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첩첩산골 강원도 태백에서 도시로 나왔다. 여고를 졸업한 후 가방을 메고 무작정 버스에 올랐다. 첫발을 내디딘 곳은 대구의 북부정류장이었다. 어둠이 짙어갈 무렵 도착한 도시에서 나는 갈 곳이 없었다. 사방을 두리번거려도 낯선 곳이었다. 타고 온 버스 안내양에게 갈 곳이 없다고 하자 직원들 숙소에 머무르라고 했다.
다음날 대합실 입구에 직원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총무과에 이력서를 넣고 기다렸다. 며칠 후 면접을 보러 오라는 통보를 받았다.
도시에서 졸업한 면접자들은 스커트와 블라우스로 한껏 멋을 내어 세련되면서도 깔끔한 외모였다. 후줄근한 나일론 잠바에 낡은 청바지를 입은 나는 촌스러운 모습이었다. 더군다나 부끄러움이 많아 사람들 얼굴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하고 시선을 옆으로 돌렸다.
사장님과 임원들의 질문에 차분하게 대답하는 여학생들과 달리 나는 어수룩한 표정으로 삶의 흔적을 드러냈다. 이 회사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 싶었다. 돈을 벌어서 동생들에게 학비를 보내고 예쁜 옷과 시계도 사 주고 싶었다. 무엇보다 새로운 터전에서 동생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일자리를 잡고 싶었다.
다음 날 담당 부서에서 출근하라는 소식을 받았다. 학연과 지연, 혈연에서 아무런 연관이 없었지만 운이 좋았던지 회사의 부름을 받게 되었다. 문제는 입사 서류였다. 졸업증명서를 비롯하여 여러 가지 증명을 할 수 있는 서류를 제출해야 했다. 그중에서도 재산세가 수십만 원 이상 되는 사람의 인감증명서와 보증서가 필요했다.
걱정이 태산이었다. 시골에서는 재산세가 수십만 원 이상 나오는 집을 찾을 수가 없었다. 집 자체를 수 십만 원이면 살 수 있었다. 서류를 내지 못하면 회사에 다닐 수 없었다.
경리과에서는 하루에도 큰돈을 만지고 법인 장부를 기장해야 하기 때문에 재산세 납세증명서를 제출하는 것은 필수라고 했다. 서류를 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아서 힘없이 회사를 빠져나오는데 돌아서는 등 뒤에서 J상사가 불렀다. 시골에서 온 내가 측은해 보였던지 재산세 납세필증의 보증서에 들어가는 복잡한 서류 대신 보증보험으로 대체하는 서류를 떼 오라고 하셨다.
회사는 규모가 꽤 큰 편이었다. 직원과 종업원이 수백 명이 넘었고 사무실에는 부서별로 수십 명이 일하고 있었다. 열 명이 넘는 여직원도 바쁘게 움직였다. 그녀들은 나에게 시골뜨기 신입사원이라고 놀려댔지만 귀에 거슬리지 않았다.
강원도 사투리를 쓰는 나와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그녀들과 언어 소통이 되지 않을 때가 있었다. ‘언제예’라는 경상도 말에는 ‘아니다’라는 말의 뜻이 담겨 있었지만 내가 쓰는 ‘언제요’라는 말은 시간을 묻는 말이었다.
회사에 들어간 지 일 년이 되지 않았을 때였다. 일하던 자리에서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났다. 선배 언니가 결혼을 하면서 내가 그 자리로 옮기게 되었다. 새로 일하게 된 곳은 법인장부를 기장하는 일이었다. 일 년 동안 발생한 수입과 지출과 비용을 기장하고 기업의 경영 성과를 대차대조표와 손익계산서로 뽑아내야 했다.
그 자리는 먼저 입사한 언니가 발령을 받아야 할 자리였다. 임원 회의에서 결정한 일이었지만 언니들의 눈초리가 예사롭지 않았다. 미움을 받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좋은 자리라도 가시방석에 앉기는 싫었다.
언니들의 바쁜 업무를 간간이 도왔고 조출과 당직이 있을 때면 대신해 주기도 했다. 그러면서 기분도 맞춰 주었고 간식으로 떡볶이와 만두로 한 턱 내기도 했다. 손님이 많이 오는 날엔 커피 잔 씻는 설거지를 맡았고 아침 일찍 출근해서 청소하는 것도 먼저 했다. 힘든 일이 있을 땐 눈치껏 앞장을 섰다. 마음의 문을 열지 않을 것 같았던 그녀들이 서서히 바뀌어갔다. 도시에서 나고 자랐던 그녀들은 시골뜨기의 서툴렀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순간 텃세를 하던 흔적은 사라지고 그녀들은 마음의 문을 열었다.
개나리와 진달래가 피는 봄날이면 언니들과 공원으로 나들이를 다녔고 무더운 여름엔 골짜기로 휴가를 떠났다. 단풍이 드는 가을엔 팔공산에서 가로수 길을 걷고 또 걸으며 행복해했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겨울엔 어깨를 움츠리고 선술집에 들어섰다.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거나하게 취할 때면 뭔가 허전한 마음에 가는 해 아쉽다 하면서 서로를 토닥거렸다.
내 인생에서 아름다웠던 한 부분을 뽑는다면 아마도 이때가 아니었을까. 아무런 걱정도 부담도 없을 때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었고 적금을 부을 수 있는 월급을 받았고 동생들에게 용돈을 줄 수 있었고 늘 같이 웃고 울면서 함께 했던 언니들이 있어서였다.
언니들은 결혼을 하면서 한 명씩 회사를 떠났고 새로운 후배들이 들어왔다. 떠날 때마다 헤어짐이 아쉬워 눈물을 흘리며 자주 연락하고 만나자고 약속을 했건만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다. 모두가 제 살길이 바빠서 인가보다. 나도 결혼을 하면서 회사를 그만둬야 했다. 수십 년 세월이 흘러도 오 년 동안 함께했던 그녀들을 생각할 때면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