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축년(丁丑年) 정월 30일(양력 1637년 2월 24일), 조선 국왕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서 삼전도(三田渡)로 향했다. 병자년(丙子年) 12월 8일(1637년 1월 3일) 압록강을 건넌지 채 일주일도 되지 않아 수도 한성을 접수하고, 끝내 최후의 보루인 강화도마저 점령한 청에게 항복하기 위해서였다. 몸소 군대를 이끌고 조선을 찾은 청 태종 홍타이지에게, 인조는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삼궤구고두(三跪九叩頭)의 예를 올렸다. 오늘날까지 널리 회자되는 ‘삼전도의 굴욕’이다.
삼전도의 굴욕
‘문명국 국왕’이 ‘오랑캐 추장’에게 신하의 예를 표한 이 초유의 사건은, 당연하겠지만 조선 지배층의 정신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계승범의 말마따나 “조선후기 정치·지성사의 흐름은 이 충격을 벗어나고 상쇄하기 위한 자기몸부림에 다름 아니었다.”(계승범, 「삼전도항복과 조선의 국가정체성 문제-허태구, 『병자호란과 예, 그리고 중화』(소명출판,2019)에 대한 종합비평」, 『조선시대사학보』 91. 2019) 지위와 당색을 막론하고 일단 ‘위정자’의 지위에 있는 자라면 병자호란에 대한 해석과 평가로부터 자신의 입론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다.
병자호란은 조선의 위정자들에게 깊은 상흔을 남겼다
병자호란의 엄청난 무게에 짓눌린 건 이들만이 아니다. 사건으로부터 400년 가까이 지난 오늘날까지도, 병자호란은 여전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뜨거운 논쟁거리 중 하나다. 아무리 조선시대에 대한 평가가 현대 한국인의 ‘이념적 좌표’를 파악하는 중요한 리트머스 시험지라고 해도, 이러한 과열은 의아하게 느껴질 정도다. 심지어 명과 청 사이에 놓인 병자호란 당시의 조선을 미국과 중국 사이에 놓인 21세기의 대한민국과 섣부르게 유비하며 어떠한 ‘교훈’이나 ‘지혜’를 구하려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국제 관계에 전문성을 갖춘 인재 양성”을 목표로 하는 모 국제중학교의 초대 면접고사가 병자호란 당시의 척화파와 주화파 중 한 쪽을 고르라는 것이었다는 사실은 그 점에서 퍽 시사적이다.
병자호란을 둘러싼 논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역사학자 구범진이 문제 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병자호란 해석과 평가의 ‘과잉’이다. 사건의 엄청난 임팩트야 부정할 수 없지만, 이로 인해 정작 그 ‘진상’을 파악하려는 노력엔 소홀했다는 것이다. 그의 책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은 아주 오래 전 역사학에서 폐기된 줄 알았던 ‘진실 탐구’가 여전히 유효한 가치임을 보여주는 흔치않은 역작이다. (물론 이건 내가 ‘이야기로서의 역사’를 중시하는 학교에 다녀서, 혹은 그런 선생님들께 배운 탓이겠지만) 한문에 만주어 사료는 물론, 첨단 과학기술까지 동원하여 끝끝내 ‘진실’을 포획하는 저자의 치밀함을 보노라면 “서울대 동양사학과란 이런 것인가!”하는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다. 문장도 구성도 엉망진창이라 도저히 재밌게 읽어주기 어려웠던 저자의 초기작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을 생각하면 격세지감이라 할 만한 단정한 문장과 정연한 논리, 탄탄한 구성 역시 인상적이다.
구범진의 『병자호란, 홍타이지의 전쟁』
(여담이지만, 지금은 중국 근세사 연구자로 유명한 구범진의 박사논문 주제가 근대전환기에 해당하는 청말 북양신정(北洋新政)이었다는 사실은 퍽 흥미롭다. 반대로 대만사 연구의 권위자인 문명기는 역시 근대전환기 대만의 건성(建省)을 주제로 박사학위를 받았지만, 이후 일제의 대만 식민통치기 쪽에서 주목할 만한 성과를 남겼다. ‘근대전환기’로 박사를 받고 ‘근세’와 ‘근대’로 넘어간 두 연구자의 궤적이 서울대 동양사학과의 학풍과 어떠한 관련이 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우선 구범진은 병자호란의 책임을 오직 조선에서만 찾는 경향을 비판하며, 전쟁이란 어디까지나 ‘쌍방’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임을 강조한다. 다시 말해 조선의 교전국인 청의 의도와 이를 관철하기 위한 전략을 파악해야 비로소 전쟁의 ‘진상’을 밝힐 수 있다는 것이다. 아니, 저자에 따르면 청, 구체적으로 홍타이지는 병자호란의 ‘절반’ 정도가 아니라 ‘모든 것’이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링컨의 저 유명한 어록을 빌리자면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기 때문이다.
병자호란은 홍타이지의, 홍타이지에 의한, 홍타이지를 위한 전쟁이었다
오늘날의 이해와는 달리, 병자호란은 마음 놓고 명을 치기 위해 배후의 조선을 ‘정리’한 부수적인 사건 따위가 아니었다. 일단 정묘호란 때 만천하에 드러난 조선의 보잘것없는 군사력은 결코 청의 중국정복을 위협할 수준이 아니었다. 게다가 홍타이지는 조선을 치는데 뒤탈이 없게끔 먼저 명의 수도권 일대를 들쑤셔놓을 정도로 이 전쟁에 큰 의미를 부여했다. 이유는 단 하나, 조선이야말로 홍타이지의 칭제(稱帝)를 완성시켜줄 ‘인피니티 스톤’이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홍타이지의 '인피니티 스톤'이었다
병자년 4월 11일, 홍타이지는 심양(瀋陽)에서 성대한 황제 즉위식을 거행했다. 중원을 차지하지도 못했으면서 감히 천자를 자부할 수 있었던 근거는 세 가지였으니, 첫째가 몽고 통일이요, 둘째가 칭기즈칸의 옥새 획득이며, 셋째가 조선 정복이었다. 문제는 첫째, 둘째 이유와 달리 세 번째 이유는 순전히 홍타이지의 몽상에 불과했다는 사실이다. 조선에게 정묘년의 형제맹약은 당연히 칭신(稱臣)과는 별개였고, 얼떨결에 황제 즉위식에 불려나온 조선 사신 나덕헌과 이확은 목숨을 걸고 홍타이지에 대한 배례(拜禮)를 거부한다. 기껏 공들여 준비한 이벤트의 흥이 다 깨져버린데 분노한 홍타이지는 그 책임을 조선에 돌린다. 병자호란은 청이 조선의 오만방자함을 참다 참다 끝내 ‘참교육’에 나선 결과라는 일각의 이해는, 따라서 완전히 틀린 것이라 하겠다.
홍타이지는 결코 부처가 아니었다
이처럼 조선을 굴복시켜 신하로 두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했던 만큼, 홍타이지는 온 병력을 끌어모아 친히 원정에 나섰다. 가히 근대의 총력전에 비교될법한 위세였으나, 그 규모는 근래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여지는 ‘12만 8000명’에는 크게 미치지 못했다. 당시 청의 인구와 가용 병력을 고려했을 때, 조선정벌에 동원된 군대는 많아야 3만 4000명 정도였으리라는 게 저자의 추측이다. 수백만 단위를 우습게 넘나드는 ‘삼국지 스케일’에 익숙한 독자라면 “애걔?”하고 실망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송도 고려도 아닌, 같은 유목민인 거란인 입에서 그 수가 1만이 넘으면 당해낼 자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막강했던 ‘전투종족’이 바로 이들이었다. 3만이란 숫자는 능히 한 나라를 멸망시킬 수 있는, 실로 무시무시한 규모였으리라.
물론 조선이라고 가만있지는 않았다. 평지에서 청의 강력한 기병을 맞닥뜨릴 경우 승산이 없다는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었던 조선 조정은, 유사시 관민이 산성에 들어가 농성하며 적의 진을 빼놓는다는 산성 입보(入保)전략을 세워놓은 상태였다. 뿐만 아니라 평안도의 안주와 영변에 일차 방어선을, 황해도의 황주와 평산에 이차 방어선을 구축함으로써 한 쪽이 청군의 공격에 노출될 경우 다른 한 쪽이 원군을 보낼 수 있는 역삼각형(▽) 방어지대를 형성했다.
조선은 역삼각형 방어지대를 형성했다
이 모든 건 청군과 맞서 승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진격속도를 최대한 늦춤으로써 조정이 강화도로 파천할 시간을 벌기 위한 전략이었다. 수전(水戰)에 약한 유목민족에겐 난공불락의 요새인 강화도로 들어만 간다면 전쟁은 지구전으로 흐를 수밖에 없고, 결국 제풀에 지친 청군이 알아서 철수하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강화도 농성의 효용은 멀게는 고려의 대몽항쟁, 가까이는 정묘호란에서도 입증된 바 있으니 조선 조정의 대응은 꽤나 합리적이었던 셈이다.
조선은 나름대로 전쟁에 대비했다
하지만 청은 결코 조선이 바라는 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최대한 빨리 왕을 사로잡아 무릎을 꿇리는 게 목적이었던 만큼 청군은 조선의 주요 방어거점을 내버려둔 채 한성으로 쾌속 진군했다. 여기에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이 작전대로 관민을 이끌고 산성에 틀어박혔기 때문에 청군 입장에선 그야말로 톨게이트가 열린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두고 광해군은 청군이 곧장 수도로 쳐들어오는 상황 역시 염두하고 있었는데 인조는 왜 그러지 못했느냐며 책망하는 목소리도 있지만, 두 왕 사이에 정묘호란이 놓여 있다는 사실을 유념해야 한다. 다시 말해 아직 청군의 직접적인 침략을 마주한 적이 없었던 광해군은 모든 가능성을 열어둘 수 있었던 반면, 서북 각지를 들쑤신 정묘호란을 겪은 인조는 다음 침략 역시 꼭 그렇게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과거의 교훈을 너무나 충실히 되새긴 나머지 상상력이 구속된 결과다.
광해군이 현명하고 인조가 어리석은 게 아니다
게다가 청군은 그저 빠르게 내달리기만 한 게 아니었다. 정묘호란은 조선만큼이나 청에게도 중요한 교훈을 안겨줬다. 일단 조선 조정이 강화도에 들어가는 순간 전쟁은 자신들에게 매우 불리해질 뿐 아니라 여차하면 배후의 조선군에 역습을 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홍타이지는 ‘시차 진군 작전’과 ‘양로 병진 작전’을 구사했다. 쉽게 말해 청군을 둘로 나눠 각각 동쪽과 서쪽으로 진군케 했을 뿐 아니라, 그마저도 시차를 두고 전(前), 중(中), 후(後)로 움직이게 한 것이다.
청군은 재빠르게 한성을 향해 진격했다
홍타이지의 전략은 실로 효과적이었다. 압록강을 건넌지 6일 만에 한성에 당도한 로오사(Loosa)의 선봉대는 300명에 불과했고, 후속 부대는 아직 뒤따라오는 중이었음에도 조선은 이들을 3만여 명에 달하는 청군 본대로 착각하고 말았다. 그토록 엄청난 규모의 군대가 역시 엄청난 속도로 진군하고 있다는 패닉에 휩싸인 결과, 조정은 한성을 뜰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고작해야 남한산성에 틀어박히고 말았다. 비록 국왕을 한성에 가둔다는 본래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지만, 홍타이지는 아주 적은 수의 병력으로도 조선 조정을 지레 겁먹게 만들어 강화도로 파천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다. 게다가 청군이 병력을 쪼개어 시차를 두고 이동했던 만큼 평안도와 황해도의 조선군은 청군의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언제쯤 다 진군할지 파악할 수 없었고, 그 결과 근왕(勤王)을 위해 섣부르게 남하하지 못했다.
양로 병진 작전 역시 조선군의 허를 찔렀다. 앞서 설명했듯 조선군은 역삼각형으로 전력을 배치하고 한 쪽이 공격받을 경우 다른 쪽이 구원에 나선다는 전략이었는데, 청군이 양쪽으로 진군함으로써 발이 묶여버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늘날 지지리도 욕을 먹는) 도원수 김자점은 뒤늦게나마 청군이 통과한 서쪽 대신 동쪽 루트를 통해 남한산성으로 향했는데, 하필이면 토산에서 청의 동로군을 만나 궤멸적인 피해를 입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겠으나, 결과적으로 홍타이지는 조선의 모든 대응을 철저히 무력화시킨 셈이다. 이윽고 남부 4도에서 올라온 근왕군마저 모조리 청군에 격파되었고, 남한산성에 갇힌 인조는 그야말로 고립무원의 상황에 놓였다.
오늘날 병자호란의 '원흉'으로 매도되는 김자점
하지만 비록 독 안에 든 쥐와 같은 신세일지언정 인조에겐 마지막 믿는 구석이 있었으니, 바로 강화도로 피신한 봉림대군(훗날의 효종)이었다. 강력한 수군이 지키고 있는 천혜의 요새인 강화도가 뚫리지 않는 한 끝까지 항전을 이어갈 심산이었던 것이다. 인조의 이러한 희망은, 그러나 청군이 강화도마저 손쉽게 접수해버림으로써 끝내 사그라지고 만다. 원정군답지 않게 강화도의 지형과 자연조건을 십분 활용한 결과였다.
정축년 정월 22일(1637년 2월 16일) 오전 10시 30분, 강화도와 김포 사이를 흐르는 염하수로의 조류가 밀물에서 썰물로 바뀌었고, 방향 역시 북에서 남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마치 이를 이미 알고 있던 것처럼 김포 북쪽 갑곶에서 대기하던 청군은 흥룡강에서 쓰이던 작고 날렵한 배에 올라 조류를 타고 손쉽게 강화도에 상륙했다. 만일 청군이 상륙할 경우 유빙이 어는 갑곶을 택할 리는 없다고 여겨 강화도 남쪽의 광성보를 지키고 있던 강도유수(江都留守) 장신의 함대는 뒤늦게 사태를 파악했으나, 조류의 방향도 방향이고 무엇보다 수심이 너무 얕아 북상하지 못했다. 조선의 ‘무적함대’가 할 수 있었던 건 그저 청군의 도해를 무력하게 바라보는 일뿐이었다. 저자는 청군이 이토록 기상천외한 작전을 성공시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에 귀화해 어업에 종사하던 여진인인 향화호인(向化胡人)들이 정보를 제공한 덕분이라고 추측한다.
청군은 손쉽게 강화도를 접수했다
마지막 보루인 강화도마저 함락되고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힌 상황에서 이제 인조가 고를 수 있는 선택지는 단 하나, 무조건적인 항복과 자비를 베풀어달란 간청뿐이었다. 반면 남한산성을 손아귀에 넣은 홍타이지는 실제 역사처럼 조선국왕의 칭신은 물론이요 조선의 괴뢰국화와 직할화(直轄化)까지, 그야말로 원하는 건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저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조선국왕은 알아서 기어나올 터였고, 실제로 홍타이지의 태도는 더할 나위 없이 느긋했다.
그러나 정축년 정월 16일을 기점으로 청의 태도가 일변하기 시작한다. 조선에게 빨리 강화협상에 임하라고 다그치는 것은 물론 일단 출성만 하면 인조의 신변을 보장하겠다는 언질도 주는 등, 홍타이지는 승자답지 않게 몸이 달아 있었다. 이러한 급작스러운 태도 변화의 이유를, 저자는 당시 조선에서 유행하던 천연두(마마)에서 찾는다. 천연두에 대한 면역이 없는 생신(生身)이었던 홍타이지는 부대 내에 마마가 창궐했다는 소식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본래 2월 20일로 계획되어 있었던 강화도 점령이 정월 22일로 급히 당겨진 점이나, 훗날 홍타이지가 자신이 마마를 피해 조기 귀국했다고(避痘先歸) 지나가듯 언급한 것이 그 증거다. 조선을 멸망의 위기에서 구해낸 건 김상헌의 절개도 최명길의 기지도 아닌, 마마라는 전염병이었던 셈이다.
청에게 천연두는 공포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마마로 인해 급히 조선을 뜰 수밖에 없었지만 홍타이지는 자신이 원하던 바는 확실히 이루었으니, 바로 황제 즉위식의 ‘완성’이었다. 실제로 삼전도에서 거행된 의례는 일반적인 승전식과 달리 매우 엄숙하고 진지하게 치러졌으며, 대열을 벗어나거나 갑옷·투구를 풀고 있을 경우 지위여하를 막론하고 가차 없이 처벌받았다. 인조에 대한 예우 역시 패자답지 않게 극진했는데, 이는 그를 일국의 군주로 자리매김해야만 홍타이지 본인이 명실상부 황제의 자리에 오를 수 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삼전도 의례는 조선의 거부로 ‘미완’에 그친 황제 즉위식의 ‘완성’이었다. 그야말로 수미가 상응하는, 모든 것이 홍타이지의 의도대로 돌아간 완벽한 ‘작품’이라 아니할 수 없다.
심양 고궁에서 '미완'으로 끝난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식은 삼전도에서 '완성'되었다
텍스트 요약이나 발제문이 아닌, 어디까지나 ‘서평’인만큼 과감한 압축과 생략을 거듭했지만, (그럼에도 분량이 이렇게나 많은 건 전적으로 서평가의 능력부족 탓이다) 사실 책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소한 날짜 하나도 온갖 사료를 교차검증한 뒤에야 조심스레 확정짓는 저자의 치밀함과 꼼꼼함이다. 혹자는 이를 두고 요즘 같은 시대 ‘진실’을 밝혀내는 게 무슨 의미가 있냐며, 그래봐야 결국 병자호란은 조선이 청에게 압도적으로 패배한 전쟁이 아니냐며 비아냥댈 수도 있겠다. (일단 나부터가 그런 생각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팩트’는 생각보다 힘이 세다. 의미 없는 논쟁에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을 막아줄 뿐 아니라, 보다 나은 논의로 나아가게 해주는 디딤돌이 되어주기 때문이다.
가령 구범진은 작은 팩트 하나하나를 촘촘히 쌓아간 끝에, 병자호란이 청의 중국정복에 딸려온 부수적인 ‘이벤트’ 따위가 아니라 그 자체로 매우 중요한 ‘사건’임을 밝혀냈다. 병자호란의 의의를 과소평가해온 영어권 학계는 물론이고, 그것이 조선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에만 몰두해온 한국 학계에서도 지금껏 나오지 못한 새로운 ‘해석’이다. 이러한 ‘해석’은 자연히 청이 구축한 새로운 국제질서 속에서 조선이 어떠한 위치에 있었는가에 대한 새로운 ‘통찰’을 제공한다. 실제로 저자는 일찍이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에서 청에게 조선은 류큐나 베트남처럼 명의 멸망으로 자연스레 접수한 ‘유산’이 아니라(동남 초승달 지대) 몽골과 티베트처럼 전쟁을 통해 획득한 ‘전리품’이었고(서북 초승달 지대), 이로 인해 여타 조공국에 비해 높은 지위를 점할 수 있다고 주장한 바 있다.
서북초승달지대와 동남초승달지대
나아가 병자호란이 청의 중국정복과는 별개의 자기완결적인 사건이었다면, 우리는 ‘중원’과는 상관없이 유목세계만으로 이루어진 ‘천하’와 그 속의 조선을 상상해볼 수도 있다. 당시 그 누구도 명이 그토록 허망하게 무너지리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만큼, 어쩌면 홍타이지는 ‘중원’ 정복은 먼 미래의 일로 제쳐두고 조선의 칭신으로 ‘완성’되는 독자적인 천하를 구상했을 수도 있다는 이야기다.
청과 준가르의 전쟁
그렇다면 ‘중원 없는 천하’ 혹은 ‘유목세계의 천하’는 어떻게 굴러갔을 것이며 남쪽에 위치한 ‘중원의 천하’와는 어떠한 관계를 맺었을 것인가? 그리고 유목과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해온 조선인들은 새로운 천하에서 스스로를 어떻게 자리매김하고 낯선 이웃들과 함께 살아갔을 것인가? 학문적으로는 무의미한 망상이겠지만, 소설이나 웹툰의 소재로는 더할 나위 없이 흥미로운 주제가 아닌가! 저자가 주춧돌을 놓은 병자호란에 대한 단단한 ‘팩트’를 딛고 피어날 보다 나은 논의,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만들어질 수많은 창작물이 기다려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