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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들 Apr 09. 2024

내 자유의지가 밥 먹여주길

<오, 윌리엄!>을 읽고

"선택이라고, 루시? 사람이 살면서 정말로 뭔가를 선택하는 일이 몇 번이나 될까?"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 건 -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 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오, 자유의지 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워."

"우리는 그냥 해-그냥 한다고, 루시."


독서모임 '글쓰담'의 이번 주 발제 도서는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오, 윌리엄!>이었다.

위에 인용한 문장들은 책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이다. 윌리엄의 말에 멈추어 오래 생각했다. 요즘 매일 하는 필사 인증을 이 부분으로 하기도 했다. 다 읽고 나서 발제문을 확인했을 때 역시나 이 내용이 포함되어 있어 흥미로웠다.

발제자인 'ㄱ' 작가님은 책 뒷부분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여 발제하였는데 다음과 같다.

이 소설에서 가장 솔깃했던 루시와 윌리엄의 대화는 선택과, 책임, 자유의지에 대한 윌리엄의 의견이었다. 선택과 자유의지에 대해서는 개인적으로 윌리엄의 생각에 거의 동의하는데, 독자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궁금하다. "나는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 건 -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 그런 경우가 아니면 우린 그저 뭔가를 쫓아갈 뿐이야-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그걸 따라가, 루시." 우리에게 순수한 자유의지란 정말 있는가?



살아가는 것은 수없는 선택의 연속이다. 그 선택들의 결과로 지금의 내 자리, 내 모습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그 선택이 순수한 내 자유 의지인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주제다.  

윌리엄은 -옮긴이도- 사람이 실제로 선택하는 것은 아주 가끔일 뿐, 그저 뭔가를-심지어 그게 뭔지도 모르면서- 쫓아갈 뿐이라고 말한다.


나의 생각은 윌리엄의 그것과 달랐다.

나는 윌리엄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 그의 배경으로부터 왔다고 보았다. 비록 그의 엄마는 -나중에 밝혀져 모두(아들과 루시와 독자)를 놀라게 하듯- 루시보다도 더 열악한 환경 출신이지만 그의 아들 윌리엄은 태어날 때부터 풍족한 가정에서 어려움 없이 살아왔다. 성장해서도 사회적으로 대우받는 직업을 가졌다. 어이없을 정도로 여러 차례 바람을 피우는 것도 그 풍족하고 번듯한 배경 덕이 아니라 할 수는 없다. 소설 속에서 나타나는 그의 언행이나 행동으로 미루어 특별히 독립적이라든지 주체적인 인생을 살아온 사람으로 비치지 않는다. 윌리엄처럼 이렇게 굴곡이라는 것이 없이 살아온 사람들은 거대한 파도를 거스를 만한 선택을 할 일이 상대적으로 적을 것이다. 윌리엄이 '선택과 자유의지'를 믿지 못하는 태도도 그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환경을 볼 때 자연스러운 결과라고 보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자유의지 같은 개소리는 집어치우라는' 윌리엄의 강한 어조와는 반대로 루시는 이에 대해 딱히 의견을 내지 않는다. 그렇다면 루시의 성장 배경이나 삶의 환경은 어떠한가. 윌리엄과는 거의 정반대라 할 수 있겠다. 그녀는 가난한 집안에서 부모로부터는 무관심과 차가움, 이웃에게는 배척당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태어나고 자아가 형성되는 시기 내내, 무려 이십 년을 그렇게 보냈다. 그런 집에서 루시는 유일하게 대학에 진학했다. 절로 되었을 리 만무하다. 그곳을 벗어나기 위해 루시가 얼마나 노력하고 인내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아니 감히 짐작할 수 없다. 

소설에는 그려지지 않은 어린 학생 루시를 떠올려본다. 어떻게든 스스로 살 길을 마련해야 했다. 여기서 살 길이라는 것은 이 집에서, 이 동네에서 벗어나는 일이었을 터다. 책을 파고 공부에 매진하는 것이 루시가 택한 방향이었고, 나중에 작가가, 그것도 저명한 작가가 된 것으로 보아 어쩌면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것을 본능적으로 찾았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어떠한 지원도 응원도 기대할 수 없는 환경에서 -오히려 비웃음이나 얻었을지 모른다- 어린 루시는 누구보다 노력했고 결국 대학에 입학하며 그 집과 마을에서 나온다.(입학하는 날마저 루시의 부모는 집을 떠나는 딸에게 관심도 없다. (오 루시!) 루시가 스스로 이룬 첫 번째 성과다. 

이게 자유의지가 아니고 무엇일까. '심지어 그게 무언지도 모르고 쫓아가'ㄴ다는 윌리엄의 말과는 상반되게 루시의 순수한 자유의지에 의한 선택이다. 루시의 자유의지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이후 루시는 작가로 명성을 얻는다. 하. 이것에 대해서야 말해 무엇하리. 아니지, 오히려 할 말이 많다.

여기 키보드 앞 '브런치 작가'는 지금 글 한 편의 발행도 버겁다. 책 출간이야 누구나의 꿈이지만 그렇게 되기까지의 길-꾸준히 쓰기, 많이 읽기, 결국 잘 쓰기-이 어어어-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매일매일, 하루에도 여러 번 절절하게 실감하고 있는 바다. 루시는 여러 편의 책을 출간했을 뿐 아니라 시골 도서관에서도 알아보는 유명한 작가가 되었다. 가난한 집의 어린 루시가 미래를 위해 이를 악물고 했을 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한 노력이 들어갔음은 그 과정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꾸준히 글을 쓰고 작가로서 그만한 위치에 오른다는 것은 본인의 선택과 순수한 자유의지가 아니고서야 결코 가능한 일이 아니다. 이건 '브런치 작가'도 안다. (잠깐 눈물 좀 훔치고...)


이뿐이랴. 루시는 남편 윌리엄의 망할 바람기 때문에 이혼을 한다. 이후 데이빗이라는 남자와 재혼하지만 윌리엄과의 사이에서 낳은 두 딸과는 계속해서 좋은 모녀 관계를 이어간다. 게다가 루시는 딸들에게 이혼 사유를 솔직히 밝히지 않는다. 그래서인지 두 딸과 아빠 윌리엄의 사이도 좋은데, 나는 이것을 루시의 선택이라 여긴다. 자신은 가져보지 못한 따뜻한 가정에 대한 로망에서 비롯된. 루시는 엄마에게 사랑한다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하고 성장했다. 중년이 된 지금도 상상 속에서 엄마를 만들어내고, 그 엄마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만들어낸 엄마와의 대화는 물론 따뜻하다- 그것이 루시가 평생 원했던 엄마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루시는 이혼 후에도 여전히 두 딸에게 친근하고 기댈 수 있는 엄마다. 그러기를 애쓴다(고 느꼈다). 또한 아이들에게 아빠의 존재도 그러기를 바랐던 것 같다. 통상적으로 이혼의 과정에서 그 사유를 알게 될 수 있는데 끝까지 아이들이 모른 것에서 루시가 얼마나 그것을 지키려 애썼는지가 보이는 듯하다. 따뜻한 부모의 부재가 자신에게 -지금까지도- 얼마나 상처가 되었으며, 내 아이들에게는 결코 그 결핍을 물려주지 않으려는 의지가 얼마나 강했는지를.






작년에 선풍적인 인기를 얻은 캐럴 드웩의 <마인드셋>이라는 책이 떠오른다. 

이 책은 우리의 인생이 ‘자신의 재능과 능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얼마나 큰 영향을 받는지를 말한다. 언뜻 봐서는 <오, 윌리엄!>의 선택과 자유의지와 무슨 관계가 있나 싶지만, 윌리엄과 루시 생각을 하다 보니 내 머릿속에서 이렇게 연결이 지어졌다. 

책에서는 마인드 셋을 크게 두 가지로 분류한다. '고정 마인드셋'과 '성장 마인드셋'이다. 

'고정 마인드셋'은 능력은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 것인데, 바로 윌리엄이 이 마인드를 가졌으리라 예상한다. 윌리엄(뿐 아니라 그와 같은 사람들)은 원래 가진 것이 풍족하므로 굳이 자신의 환경을 전복시킬 만큼의 뜨거운 자유 의지를 가질 필요가 굳이는 없을 가능성이 크다. 물론 풍요롭게 태어난 사람만이 여기에 해당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비관적인 환경에 있는 사람이라고 모두가 의지를 가지고 열심히 사는 것은 아니니까. 

그런 면에서 루시가 자신의 처지에 그저 좌절하고만 있지 않고, 소위 말하는 나쁜 길로 빠지지 않고 스스로를 꺼내기 위해 애쓴 것이 무척이나 다행이고 고맙기까지 한 -아이를 가진 엄마 입장에서 꽤나 이입하게 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바로 루시의 이런 점이 '성장 마인드셋'을 가졌다고 보는 점이다. '성장 마인드셋'은 능력은 얼마든지 발전시킬 수 있다고 믿는 태도다. 물론 루시가 처음부터 '능력을 발전시킬 수 있다는 마음가짐씩이나' 가진 것은 아닐 거다. 지긋지긋한 여기를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에 가까웠을지 모른다. 하지만 결국 노력에 대한 결과로 원하던 바를 이루었고, 이후로도 바닥으로부터 시작해 하나씩 결실을 보면서 그런 마인드셋이 형성되었을 것이다.  

위축되었던 소녀가 '기쁨에 찬'-윌리엄이 그녀에게 반한 이유라고 말한- 여인으로 성장한 것은 본인의 순수한 자유의지와 선택이 반복되면서 자신감과 여유가 쌓인 덕이라 믿는다. 

이런 생각으로 "사람이 뭔가를 실제로 선택하는 건 -기껏해야-아주 가끔이라고 생각해."라는 윌리엄의 말에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이상이 발제에 대한 나의 의견이었다. 






독서 모임 참석자들이 돌아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중, 귀와 마음이 훅 끌린 의견이 나왔다. 

의견을 낸 'ㅈ' 작가님은 자신이 겪은 일화를 예로 들었다. 그녀는 최근 퇴직과 이직을 번갈아 경험했고 각각의 다른 이유로 마음이 상하기도,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그때 남편으로부터 '당신이 선택한 일에 뭘 그리 힘들어하냐'는 반응이 돌아왔고, 그녀가 화가 나 한 대답은 이랬다.

"당신은 이게 다 내가 선택한 거라고 생각해?"


듣는 순간 번쩍 했다. 내가 이미 발표를 한 상태였고 나의 의견과는 어쩌면 상반된 셈이었는데도, 완전히 수긍했다. 

그녀가 자신의 일터를 직접 고르고 후에 그만두고 한 것은 '선택'이 맞다. 그러나 이때의 선택이라는 것은 몹시 폭이 좁다. 워킹'맘'이 '워킹'을 한다는 것 자체가 제한적이니까. 워킹맘에게 '아이들 케어'는 당연히 고려 대상 중 우선순위다. 그러려면 업무 시간이 한정적이다. 아직 아이들은 보살핌이 필요한 나이이니 직장과 집과의 거리도 너무 멀지 않아야 한다. 아이들이 커갈수록 돈도 많이 들어간다. 적당한 급여를 따지지 않을 수 없다. 

다른 집 사례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나 역시 그러하니. 



15년 차 직장인이자 육아 휴직의 끄트머리를 보내고 있는 나는, 내 안에 도사린 꿈을 꾸면서도, 잘 때는 복직하는 악몽을 꾸며 보낸 지 2년 여가 되었다. 다른 의미의 꿈들로 속 썩으면서도 단호한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이 결정을 내릴 이유보다 훨씬 다양하고 불쌍하고 못됐기 때문이다. 


어쨌든 현실에서는, 꿈과 설렘은 퇴직의 타당한 사유가 되지 못한다. 터무니없이 부족하고 이상적이다. 그래. 나는 세 아이의 엄마지. 남편 혼자 벌이로는 감당하기 어렵.. 여기까지만 하겠다 


내가 기계적이나마 이렇게 말하는 것이, 꾸준히 반대하고 설득하는 주변의 생각과 말이 내게 주입되고 있기 때문인지, 그러니까 그 뭐라더라, 가스라이팅 비슷한 걸 충실히 당해온 결과인지, 아니면 다행히도 슬슬 정신을 차린 이상주의자가 '드디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게 된 것인지, 헷갈린다. 


아무튼 이런 고민으로 괴로움을 겪고 있는 상황 자체가, 순수한 자유의지를 펼칠 수 없는 환경 때문이 아닌가. 주변인과, 상황과, 내 지위 등에 눈치 보느라 내 자유의지를 결국 억누르는 선택을 하게 될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이런 경우가 바로 '자유의지 같은 개소리' 아니겠는가. 지금으로서는 가능성이 아주 높아 보이는 이 경우(라도) 나는 그 제한된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을 어떻게든 찾으며 말이다. 지금까지 그래왔듯이. 



다만, 아직 인생 끝난 거 아니다. 나는 성장형 마인드셋 쪽이라고 자부하는 사람이다. -너무 원석이라 그런가 여즉 드러나지 않는- 나의 능력을 끝까지 캐고 닦아 발전시킬 수 있다고 여전히 믿는다. 비록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는 박차고 나와-분명한 건 정년 전일 거다.(제발!)- 다른 인생을 펼칠 꿈을 결코 포기하지 않을 예정이다. 루시가 그녀 자신의 자유의지로 기쁨에 찬 사람이 되었듯이, -제한된 선택이든 아니든- 결국 나의 순수한 자유의지가 나 밥 좀 먹여주게 부디 굳건하고 싶다.


아무래도 윌리엄 보다는 루시 쪽이 내 스타일이지. 암만.




*사진 출처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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