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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Apr 11. 2024

왜 말을 못 해. 투표 도장 못 찍었다고.


"엄마 잘 찍어오세요~"


어제 4월 10일은 총선, 제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일이었다. 집 근처 투표소에 가기 위해 채비를 하는데 아이가 말한다. 한 번이 아니고 처음도 아니다. 며칠 전부터 좀 과장하면 귀에 딱지가 앉게 듣고 있다.


"꼭 찍어오셔야 돼요~"


좋은 후보를 잘 찍으란 말일까. 지역의 일꾼에게, 믿음직한 정당에게 소자를 대신하여 어머니의 소중한 한 표를 던져주십사 하는 말일까.

반장 선거에 이어 올해는 학교 회장 선거까지 경험한 고참이라고 고개가 제법 뻣뻣해진 6학년이긴 하지만, 초딩은 초딩이다. 호르몬의 변화가 시작된 십 대 소녀 안 그래도 기분이 들쭉날쭉한데, 선거 유세 때문에 시끄럽다 짜증 내면서도 저도 모르게 중독성 강한 선거송 멜로디를 콧노래로 흥얼거리는 초딩이다.


잘 찍어오시라는 아이의 신신당부는 실은 학교 숙제 때문이다. 요즘 대화로 미루어 사회와 정치와 역사를 제법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듯한데, 교과를 반영한 초6의 숙제는 이러했다.

'부모님이 투표를 꼭 하시도록 하기. 부모님의 투표를 인증하기. 어떻게? 손등에 투표 도장을 찍고 그 손등(!)과 나란히 사진 찍어 오기.'

 그러니 아이가 말하는 '찍어오세요'는 후보든 정당이든 알아서 찍으시고 엄마는 부디 도장을 잘 찍어 오시라는 거다.


사나흘 간을 그 말을 듣고 있자니 문득 의문이 들었다.


- 근데 말이야.

-?

- 꼭 도장을 찍어야 해?  

- 네.

- 투표소 앞에서 사진 찍으면 되잖아. 여기서 투표했다고.

- 안 돼요. 손등에다가 도장 찍어오는 게 숙제예요.

- , MZ들은 요즘 뭐더라, 인증용지? 귀여운 캐릭터 그려진 종이 이런 거에 찍는다던데?

- ... 엄마는 MZ가 아니잖아요.

- 야아-! 엄마도 MZ거든? 이은경 선생님이 그랬거든? M이 뭔데, 나 밀레니엄 세대거든?!


하앍. 유치유치왕유치. 이상한 포인트에서 흥분하고 만 나 때문에 모녀의 대화는 당연히 그렇게 마무리되었다.(마무리된 거 맞냐.)




어쨌든 아이의 당부 인사를 받으며 투표소로 향했다.

근처 학교에 마련된 투표소로 걸어가는 길에 금세 마음이 몸글몽글해진다. 작은 하천가를 따라 벚꽃이 가득 피었다. 어머, 이 나무들이 언제 이렇게 자랐지. 작년이랑은 또 다르네. 키도 훅 크고 가지도 더 많이 쳐서 엄청 풍성해졌잖아. 세상에, 벚꽃 통통하게 핀 거 봐. 아유 신통해.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정비한 하천이라, 그 무렵 심어진 벚나무들이다. 쌍둥이를 낳고 이곳으로 이사 온 것도 그 시기이니 쌍둥이 나이와 벚나무들의 나이가 얼추 비슷한 셈이다. 작고 가냘팠던 아기 나무들이 이렇게 뿌리를 단단히 내리며 자리를 잡고, 가지를 치고, 화려하고도 어여쁘게 꽃을 피운 것을 보니 새삼 울컥한다. 십 년 동안 이토록 열심히도 자라고 있었구나.  계절마다 겪지만 아이들의 성장을 실감하는 순간 또한 익숙해지기는커녕 매번 놀랍다. 이번 봄에도-바로 엊그제에도- 다시 꺼내 입은 바지가 깡충 올라가 발목이 드러난 것을 보았다. 매년, 매 계절마다 이 말을 반복한다. "언제 이렇게 컸어~" 벚나무도 너희도 나름대로 자라느라 애썼구나. 신기하고 대견하고 고마운데, 왜인지 조금 서운하기도 한 마음이 슬며시 올라온다. 둔한 내가 웬일로 눈치채고는 이것만큼은 얼른 접어두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0 투표소 ->'라고 쓰인 표식이 바로 보인다.

목적지를 알고 가더라도 안내 표지가 있으면 세상 그렇게 안심이 될 수가 없다. 나 역시 선거 때마다 수 번을 했던 일인데 오늘은 순전히 주민의 위치에서 서비스를 받으니 느낌이 다르다. 내가 하는 일이 지역에, 사회에, 주민에게 어떤 의미인지가 이렇게 와닿는다. 역지사지. 입장 바꿔 생각을 하고, 더하여는 반대편의 자리에 있어봐야, 겪여봐야만 깨닫곤 한다. 그 일이 지긋지긋하고 뛰쳐나가고만 싶어 의도적으로 벗어나 있는 지금, 이렇게 떨어져서야 그 일의 존재 이유와 의미가 와닿다니. 아이러니하다, 인생은 왜 이리 자꾸  사람을 깨닫게 하는 거야. 자꾸만 새롭게시리.   


인생의 아이러니와 깨달음을 얻는 사이, 투표는 순조롭게 끝났다. 한가한 시간대라 그런지 금방이네. 투표 부스 안에서만 좀 걸렸지. 그 ~~~~~~다란 투표용지를 보며 '뭔 정당이 이리 많댜' 놀랐고, 처음 보는 당명이 대부분인데 이름이 재밌기도  한 번 훑느라 걸렸지, 도장이야 금방 찍었...

?

도장!

워매!!

현관을 나서다 멈춰 서서 외마디 소리를 지르는 나 때문에 마주 들어오던 아주머니가 놀라 쳐다본다.

.. 나야...

어떻게 그걸 잊냐.


아이는 본능적으로 알았던 것이다. 엄마가 이러리라는 것을. 그래서 그렇게, 말하고 또 말하고, 협박... 아니 당부하고. 기억력에 있어서만큼은(있어서만큼은? 오, 부디.) 아이에게 신뢰를 주지 못했구나 싶어-비록 알고 있지만- 불안했을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해졌다. 머쓱한 마음에 투표소 앞 안내표지를 괜히 찍어 보지만 홀가분해지지는 않는다. 휴. 다시 들어갈 수도 없고 이걸 어쩐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리며 어쨌든 집으로 무겁게 걸음을 옮겼다.





"다녀오셨어요."

집에 들어선 내게 아이는 인사를 한다. 인사와는 별개의 물음표를 담은 얼굴로 나를 쳐다본다.

"안 돼요. 손등에다가 도장 찍어오는 게 숙제예요." "안 돼요." "안 돼요"......

세상 단호했던 그녀의 말투가 머릿속에 반복 재생된다.

일명 'FM' 성향의 그녀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책에서 그러려면 딱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비단 그녀뿐일까. 선생님 말씀 잘 듣고, 쓰레기 버리지 않고, 담배 피우면 나쁜 어른인 줄 아는 '곧이곧대로'라는 어린이만의 특성을 나는  무척 귀히 생각한다. 더 자라고 많은 경험을 할수록 세상에 예외가 많음을 알게 되지만, 예외와 잘못을 혼동해 그른 행동이 되기도 하는 모습을 우리는 안다. 선생님 말씀, 책의 교훈, 공중도덕 등이 가르치는 '기본'이 전부인 줄 아는 어린이가 좋다. 그래서 나는 그 '곧이곧대로'를 최대한 오래 지켜주고 싶다.

손등에 도장을 찍어오지 못했다는, 그 말을 차마 꺼내지 못한 이유다.


내 거친 생각과 불안한 눈빛과 그걸 지켜보는 너를 더는 마주 보지 못하고 안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화장실이 급했지 뭐야..."

혼잣말처럼 중얼중얼하며 급하게 들어왔다. 빨간 펜을 집어 들고 손등에 그리기 시작했다. 선거 근무하면서 수도 없이 본 투표도장이다. 모양, 크기 등 진짜와 똑같이 그리는 건 일도 아니다. 마음이 바른 사람이라 동그라미도 깰꼼하게 한 방에 그려졌다. 꽤나 흡족했다. 역시. 버릴 경험은 없다, 는 진리가 떠오르는 순간이다.  

  

손을 내밀고 스치듯 보여주니 아이의 표정이 밝다. 얼른 인증하자고 휴대폰을 들이민다. 괜히 찔리는 나는 수전증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발발 떨어 자체 '뿌옇게'효과를 연출한다.

속 모르는 딸은 "엄마, 흔들렸어요. 다시." 계속 다시 찍잖다.

하. 나 떳떳한데 왜 이렇게 쫄리냐. 나 투표했는데~ 막 억울해지려는 찰나. 잠깐. 알았다. 나 지금 쫄리는 건 짝퉁 도장 때문이 아니다. 아이에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서잖아. 당당한데 당당하지 못하고 이러고 있는 이유를 알아챘다.

 

"맹구야. 엄마 이러저러했는데 그래서 그렸어. 이거 엄마가 그린 거야."


아이는 상황을 이해하느라 잠시 내 얼굴을 가만 보고 있다. 그러더니 다시 손등의 작품을 보고는 말한다.


"대박. 엄마, 똑같애~!"


짱 잘 그렸다고 난리다.






내가 알고 있는 대로, 배운 대로 해야 한다는, 그녀의 신념에 금이 갔을지는 모르겠다. 그걸 지켜주고파서 한 나의 행동이 아이의 그것을 깬 것일 수도 있다. 이 또한 아이러니네.

하지만 아이에게 솔직히 털어놓고 나니, 생겼을지 모르는 조금의 흠집이 의외로 그리 두렵지 않아졌다. 되려 속이 시원하다. 깜빡깜빡하고 툭하면 산으로 가는 이 엄마는 앞으로도 딱히 나아지지 않겠지만, 오늘 엄마의 짝퉁 도장이 '거짓'보다는 '사랑'으로 그녀에게 남기를 바랄 뿐이다. 이게 진짜 변하지 않는 신념이라고.


그리고 엄마가 대박 잘 그린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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