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전선에서 겪은 일
“ㅇㅇ씨는 영상의학과 키오스크 안내부스에서 근무합니다.”
2024년 6월 3일, 오전 9시, ㅇㅇ 병원 인사과 직원이 말했다. 이때부터 2025년 5월 31일까지 ㅇㅇ 병원에서 일했다. 이 일은 장애인을 위한 일자리에 원서를 내고 합격해서 시작한 일이다. 장애인 일자리란, 취업하기 어려운 장애인을 위해 300인 이상의 근로자가 있는 사업장에 장애인 의무고용률 2%를 지키도록 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반일 근무(일 4시간)를 하고 최저임금을 준다. 식대 10만 원, 명절 수당 30만 원을 주고, 1년 간의 근무가 종료되면 노동법 근거에 따라 퇴직금을 준다.’ 이와 같은 내용이 써 있는 근로계약서에 서명했다. 거의 1년에 한 번씩 일 하는 곳이 바뀌니 그때마다 근로계약서를 새로 쓴다. 사인을 할 때마다 드는 생각이 있다.
‘내 몸값이 너무 싸군.’
청력이 안 좋아진 것은 초등학교 5년 때부터다. 그전까지 멀쩡하던 청력이 갑자기 떨어지기 시작했다. 당시는 부모님이 이혼을 한 직후였다. 나는 청력이 떨어진 원인이 부모님의 이혼 때문이라고 철썩 같이 믿고 있다. 그게 아니면 멀쩡하던 청력이 나빠질 이유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억울했지만 당시에는 아기였으니 누구를 원망해야 하는지 몰랐다.
아버지는 나의 생각과 달랐다. 갑자기 청력이 안 좋아진 데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을 거라고 믿었다. 딸을 데리고 용하다는 병원의 이비인후과는 다 찾아다녔다. 어떻게든 딸의 청력이 원래대로 돌아온다면 못 할 것이 무엇일까라는 비장한 각오를 한채로.
민간요법이든 현대의학이든 청력이 좋아질 수 있다는 소문만 들리면 딸의 팔을 붙잡고 달려갔다. 그렇지만 딸의 청력은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버지는 큰 딸의 청력을 살리는 일에만 매달릴 수 없었다. 아내와 이혼 후, 홀로 4 남매를 키우기로 했으니 마음이 급했다. 시골에 계신 어머니(나의 할머니)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
청력이 떨어진 딸은 청력이 안 좋은 채로 중·고등학교를 마쳤다. 안 좋은 청력으로 공부를 제대로 할 수가 없어 대학 진학은 꿈도 꾸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번에도 나의 생각과 달랐다. 어떻게든 딸을 설득해 대학교에 보내고 싶었다. 아버지의 바람을 꺾을 수 없는 딸은 안 되는 머리를 쥐어짜며 공부해 겨우 3류 대학에 입학했다. 전공은 사회복지다.
대학에 안 간다고 우기던 딸은 입학하자마자 물 만났다는 듯이 데모하러 다니기 바쁘다. 술 처먹고 인사 불성이 되어 들어오기 일쑤였다. 그런데도 큰소리 한번 안 치고 ‘하고픈대로 다 하고 살아’라고 하듯, 딸 호주머니의 용돈은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키운 딸이 결혼을 하고 아이 하나를 낳고 산다. 이제는 딸 걱정 좀 덜 하고 사나 싶지만 여전하다. 툭하면 이거 가져가라, 저거 가져가라며 부른다.
전공이 있지만 전공을 살려서 취업을 해 본 적이 없다. 졸업을 하자마자 장애인 차별을 없앤다면서 장애인 운동을 하기로 마음먹는다. 장애인차별에 맞서 싸워야만 나 같은 사람도 마음 편히 공부하고 취업할 수 있다면서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그러기를 2년, 돈을 벌기는 글렀으니 공부나 더 해보자는 마음을 먹고 대학원에 진학하기로 한다. ㅇㅇ대학교에는 내가 존경해 마지않는 사회복지과 교수님이 계신다. 그곳에 원서를 넣었다. 생각지도 않았는데 한 번에 ‘합격’을 했다. 그것도 수석으로. 한 번도 1등을 해본 적이 없던 내가 ‘수석’을 했다니 믿기 어려웠다. 등록금이 굳었다. 아버지의 입은 귀에 걸렸다. 나의 효도는 그게 끝이었다.
학부 때는 학생운동 한다고 공부를 않더니 대학원에 가서는 공부하면서 연애를 한다고 난리를 쳤다. 곧이어 벌어 놓은 돈도 없이 결혼을 하겠다 한다. 시간이 흘러도 철이 들지 않는 딸을 아버지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나중에 생각해 보니 나는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 많이 받고 컸다. 30대 중반의 어느 날,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너무 좋은 아버지 밑에서 커서 남자 보는 눈이 없어. 세상 남자들이 다 너희 아버지 같지는 않아.”
아버지를 칭찬한 건지 나를 욕한 건지, 그때는 몰랐다.
논문을 써야만 학위를 받을 수 있는 대학원 생활은 포기 직전까지 갔다. 취업은 더욱 남의 이야기였다. 학우들의 응원에 힘입어 겨우 논문을 쓰고 학위를 손에 쥐기까지 자그마치 10년이 걸렸다. 살림과 육아를 겸하느라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 보지만 누가 믿겠나, 박사도 아니고 석사 끝내는데 10년이 걸렸다는 것을.
석사학위를 손에 쥐었을 때가 마흔한 살 이었다. 학위를 받을 때의 기쁨은 온 데 간데없고 본격적인 시련이 닥쳤다. 어디에서도 오라는 곳은 없었고, 청력이 안 좋은 내가 갈 곳은 더더욱 없었다. 내 손에는 오직 잘난(?) 학위 하나뿐이었다. 남편은 대학원 등록금 내는 데 일조했다고 본전을 찾으려는 눈치다. 나도 어디든 들어가서 생색내고픈 마음이 굴뚝이었다. 그때, 쪽방촌 활동가로 같이 일해 보자는 친구의 제안이 왔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지구상에서 제일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고 희로애락을 함께했다. 내 인생의 최고의 전성기는 그때였다.
쪽방촌 활동이 끝나자 취업 전쟁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하도 취업할 곳이 없어서 사회복지직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3년을 도서관에서 썩었다. 연거푸 세 번을 낙방하고 포기했다. 2015년부터 다양한 계약직 일자리를 전전했다. 지역아동센터 독서 지도교사, 수도사업소의 수질검사원, 여성인력개발센터의 홍보마케터, 50플러스센터의 인턴십 사원, 국립공원공단의 단기 계약직 직원, 서울시 공공근로로 6개월 근무, 올해 5월 말까지 일한 ㅇㅇ 병원의 업무지원 근무까지.
공공일자리는 장애인 의무 고용 할당을 제법 지킨다. 전공 관련 일자리는 이미 젊은 친구들이 자리 잡고 있으니 내 자리는 없다. 자리가 있어도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뿐이다.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닌 나는 그런 곳에 서류를 내고 일을 했다. 전공은커녕 전공 근처에도 끼지 못하는 일이었다. 자존심이 상했다. 참고 일하는 수밖에 없었다. ‘자존감 높은 사람은 사소한 일에 자존심을 걸지 않’는다는 최면을 걸면서 말이다.
병원의 업무 배치 과정을 보면서 제법 큰 사업장임에도 체계가 없어서 놀랐다. 청력이 안 좋은 사람에게 민원을 상대하는 키오스크 안내를 맡으라고 하질 않나, 부서를 옮겨 달라니 갈 곳 없다고 모른 체 하질 않나, 정 못하겠으면 그만두라는 식이었다. 전형적인 ‘을’인 나는 ‘갑’이 시키는 대로 하는 수밖에 없었다.
영상의학과에 오는 환자는 대부분 노인이었고, 마스크를 착용했다. 키오스크 앞에서 안내를 맡은 나는 환자들이 퍼붓는 질문을 알아듣기 힘들었다. 코로나19 때의 트라우마가 되살아 났다. 고통스러웠다. 반일근무를 하고 월 100만 원 남짓의 급여를 받는데 이렇게까지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나 싶었다. 결국 인사과에 이의 제기를 했다.
“청각 장애 때문에 마스크를 쓰고 오는 환자를 상대하기 힘듭니다. 과를 옮겨주세요.”
인사과는 어림도 없다는 눈치다. ‘그곳에서 버티든지 그만두든지 그것은 당신의 자유입니다.’라는 뉘앙스에 혈압이 올랐다. 그렇지만 내가 누군가, 잘 안 들리는 청력으로 43년을 산 사람 아닌가.
“나는 인사과장님이랑 근로계약을 한 게 아닙니다. 병원장님이랑 근로계약을 했습니다. 병원장을 만나게 해 주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병원 정문 앞에서 피켓 들고 1인 시위 하겠습니다.”
협박으로 들렸을 것이다. 병원 내 노동조합의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계약직은 노조원으로 받지 않는다고 한다. 납득이 가지 않았다. 할 수 없이 민주일반노조에 가입을 하고 ‘장애인을 고용했는데 장애인 각각의 특성을 고려하지 않은 업무 배치로 힘들다, 도와달라’고 했다. 노무사는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었다. 정 안 되면 고용노동부에 진정을 넣는 것까지 염두에 두기로 했다.
인사과와 옥신 각신 하면서 나온 대안이 직업환경의학과 지원 업무다. 건강검진받으러 오는 환자들의 탈의를 돕고 필요에 따라서 문진표 작성을 도왔다. 매일 오전 8시에 출근해서 12시에 퇴근했다. 병원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귀가해 오후에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했다. 급여가 적은 것을 빼면 그럭저럭 할만했다. 오전 8시까지의 출근은 나같이 게으른 사람이 순식간에 부지런한 사람으로 탈바꿈하는 기적이 일어난다. 이른 출근을 위해 5시 반에 기상해야만 하는 지옥이 숨어 있지만 말이다. 일을 시작한 지 한 달 동안은 부서 배치 문제로 고생했지만 무사히(?) 1년 동안의 근무를 마치고 퇴사했다.
퇴사 후 열흘이 지난 6월 10일 오후 1시, 은행 앱에 입출금 알림이 떴다.
“ㅇㅇ병원 퇴직급여 입금.”
생애 처음으로 ‘퇴직금’이란 명목의 돈을 받았다. 기분이 묘했다. 적은 액수지만 달콤한 ‘보너스’를 보니 몸값 싸다는 투덜거림이 사르르 녹았다. 순식간에 드러나는 간사함이 쪽팔린다. 난 너무 단순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