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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Sep 07. 2018

편집자들, 가지, 그리고 세계를 건너가는 일에 관하여

강연 후기

                                                    

부추 꽃


저녁거리로 마땅한 게 혹시라도 있을까 싶어 냉동실을 열고 어지럽게 쌓인 식재료들을 뒤적이는데 납작하고 기다란 꾸러미 하나가 미끄러져 발등으로 떨어졌다. 감자떡이다. 지난 8월 30일 원주문화재단의 그림책 센터에서 강연에 오셨던 분에게 받은 종이가방 속에 들어있던 것이다. 두 시간 넘게 계속된 강연과 대담, 질문과 답변이 모두 끝나고 인사를 나눈 후에 마지막까지 남아계셨던 분이 내게 걸어오셨다. '전업주부입니다만'을 들고 오셔서 사인을 부탁하시는데 난 어쩐지 그분이 낯이 익어서 여쭈었다.

"혹시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을까요?"
"아니에요. 처음이에요."

책표지를 넘겨 간단히 몇 자 적어서 다시 드렸더니 책 제일 뒷장을 펼쳐서 책을 만든 이들의 이름을 손가락으로 훑으신다.

"여기 어디에 이름이 있던데~~"
"?"
"본 것 같은데"
"혹시 ㅇㅇ 씨 어머님이세요?"
"네, 맞아요!"

나의 두 번째 편집자, <전업주부입니다만>을 만들어 준 편집자의 어머니셨다. 지역 소식지에서 강연 안내를 보고 오신 거라고, 딸에게는 여기 온다는 얘기도 안 했노라고 하신다. 하얀 원피스에 아담한 체구, 단정한 얼굴인데 목소리가 시원시원하고 유쾌하신 분이었다. 시장을 봐왔노라고 하시면서 커다란 쇼핑백을 내게 안겨주고 성큼성큼 돌아나가시는데 나는 놀랍고 고맙고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말았다. 집에 돌아와 보니 호박잎, 찐빵, 만두, 메밀전병, 막걸리, 그리고 감자떡이 있었다. 그날 저녁과 그 다음날 그 음식으로 살았다. 날이 유난스러워서 혹시 상할까 봐 냉동실에 넣어둔 감자떡을 그간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였다. 

뭐라고 적어드렸는지도 기억이 안 난다. 사실 기억이 나지 않는 게 그것뿐이겠는가. 준비라고는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자른 것 밖에 없다고 해야 옳다. 물론 매일 책상 앞에 앉아서 원고를 쓰고 고치고 녹음해서 들어보고 또 고치고 다시 녹음하고 다시 들어보기를 반복한 건 사실이다. 꼭 하고 싶은 말들을 놓칠까 봐 커닝 페이퍼까지 만들어서 가져갔건만 그 모든 게 소용이 없었다. 말은 앞 문장의 꼬리를 물고 제 마음대로 나왔고, 준비하는 동안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던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왔다.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말들을 빼놓지 않았는지, 강연 끝나고 질문하셨던 분들께 혹시 동문서답을 한 건 아닌지도 지금은 확인할 길이 없다. 행사 담당자가 커닝 페이퍼를 기념으로 가지고 싶다 해서 주고 왔지만 거기 쓰여있던 단어와 문장들, 형광펜으로 긋고 별을 그려놓았던 부분들, 풀이 없어 종이테이프로 붙여놓은 메모들도 지금 생각하니 부끄럽다. 그냥 가져올걸.




강연 주제는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 <전업주부입니다만>의 부제다. 담당자는 전업주부로서의 일상과 작가로서의 일상이 어떻게 공존하고 갈등하며 화해하는지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달라고 했는데 나는 나의 편집자들과 친구, 가지, 그리고 세계를 건너가는 일에 관해 이야기했다. 결국 그건 내가 내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였다. 강연장에 오신 분들께 들려드려야 하는 이야기였어야 하는데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고 온 나란 사람!

강연 포스터


앞으로도 오랫동안 기억하고 싶은 부분을 옮겨본다.


블로그에 올리는 글은 식구들과 식탁에서 나누는 이야기들과는 다릅니다. 남편, 아이와 대화할 때는 서로 말을 주고받지만 모니터를 앞에 두고 글을 쓰다 보면 저절로 제가 주인공이 됩니다. 자판을 두드리다 보면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장들이 써져요. 마치 손가락 끝에서 문장이 만들어지는 것 같지요. 모니터에 활자들이 박히는 걸 보고서야 아, 맞아. 나 저런 말을 하고 싶었어라고 알게 되는 거예요. 그렇게 밤마다 앉아서 쓰지 않았다면 내가 나를 어떻게 알겠어요. 스스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도 잘 모르면서 쌀 씻고 오이 자르고 청소하면서 하루를 채워서 이십 년 넘게 살았잖아요. 세상에! 그렇게 쓴 글들을 모아 책을 만들었습니다. 


머루가 익다


그때까지 책은 읽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내 이름으로 책을 낼 수도 있다는 생각은 해 본 적이 없거든요. 나중에 돌아보고 나서 그때가 정말 중요한 시기였다는 걸 알았습니다. 원고 정리를 하면서 제가 읽고 쓰기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고 바로 그 일이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이란 것도 알았으니까요.

책이 나오고 자신이 글쓰기를 좋아하고 또 그걸 하고 싶었다는 걸 알게 되니 온통 그 생각뿐이에요. 이게 참 어려워요. 어느 날 시장 다녀와서 야채를 다듬는데 가지가 있었어요. 꼭지가 까끌까끌하잖아요. 그 가시에 손가락이 따끔거렸는데 그 순간에 어렸을 때 엄마가 금방 딴 가지를 먹으라고 잘라 줬던 기억이 나는 거예요. 그날 엄마가 입었던 티셔츠의 빨간 꽃무늬, 원피스 차림의 어린 나, 반짝이는 진한 보라색 가지요. 미끈거리는 작은 가지였죠. 서늘한 연둣빛이 감도는 속살, 가지 특유의 비릿한 냄새, 먹히기를 거부하는 것 같은 탄력감이 정말 생생하게 떠오르는 거예요. 가지를 물에 씻다 말고 손에 가지를 쥔 채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죠. 누가 봤으면 이상하게 여길 정도였어요. 당장 들어가서 앉으면 가지를 소재로 근사한 글 한 편을 뚝딱 쓸 수 있을 것 같은 아주 멋진 느낌이었어요. 하지만 아직도 그 글을 쓰지는 못했어요. 밥을 하고 청소를 하면서도 단어와 문장들이 불쑥불쑥 나와요. 그때는 글만 쓰고 싶었어요. 


엄마에게 얻어온 꽃


 황현산 선생님이‘밤이 선생이다’란 책에서 하신 말씀도 있어요. ‘인간은 재물만 저축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도 저축한다. 그날의 기억 밖에 없는 삶은 그날 벌어 그날 먹는 삶보다 더 슬프다’. 추억이 많은 사람이 행복하다고 하잖아요. 전 이 문장을 읽고 난 후에 내가 서재에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을 용서하게 됐어요. 그리고 그동안 쓸모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시간, 빨래 접고 그릇 정리하고 명절 음식 하느라 동동거린 시간들도 함께 용서했죠. 아, 시간을, 기억을 저축했구나 했지요. 저축한 걸 꺼내서 쓸 때가 왔다고 생각했어요.


9월을 시작하는 색


가감 없이 자신을 들여다보는 게 필요합니다. 일단 내가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지 알아야 내가 원래 되고자 했던 사람의 모습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지요. 그 거리를 알아야 전략을 세울 수 있어요. 지금 자신을 정확히 아는 것, 그게 모든 것의 시작입니다. 오늘 드린 말씀이 지금 여기에서 자기 자신으로 살아가기의 첫걸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목화 꽃


강연 전날 밤까지 폭우가 내렸는데 당일 아침에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강연이 끝나고 점심 식사를 하기로 한 식당에 도착하니 다시 폭우다. 돌아오는 길 중간쯤이었을까? 카톡 알람이 울렸다. 첫 번째 책, <안녕하세요>의 편집자였다. 잘 하고 왔는지 궁금하셨던 거다. 난 그날 강연을 이분의 이야기로 시작했기에 가슴이 따끔거렸지만. 

시냇물처럼 속살거리는 시간을 보내시라고 응원해주신 고운 님, 강연장까지 픽업해주시겠다는 말씀을 주신 분, 하루 휴가를 내고 오신다는 분, 시작까지 한 시간도 넘게 남은 이른 시각부터 자리에 앉아계셨던 분,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주시고 큰 소리로 여러 번 웃어주셨던 그날의 참석자분들, 커닝 페이퍼 만드는 법을 알려주신 작가님, 두 분의 편집자 님, 잘하고 오라고 응원해주셨던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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