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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미즈킴 Sep 28. 2020

듣는 영화 4. 레이디 싱스 더 블루스(1972)

빌리 홀리데이, 그 블루스 같은 삶

Southern trees bear a strange fruit

Blood on the leaves and blood at the root

Black bodies swinging in the southern breeze

Strange fruit hanging from the poplar trees


남부의 나무에는 이상한 열매가 열려 있네

잎에도 피 뿌리에도 피

검은 시신들이 남부의 산들바람에 흔들리네

이상한 열매가 포플라 나무에 매달려 있네


1930년대, 인종 차별은 미국 사회의 가장 심각한 문제 중 하나였다. 특히 남부지역에서는 백인에 의한 흑인 린치(lynch, 집단폭력)가 공공연하게 자행됐다. 백인들은 흑인을 나무에 매달아놓고 산 채로 귀와 손가락, 성기 등을 뜯어내고 얼굴 가죽을 벗겨냈다. 그것으로도 부족했는지 몸에 기름을 부어 남은 시신을 불태웠다. 숯덩이가 되어버린 흑인의 사체 앞에서 포즈를 취하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누군가는 타들어간 신체의 일부를 뜯어내 가져가거나 어떤 상점에서는 이를 기념품으로 판매하기까지 했다고. 


1939년 빌리 홀리데이(1915~1959)가 부른 ‘Strange Fruit(이상한 과일)’은 당시 횡행하던 흑인에 대한 폭력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곡이다. 린치를 당해 나무에 매달려 있는 흑인을 나무에서 열리는 이상한 열매로 표현한 이 노래는 당시 미국 사회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이 노래는 고등학교 교사이자 시인이었던 에이블 미어로폴(필명 루이스 앨런)이 1930년 토마스 쉽과 아브람 스미스 린치 사건을 기록한 사진을 본 뒤 그 느낌을 담아 쓴 곡이다. 당시 노래는 대부분의 라디오 방송국에서 금지곡으로 지정됐지만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를 통해 미국 전역에 ‘참담한 흑인 인권의 실상’을 알리는 역할을 했다.

      

Billie Holiday - "Strange Fruit" Live 1959


빌리 홀리데이가 이 노래를 처음 부르기 시작한 클럽인 ‘카페 소사이어티’ 주인인 바니 조지프슨은 아래와 같이 회상했다.


“그 날 밤에는 그녀가 노래를 부르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청중들은 즉각 반응을 보였습니다.

눈물이 흘러나오자 그 때 청중의 충격은 컸습니다. 빌리도 알았을 겁니다.

그리고 그 노래는 빌리만 부르는, 그녀의 전매특허 같은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백인 가정의 하녀에서 카네기홀 무대에 이르기까지


블루스는 18세기 후반 서아프리카에서 미국으로 끌려온 흑인들이 일상의 고통을 덜어내기 위해 악기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른 것에서 탄생했다. 물론 경쾌한 블루스도 있지만 우울한 정서를 표현하는 경우가 보통이다. 우리에게는 전설적 재즈 싱어로 남아 있는 빌리 홀리데이의 삶은 어쩌면 그 자체가 한 편의 블루스였다. 


영화 <레이디 싱스 더 블루스(Lady sings the blues, 1972)>는 빌리 홀리데이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다룬 음악영화다. 가난과 성폭행, 매춘으로 점철된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낸 그에게 음악은 유일한 행복이었다. 특유의 구슬픈 음색으로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가 되었지만 무대 아래 그는 여전히 상처 받은 어린 소녀일 뿐이었다. 내면에 잠식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은 안타깝게도 마약이었고, 이는 곧 그녀의 음악과 생명까지도 앗아가 버린다. 



영화는 144분이라는 비교적 긴 러닝타임을 통해 연약하고 핍박받던 어린 소녀가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는 재즈 가수로 성장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의 묘미는 빌리 홀리데이의 각종 히트곡을 들어볼 수 있는 데서 멈추지 않는다. 눈부신 샹들리에 아래 무대를 누비는 쇼걸들의 화려한 댄스,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밴드의 음악, 너풀거리는 새틴 드레스를 입고 관객을 매혹하는 가수들의 노래까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치 1930년대 뉴욕의 할렘가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빌리 홀리데이 역할은 1970년대 인기스타였던 다이애나 로스가 맡았다. 우리에게는 듀엣곡 ‘Endless love’로 잘 알려져 있다. 홀리데이의 목소리가 워낙 독보적인지라 배역에 맞는 배우를 찾는 일이 쉽지 않았을 것으로 여겨진다. 다이애나 로스는 실제로 홀리데이의 음색보다는 톤이 높고 여성스러운 측면이 있어 홀리데이의 음악을 표현하기에는 부족했다는 혹평을 듣기도 했다. 목소리의 임팩트가 약하다는 점은 어느 정도 인정할 수밖에 없지만, 영화를 보면 다이애나 로스가 자신만의 색깔로 홀리데이를 연기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실제로 영화 발매 당시 다이애나 로스가 부른 홀리데이의 히트곡은 빌보트 차트에 오르며 꽤 높은 인기를 누렸다.


음악으로도 극복할 수 없었던 내면의 상처


영화는 빌리 홀리데이의 천재적인 음악적 재능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만 한편으로 당시 흑인 여성 가수에게 쏟아지던 차별의 현장 역시 여과 없이 조명한다.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멋진 목소리를 지녔지만 그 당시 흑인 여가수들은 대중의 사랑을 받기 위해 때로는 매춘부가 되어야 했다. 다리를 벌려 팁을 받기를 거부하는 빌리에게 관객들은 “숙녀처럼 노래한다”며 야유를 쏟아낸다. 


대중의 사랑을 얻기 시작하면서 백인 밴드와 함께 전국 투어에 나서지만 빌리는 정작 공연에서 얼굴이 너무 검다고 핑크 물감을 칠하거나 공연을 거부당하기도 한다. 영화에서는 ‘키다리 아저씨’와 같은 마음 넓은 연인이 빌리를 구제하고 아낌없는 사랑을 베푸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가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폭력적이었다. 


하얀 치자꽃을 머리에 꽂은 채 온몸을 다해 노래하던 빌리 홀리데이는 <타임(Time)>지에 사진이 실리는 최초의 흑인이 되고, 오페라 가수들만 설 수 있었던 카네기 홀에서 공연을 펼치는 성공적 재즈 가수로 거듭난다. 그러나 수많은 폭력과 차별 속에서 존재를 인정받을 수 없던 내면의 상처는 음악조차 구원할 수 없었다.


영화는 빌리 홀리데이의 삶을 있는 그대로 다루기보다 드라마적 서스펜스를 위해 많은 부분을 각색했다. 연출 자체로 훌륭한 영화라 보기는 어렵지만, 빌리 홀리데이라는 한 편의 블루스를 느껴보기에는 흡족스러운 작품이다. 국내에서 작품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점은 아쉽다. 차별과 핍박 속에서 꽃피운 아우성. 그가 떠난 지 반세기가 넘었지만 빌리 홀리데이의 목소리는 치자꽃 향기처럼 여전히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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