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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Nov 12. 2016

두 개의 밥상

추억은 맛에서도 온다.

                                                                                                                             

1.
김장이 코앞이라 해도 그렇지 집에 김치 한 조각이 없다. 추석에 엄마 집에서 가져온 나박김치 한 보시기 남은 것도 먹어버렸다. 정신 차리고 생각해보니 냉장고에 넘쳐나던 장아찌며 초절임, 장조림, 멸치볶음 같은 밑반찬도 동이 난지 오래다. 다니러 온 동생이 내가 차린 밥상을 보고 이게 뭐냐고 한다. 그런 소릴 들을 줄 알고 냉동실 뒤져서 김까지 구워냈건만. 밥 한 공기에 김과 땅콩조림과 호박볶음이 전부인 저녁 밥상이 우리끼리 있을 때는 아무렇지도 않더니만 그 말 한마디에 그만 수도승의 밥상이 되어버렸다.



다음날 점심에 냉장고 뒤져서 찾아낸 것도 동생이 지난번에 왔을 때 김밥 싸주고 남은 어묵 두 장과 계란이 전부다. 사각 어묵 2장에 양파 약간, 간장, 설탕, 미림 한 숟가락씩 넣어 볶았더니 간이 잘 맞는 반찬이 되고 계란은 풀어 말이를 만드는데 계란말이 팬이 다 됐는지 자꾸만 눌어붙자 그것도 내 탓이라 계속 잔소리가 이어진다.



지난번 문호리 장터에서 남편이 집어 든 깻잎장아찌와 방풍나물 장아찌도 다 이유가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렇게 차린 밥상. 사진을 찍어놓고 보니 이것도 그리 푸짐한 것은 아니구나. 그래도 맛있었던 한 상. 나는 그동안 무엇을 했던 걸까.

2.

이런저런 일들이 있어서 돌아다니다가 점심때를 놓쳤는데 저녁 약속이 있었기에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며칠 전, 버거킹에 가서 주니어 와퍼 2 개를 사서 차 안에서 먹었다. 고기를 잘 못 먹는 내 식생활의 역사 중에서 한동안 예외가 있었다면 그건 아이를 임신하고 있을 때였을 거다. 입덧이 끝날 즈음에 갑자기 햄버거가 먹고 싶어서 찾아간 곳이 명동의 버거킹이었다. 겨자를 많이 넣어달라고 주문을 해서 참 맛있게 먹었는데 요즘 임신한 젊은 엄마들이 태명도 지어주고 부풀어 오른 배를 한껏 내밀며 사진도 찍어주고 태교여행을 다니고 음악도 들려주고 책도 많이 읽는다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나는 버거킹의 와퍼밖에 생각나는 게 없어서 혼자 픽픽 웃곤 했던 그 와퍼였다. 가격 할인까지 해 줘서 기분 좋게 샀는데 그걸 먹는 동안 점점 기분이 나빠져서 결국 화가 난 채로 오후를 보내고 빵집을 찾아서 햄버거빵을 샀다.



동생 있을 때 만들어놓은 떡갈비가 있었다. 빵을 반으로 갈라서 씨겨자를 섞은 마요네즈를 바르고 떡갈비를 구워 올렸다. 로메인과 치즈, 토마토, 양파를 얹고 돈가스 소스와 바비큐 소스를 섞어 끓인 소스를 뿌려서 햄버거를 만들고 나니 아침 8시가 채 안되었다. 밤새 와퍼 때문에 마음이 불편했다는 증거였다.



햄버거를 반으로 갈라 남편과 아침으로 나누어 먹으며 즐거웠다. 그 옛날 버거킹은 그래도 꽤 괜찮았었다는 이야기를 감자튀김과 콜라 대신 주워삼키며 바로 전날의 우울했던 주니어 와퍼를 털어냈다. 3 개를 만들어서 두 개는 아이 몫으로 남겨두었다.



음식을 추억으로 먹는 일이 많으면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왔다. 곰곰 생각해보니 내 기억 속의 좋은 음식들은 어린 시절 엄마가 해 줬던 것들이 대부분이고 거기에 외할머니와 이모의 맛이 더해진 것들이었다. 잘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가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도 추억으로 찾아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많아서 행복한 사람이 되기를 원하므로 더욱 그렇다.

아. 오늘 저녁에는 뭐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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