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S

친구들의 도움으로 학교를 잘 다닐 수 있었다

by 삼치

<부고>

ㅇㅇ 병원 장례식장. S님의 부친 손ㅇㅇ님께서 별세하셨기에 삼가 알려드립니다.


2025년 6월 21일 토요일, 오후 3시 30분. 밀린 원고 두 개를 쓰려고 노트북을 켜자마자 카톡이 왔다.


S는 나의 중학교 친구다. 일주일 전에 만났을 때만 해도 아버지가 아프다는 말은 없었는데 갑자기 무슨 일이람? 마감이 코 앞인 원고 때문에 마음은 좌불안석이다. 친한 친구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데 어떻게 안 가 볼 수가 있나. 주섬주섬 검은색 옷을 꺼내 다렸다.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임종을 접하고 부고장을 보내는 이의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50대 중반이 되니 부모님 상을 알리는 부고가 종종 온다. 나에게도 곧 닥칠 일이지만 최소 10년 안에는 그 일이 안 왔으면 좋겠다.


장례식장에는 검은 상복을 입은 친구와 친구의 남편, 친구의 동생들이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향을 꼽고 아버님께 절하고 상주와 맞절을 했다. 어릴 때 본 친구의 동생들은 몇 십년만에 봐서인지 반가움이 컸다. 모두 나를 기억하고 있었다. "언니는 하나도 안 변했네."라며 웃었다. 30년이란 세월이 훌쩍 지나고 만나서 "그때랑 똑같다"라는 말을 듣는 건 천번을 들어도 싫지 않다. 그렇다고 슬픈 기운이 도는 장례식장에서 기분 좋은 얼굴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 적당히 숨기고 '예'를 갖췄다.


초등학교 5학년 때 갑자기 청력이 안 좋아진 나는 어리둥절하기를 잠시, 곧 6학년이 되었다. 당시에 아버지는 이혼을 하고 홀로 4남매를 키워야만 했던 상황. 홀로 자식 네 명을 키우는 게 쉬운 일인가. 아버지는 누나가 살고 있는 경기도 오산으로 이사를 가기로 결심 한다. 40년 전의 경기도 오산은 시골이었다. 아기였지만 시골 초등학교로 전학을 간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서울은 한 학년에 열반이 넘었는데 전학 간 오산의 초등학교에는 한 학년에 달랑 두반뿐이었다. 오산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1 학기까지 다녔다. 그리고 다시 서울로 이사를 왔다.


전학 간 학교는 서울의 한 대학교의 부속 여자중학교였다. 언덕배기 끝에 중학교와 고등학교가 나란히 있다. 중학교는 고등학교 보다 더 꼭대기에 있었다. 학교 한번 가려면 등산을 하는 것과 같은 난이도를 겪어야 했다. 쉬지 않고 한 번에 올라가기가 힘들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언덕길을 올라가다 반드시 한 번씩 쉬었다.


“학교가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있어? 다른 학교로 전학 가면 안 돼?”


키 작은 중학생 여자 아이는 아버지에게 투덜대며 언덕길을 올랐다.


학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수업을 듣는 게 힘들었다. 선생님의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봐야만 선생님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선생님은 교과서를 읽으면서 추가로 설명을 한다. 선생님이 “이건 시험에 꼭 나온다.”라고 하면 반드시 교과서에 적었다. 깨알 메모를 한다. 시험을 위한 대비책이다. 대부분의 내 짝꿍들은 내가 선생님의 설명을 못 듣는다는 걸 알고 '너도 얼른 적어'라며 자신만의 은밀한 메모를 보여주었다. 나는 베껴적기 바빴다.


아이들이 엎드려 메모를 할 때, 나는 선생님을 쳐다봐야 했다. 가끔 선생님 얼굴이 아닌 다른 곳으로 시선을 돌리면 맥락을 놓치기 일쑤다. 그럴 때 짝꿍에게 물었다.


“방금 선생님이 뭐라고 했어? 지금 말씀 하시는 것은 교과서 어디쯤이야?”


귀가 잘 안 들리는 걸 부끄러워 하거나 숨기지 않았다. 안 들리면 안 들린다고 말했고, 못 들었면 다시 말해달라고 했다. 정확한 워딩이 무엇이냐고 했고 궁금한 게 있으면 반드시 질문을 했다. 도대체 어디서 이런 배짱이 생겼는지 모르겠다. 배짱은 곧 '용기'와 '무모함'으로 진화(?)했다.


수업 중에 짝꿍에게 질문을 하면 나에게 답하느라 짝꿍도 선생님의 말씀을 놓칠 수 있다. 집중해서 수업을 듣고 있는데 누군가 옆에서 말을 걸면 짜증이 날 법도 하다. 그렇지만 중고교 때 나의 짝꿍들은 한번도 내 질문에 짜증 내지 않고 답해 주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점점 망나니(?)가 되어갔다. 착한 친구들 때문에 망나니가 되었다는 말로 들릴 수 있지만 그런 뜻은 아니다. 다만, 친절을 당연히 여긴 것은 아닐까 하는 미안함은 남아있다. 열심히 수업 듣고 있는 누군가 질문을 한다면 아마 나는 이렇게 말했을텐데 말이다.


“수업 끝나고 물어보면 안 되겠니?”


S는 중학교 때 내 짝꿍이었다. 늘 조용했다. 크지 않은 키에 마르지도 살 찌지도 않는 체격이었고, 잘 웃었다. 공부는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못하지도 않았다. 내가 못 들었다고 물어보면 언제든지 다시 말해 주는 착한 친구였다.


S와 나는 단짝 친구는 아니었다. 그럼에도 나는 툭하면 S네 집에 놀러 가서 S 어머니가 해주시는 밥을 먹고 집에 왔다. 엄마 없는 나는 S를 한번도 우리집에 초대하지 않았다. 아버지와 같이 사는 집에는 한번도 초대를 하지 않았지만 결혼하고서는 초대를 했다.


대학원에서 공부할 때다. 주제 파악도 못하고 덜컥 대학원에 진학하더니 공부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맨날 헤맸다. 특히, 전공 관련 책을 원서로 봐야 했을 때는 죽을 것 같았다. 중·고등학교 때도 제일 힘들어했던 과목은 영어였다. 듣기가 취약해서가 아니라, 독해하는 방법을 몰라서다. 전공 서적은 원서를 보는 게 좋다는 지도교수가 너무 얄미웠다. 번역이 힘들때면 나는 S를 찾았다.


“번역 좀 해줘”


마치 예약이라도 한 것처럼 원서의 복사본을 내밀었다. S는 “언제까지 해야 하는데?” 묻고는 끝이었다. 나는 언제 언제까지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며칠 후, S네 집으로 가서 번역해 놓은 걸 들고 ‘룰루랄라~’ 하며 학교에 갔다.


아르바이트라를 해서 주머니라도 넉넉하면 맛있는 밥이라도 사줬을 텐데 내 주머니는 항상 가벼웠다. 그렇게 대학원 과정 내내 S의 도움으로 원서 읽는 걸 해결했다. 논문을 쓰고 졸업을 해야 했지만 “너 아니면 안 돼”를 외치며 나의 꽁무니를 쫓는 7살 연상의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S는 한참 짝을 못 만나더니 서른 중반에 결혼을 하고 서른아홉에 둘째를 낳았다. 첫째는 올해, S와 내가 다닌 중학교의 법인 대학교에 합격했단다.


S와 나는 자주 만나지 않는다. 생존 확인을 위해 가끔 연락하는 사이라고 하는 게 맞다. 전공도 다르고 성격도 다르고 관심도 달랐다. 20대부터 30대까지는 몇 년 동안 연락을 안 하고 지낸 적도 있다. 아무 때나 만나도 ‘거리감’이 없다. 언제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무슨 얘기를 해도 들어주는 친구, 나의 짝꿍, 나의 영어 번역 선생님.


몇 년 전 겨울, S가 이사 갔다고 해서 이사 간 집에 놀러 간 적이 있다. 마침 S가 친정 어머니와 김장을 하고 김치 냉장고에 넣어 놓았다 한다. “김장 김치 좀 줄까?”라고 묻길래 “주면 고맙지” 했더니 김치 한 보따리를 싸준다. 평소에는 나혼자 얘기 하고 S는 듣기만 한다. 헌데 그날은 S가 먼저 물었다.


“네가 이혼하고 재혼까지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나는 (결혼)한 번도 겨우 했는데 너는 어떻게 두 번씩이나 했니? 정말 놀랐어.”


나는 답했다.


“인생은 예측불허야. 천국 가는 날도 마찬가지고. 오래오래 내 옆에 있어줘. 김장하면 꼭 부르고.”


S와 우정을 나눈 지 41년 째다. S 아버지의 부고를 듣고 마음이 ‘쿵’내려앉았다. 한걸음에 가지 않을 수 없었다. S가 나의 공부를 도와주고, 원서를 번역해 주고, 아무 얘기나 들어주고, 김장 김치를 주어서가 아니다. S의 아버지는 나의 아버지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아버님의 영면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