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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찬근 Apr 09. 2019

소라이학은 과연 '탈주자학'인가?

아라이 하쿠세키와 오규 소라이, 그리고 일본의 '유교화'

 에도시대 일본의 고학자 오규 소라이는 탈주자학 혹은 반주자학적 경향을 대표하는 인물로 이해되어 왔다. 대표적으로 전후 일본 학계의 ’텐노’라 불렸던 마루야마 마사오는, 소라이를 주자학의 유기적/통합적 사유를 깨부수고 인간행위(作爲)의 독자성을 발견한 ‘일본의 마키아벨리’라며 극찬을 마지않았다. 심지어 마루야마는 오규 소라이같은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일본이 근대화에 성공했던 반면, 중국은 소라이가 없었기 때문에 봉건사회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는 위험한(!) 이야기까지 서슴없이 꺼내기도 했다.


 하지만 마루야마의 제자인 와타나베 히로시는 오규 소라이와 그의 일파를 ‘주자학의 극복’이 아닌, ‘주자학의 일본적 변용’의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사실 나로서는 와타나베의 주장이 잘 와 닿지 않았다. 너무나 ‘모범적인’ 유교국가였던 조선의 역사에 익숙해서인지, 聖人이란 제도의 창시자라 일갈한 소라이의 주장이 굉장히 새롭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번 학기 도쿠가와 막부를 유교적 정통왕조로 탈바꿈시키고자 했던 아라이 하쿠세키에 대해 공부하며, 나는 비로소 와타나베의 이야기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아라이 하쿠세키는 6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노부의 侍講으로서 에도시대 유학자로는 전례 없는 권력을 휘둘렀다. 하쿠세키는 1711년 일본을 방문한 조선통신사와 아주 세련되고 우아한 필담을 나누었는데, 통신사가 일본은 칼과 조총을 장기로 삼지 않느냐고 질문하자 하쿠세키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반란의 적을 토벌하여 국내가 소강상태를 유지했으니, 그 일은 마치 제 환공(齊桓公)ㆍ진 문공(晉文公)의 공업에 상응하므로, 한 단계 더 올라서면 인후한 풍속이 될 것입니다. 용무(勇武)한 풍속을 숭상한 것은 (단순히 무력을 일삼는 게 아니라) 인자(仁者)의 용맹함이므로, 동방의 풍기(風氣)가 그렇게 만든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하쿠세키는 도쿠가와씨 이전 일본의 쇼군들이 무를 숭상한 것은 어진 자로써 용맹을 떨친 것뿐이라며 이들을 옹호하고 있다. 또한 그는 이전 쇼군들의 업적을 춘추전국시대의 覇者인 제 환공과 진 문공에 견주고 있다. 본래 유가전통에서 패자는 그리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함에도, 정통 주자학자였던 하쿠세키는 거리낌 없이 쇼군을 제 환공과 진 문공에 비유했던 것이다.


 覇라는 관점에서 이전 쇼군들의 업적을 높이 평가했다는 점에서, 주자학자인 하쿠세키는 고학파인 소라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차이가 있다면 하쿠세키는 도쿠가와씨가 이제는 覇者가 아닌 王者가 되어야 한다고 요구하는 반면, 소라이는 과거와 같이 패자로도 충분하다고 여긴다는 사실 뿐이다. 요컨대, 두 사람의 궁극적인 지향은 달랐을지언정 패자를 긍정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했던 것이다. 


 소라이야 그렇다 쳐도, 하쿠세키마저 유가전통의 ‘금기’를 깨고 패자를 긍정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1185년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가마쿠라 막부를 개창한 이래 하쿠세키와 소라이가 활동하던 18세기 초까지, 일본은 기본적으로 무인들이 지배하는 나라였다. 이러한 현실을 무시한 채 무턱대고 정통 주자학을 들이댄다면, 근 500년의 역사가 통째로 부정될 뿐 아니라 자칫하면 엄연한 무가정권인 도쿠가와 막부의 심기를 거스를 위험이 있었다. 자신의 목이 날아갈 수 있다는 현실적인 이유를 제쳐놓고서도, 도쿠가와 막부가 압도적인 무력과 엄격한 형벌만으로 일본에 전례 없는 평화와 번영을 가져다주었다는 사실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결국 유교적 정통왕조와는 거리가 먼 무가정권이 떡하니 버티고 있는데 이들의 통치가 꽤나 괜찮은 상황이라면, 유학자로서 이 무가정권을 覇者라는 이름으로 긍정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하지 않을까? 만약 소라이가 명나라나 조선의 유학자였다면, 인간 내면의 ‘도덕성’이 아닌 법과 규제를 통해 치세를 이루고자 했던 그의 생각은 분명 탈주자학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하지만 이미 覇道가 ‘디폴트 값’이었던 에도 중기의 일본에서, 소라이가 얼마나 독창적인 사상가였을지는 의문이 남는다. 도쿠가와 막부를 유교적 정통왕조로 등극시키려던 주자학자 하쿠세키도 일단은 이전의 쇼군들을 覇者로서 긍정해야 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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