와 섬서(陝西)의 상인, 곧 산섬상(山陝商)이었다.     


개중법의 시행으로 부를 거머쥔 산섬상


 하지만 북방에 곡물을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다는 걸 감안해도 지나치게 비효율적이었던 개중법은 결국 1492년, 양주의 염운사에 은을 납부하는 것만으로 염인을 부여하는 운사납은제(運司納銀制)로 바뀌게 된다. 이로써 소금의 유통과정 역시 분업화되기 시작했는데,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간 이들이 바로 휘상이었다. 이들은 전당업에 주로 종사했기 때문에 국가의 화폐인 은과 민간의 화폐인 동전의 환전에 유리했다. 또한 이전부터 장강을 따라 목재를 유통했던 만큼 어디까지나 북쪽 출신인 산섬상과 비교해 영업망도 결코 꿇리지 않았다. 여기에 강력한 가족·종족 결속력이 더해지며 휘상은 소금을 유통하는 수상(水商)으로, 일부는 양주의 염운사와 직접 소금을 거래하는 내상(內商)으로 활동영역을 조금씩 넓혀갔다.     

 

 이처럼 16세기를 거치며 휘상은 염운계의 슈퍼루키로 성장해갔지만 부자는 망해도 삼년은 간다고, 아직까진 산섬상의 영향력이 여전히 강했다. 그러나 1598년, 몽골의 보바이 난, 조선의 임진왜란, 묘족의 양응룡 난(일명 만력 3대정)을 진압하는데 들어간 막대한 전비를 충당하고자 태감(太監) 노보가 파견되며 휘상에게 새로운 기회가 열린다. 노보는 충분한 고민 없이 세금 징수를 위한 염인인 부인(浮引)을 남발했는데, 이 과정에서 정규 염인인 정인(正引)을 유통하던 산섬상이 큰 타격을 입었기 때문이다. 반면 휘상에게 부인은 수상을 넘어 내상의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매우 좋은 사다리였다. 이들은 기존 질서가 와해되는 과정에서 간상(奸商, 간사한 상인)이란 소리까지 들어가며 세력가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고, 그 결과 산섬상을 몰아내고 회·양 염상계의 지존으로 등극할 수 있었다.     


만력 삼대정은 염정법의 혼란을 불러왔다


 물론 휘상의 약진은 어디까지나 명말의 혼란기를 틈타 이루어진 만큼 언제든 신기루처럼 사라질 수 있는 불안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하늘은 여전히 휘상의 편이었다. 1617년 등장한 강운법(綱運法)은 기존의 산발적인 내상들을 강(綱)이라는 10개의 조합으로 재편성했는데, 이 과정에서 강책의 권리인 염와(鹽窩)에 대한 배타적 세습권을 인정한 것이다. 휘상으로서는 치고 올라가야 할 시점에는 질서가 흔들리더니 정점에 오른 뒤에는 질서가 그대로 굳어져버린, 이보다 좋을 수 없는 결과였다. 게다가 강에 속한 상인들은 할당량에 대한 세금만 납부하면 나머지 염운 과정에선 국가로부터 재량권을 위임받았기에 휘상은 상업활동에서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자유까지 얻은 셈이었다. 결국 명에서 청으로 천명이 교체된 뒤에도 강운법이 계속 유지됨으로써 휘상은 회·양 최대 상인집단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굳힐 수 있었다.     


 휘상의 이러한 약진은, 당연하겠지만 주변의 질시와 경멸을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상업을 천시하는 사대부의 고장인 강남에서 휘상은 어디까지나 권세가에 빌붙고 경쟁자를 잔혹하게 제거하여 부를 일군 모리배에 불과했다. 휘상으로서도 간상 딱지는 사업에 좋지 않았으므로 어떻게든 이미지를 개선할 필요가 있었을 터, 고심하던 이들의 눈에 들어온 게 전란으로 황폐화된 회·양 지역, 특히 양주의 참상이었다. 휘상의 기반인 이곳은 남명군과 청군의 연이은 침략으로 삶의 기반이 모조리 파괴되었을 뿐 아니라, 안 그래도 말썽이던 대운하의 기능 역시 정지되어 국가적으로도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이에 휘상은 양주, 나아가 천하의 근심을 기꺼이 떠맡음으로써 자신들이 그저 이익만을 탐하는 천한 장사치가 아님을 몸소 증명해보이기로 한다. 그중에서도 잠산도 정씨(程氏)의 사례는 전근대 중국에서 상인이 차지한 독특한 위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특기할 필요가 있다.


휘주 점산도

 안휘성 휘주부 흡협에 위치한 향촌인 잠산도(岑山島) 출신인 정씨 일족은 본래 유학을 공부하는 문인 가문이었으나 가세는 조금씩 쇠락해갈 뿐이었다. 결국 17세기 초, 11세손 정필충은 휘주에서 회안의 안동현(安東縣)으로 이주해 소금장사에 뛰어든다. 정필충은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원만히 처리하고 빈민구제에도 힘써 정옹(程翁)이라는 존칭을 얻을 정도로 지역사회의 신망을 얻었고, 그의 아들 정재는 염상계의 대표로서 관과 교섭하는 좨주(祭酒)로 추대된다. 좨주가 된 정재는 소금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국고를 빌려 운하를 준설했을 뿐 아니라, 이미 안동을 떠나 회안에 살고 있었음에도 당시 황하의 범람으로 고통 받던 안동에 제방을 쌓는 등 치수에 힘썼다. 이에 감읍한 읍민의 요청으로 관부는 정씨 가문에 안동적(安東籍)을 부여했다. 천한 상인에다 외지인이기까지 한 정씨가 비로소 지역 신사(紳士)에게 ‘내부자’로 인정받는 순간이자 그 자신도 신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순간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조선의 조카 정증 대에 이르러 정씨 가문의 영광은 극에 달했으니, 무려 강희제를 알현하는 은총을 입은 것이다. 정증은 독서를 즐기던 엘리트이자 회·양 지역 염상의 대표자인 총상으로, 하공·조운·염정의 삼대정을 마치 손바닥을 가리키듯 손쉽게 해낸다는 평을 듣는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강희제를 가장 골치 아프게 했던, 양주와 장강을 잇는 길이 약 10km의 망도하(芒稻河) 준설에 필요한 재원을 뚝딱 마련했을 뿐 아니라 실제 공정도 진두지휘했다. 감격한 강희제는 1705년 그의 다섯 번째 남순(南巡)에서 정증을 행궁으로 초대해 정로(旌勞, 노고를 위로하고 표창함)라 쓴 어서를 하사하고 종7품인 중서사인(中書舍人)의 직함을 제수했다. 상인으로는 유일무이한 명예요, 영광이었다.   

   

강희제의 남순


 황제가 안겨준 명예는 단순히 명예에 그치지 않았다. 관직을 제수 받았다 함은 곧 지역사회의 현안에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신사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정증은 돈 많은 상인에서 지역사회의 각종 현안을 처리하는 지역 엘리트로 부상했고, 그의 자식들은 대부분 관직을 역임했다. 경제적인 특혜도 있었다. 남순 2년 뒤인 1707년 강희제가 호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정증을 비롯한 30여 명의 총상에게 다른 상인들이 담당하던 식염(食鹽) 판매권을 준 것이다. 새로 얻게 된 사회적 영향력과 한층 두터워진 경제적 영향력을 바탕으로, 정씨 가문은 각종 공익사업에 활발히 참여했다. 정증의 넷째 아들 정종은 강희제의 손자인 건륭제 시절 회안의 자선단체인 육영당에 운영 자금을 보탰고, 아예 보제당이라는 별도의 자선단체를 건립하기까지 했다. 나아가 그는 회안에 수재가 발생했을 때 수재민을 위한 구호 시설인 서류소 건립에 참여하고 운영을 주도해 10만여 명의 수재민을 구하기까지 했다. 아버지가 그러했듯 정종의 선행은 황제를 감동시켰고, 건륭제는 그에게 의돈임휼(誼敦任恤, 정의가 돈독하여 진심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다)이라 쓴 어서를 내림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건륭제의 남순


 비록 잠산도 정씨 가문이 유달리 ‘튀는’ 경우이긴 하지만, 회·양 지역의 최대 현안인 삼대정의 해결에 적극 참여하고 공익사업에 헌신함으로써 관부, 나아가 황제의 신임을 얻는 건 당시 휘상들의 일반적인 모습이었다. 특히 강희제와 건륭제가 각각 6번씩 행한 남순은 휘상에게 자신들이 이렇게나 ‘신사적인’ 상인임을 어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이는 하공을 중시했던 강희제보다 강남의 고급문화 향유가 목적이었던 건륭제 때 두드러졌는데, 휘상은 그야말로 영혼을 끌어모아 천자의 남순에 필요한 각종 공무와 연회 준비에 앞장섰다. 상인들의 이와 같은 ‘자발적인’ 헌신에 건륭제는 각종 사여와 의서로 보답했고, 양자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졌다. 저자의 말마따나 휘상이 아쉬워했던 건 황제의 잦은 방문도, 남순에 따른 경제적 부담도 아니었다. “오히려 1784년 이후 기세등등한 황제가 다시는 양주로 내려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p.292.) 황제는 회·양의 지역 경제와 도시 문화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가장 중요하고도 근본적인 원인이었던 것이다. 

    

황제가 오지 않자 양주는 쇠락하기 시작했다


 대운하를 둘러싼 우여곡절과 이를 이용해 부와 명성을 거머쥔 휘주상인의 흥망사는, 우리로 하여금 비트포겔의 입론을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보게끔 북돋는다. 다시 말해 중국의 ‘전제주의(Despotism)’에 대한 새로운 정의를 상상하게끔 만든다는 것이다. 명과 청은 거대한 장성을 쌓고 기다란 운하를 뚫을 능력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분명 동시대 유럽이나 일본의 국가들보다는 강력하고, 또 총체적인 권력이었다. 하지만 이를 실제로 시행한 건 휘상을 비롯한 상인들이었다. 이들은 국가의 명령을 받들어, 혹은 자발적으로 공공사업에 헌신했으며 그 대가로 관직을 얻고 경제적 이익을 누렸다.      


 물론 비트포겔 역시 중국에 대해서만큼은 수많은 예외를 인정하고 있다. 가령 그는 중국이 수력사회 중 사적 소유권이 고도로 발달한 거의 유일한 지역일 뿐 아니라, 신사계급의 구성원들이 때로는 백성을 대변하여 통치자에게 일정 수준의 합리성을 갖출 것을 요구했다고 이야기한다. 스승 막스 베버가 제정 중국의 중앙정부가 비교적 허술한 방식으로 지방관료기구를 지휘감독 해나갔다는 점에 놀랐다고도 적고 있다. 그럼에도 비트포겔은 중국의 노역이 여타 동양과 달리 세금으로 대체되었다는 사실이 그 강제성과 예속성을 지워주진 못한다며, 끝내 중국에 대한 비관적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 곡물을 북방 변경까지 직접 운송하는 대신 은을 지불하는 식으로 염운법을 바꿈으로써 중국 경제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났는가를 떠올린다면, 적어도 비트포겔처럼 이를 부수적인 것으로 치부할 수는 없으리라. 특히 명대 조세의 은납화가 비단 중국경제뿐 아니라 동아시아, 나아가 세계경제마저 “쾌락의 혼돈”(티모시 브룩)에 빠뜨렸다는 사실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렇다.   


명말 남경의 번영을 보여주는 상원등채도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은 경제만이 아니다. 잠산도 정씨가 보여주듯 운하 정비와 공공사업에 힘써 황제의 인정을 받은 유력 상인 가문의 존재는, 명청대 국가와 상인의 관계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요구한다. 저자의 말마따나 황제는 허함(虛銜)에 가까운 직함과 9품 관원이 착용한 모자를 하사하는, 자신에겐 결코 어렵지 않은 일을 통해 상인들을 “길들이려” 했지만(p.292.), 상인들은 상인들대로 황제의 후광을 ‘이용해’ 지역사회의 신망을 얻고 특권을 따냈다. 이 점에서 저자의 박사논문에 유용한 논평을 해주기도 했다던 피터 볼의 통찰을 음미해볼 필요가 있다. 볼은 명청대 중국의 인구가 크게 늘어났음에도 관직 수는 거의 변하지 않았음을 상기시키며, 이를 성리학의 전파에 따라 스스로를 도덕적 실천의 주체로 자임하는 사(士) 계층이 두텁게 형성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한다. 즉 만인의 성인됨을 긍정하는 성리학이 사회에 점차 뿌리내리며 정부 바깥에서도 이상을 추구하고 공공선에 복무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중국 정치사상사 연구자 피터 볼


 중앙보다는 지방에서, 정부조직보다는 자발적 결사체를 통해 각종 현안에 참여하지만 끝까지 ‘천하’에 대한 관심의 끊은 놓지 않는 사대부, 볼은 이들이야말로 송 이후의 후기제국을 당까지의 전기제국과 구별지어주는 특징적인 존재라고 여긴다. 그리고 휘상의 사례는 조선과 달리 중국에선 이들 사대부의 범주가 상당히 탄력적이었음을 보여준다. 비록 상인일지언정 유교적 교양을 익히고 공공선에 헌신한다면 국가로부터 사대부로 인정받을 수 있었고, 국가는 이를 통해 재정 부담을 최소화하면서도 지배력을 관철시킬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잠재적 불순분자들을 체제 내로 포섭함으로써 모반의 위험도 미연에 방지했다. 이해관계자를 최대한 늘려 체제에 충성할 수밖에 없게끔 만드는 것, 이것이야말로 중국적 제국시스템의 핵심이었다. 만일 비트포겔의 말마따나 중국의 전제주의가 영속적이라면, 그건 제국을 저버릴 경우 잃을 게 너무 많은 사람들이 결코 적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후기 제국시스템의 핵심, 사대부


 비단 경제사나 사회사뿐 아니라 정치사와 사상사, 심지어 과학기술사의 맥락에서도 유용한 통찰을 안겨주는 건 물론이요, 학술서임에도 소설처럼 흥미진진하게 읽히는 이 책에도 단점은 있다. 바로 중국이 바다를 저버리고 운하로 모든 물류를 일원화한 이유가 뚜렷이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는 바다에 대한 중국의 근원적인 공포, 조운 관료와 하공 관료의 입장차 등을 그 이유로 들지만 이 역시 석연치 않다. (이 책의 출간 즈음에 《동아일보》와 한 인터뷰에서는 “중국 왕조가 북방민족을 집중적으로 경계하기 위해 해금정책을 실시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했는데, 이쪽이 오히려 설득력 있게 느껴진다)      


중국은 왜 바다를 걸어 잠갔을까? 


 책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대운하는 결코 안전하고 효율적인 운송 시스템이 아니었다. 건조한 화북의 특성상 겨울철엔 운하가 자주 가물었고, 구간별로 고도차도 커서 수위가 다른 지역을 연결하는 방죽인 패(壩)에선 밧줄로 배를 끄는 수부(水夫)가 항상 대기하고 있었다. 상인들을 노리는 수적(水賊)들도 군데군데 도사리고 있었으며, 고용된 운송업자들은 언제 무뢰배로 돌변할지 몰랐다. 그럼에도 중국이 끝끝내 대운하를 고집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 저자는 올해 출간될 『대운하시대』에 그 답을 준비해놓은 듯하다. 『대운하와 중국 상인』이 나온 지 어언 10년, 그 사이에 저자는 해양사로 관심을 넓혀 『바다에서 본 역사』와 『셀던의 중국지도』를 번역하는 등 육지가 아닌 바다에서 동아시아의 역사를 새로이 이해하려는 작업을 계속해왔다. 바다처럼 깊고 넓어진 저자의 연구가 『대운하시대』에 어떻게 반영되었을지, 독자로서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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