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시절이 끝나갈 때 비로소 시작되는 것

작가의 말

by 라문숙


“이제 놀아야지!”

종일 아이와 함께 보낸 날이었다. 남편이 출근한 후 함께 밥을 먹고 놀이터와 슈퍼마켓, 다시 놀이터를 거쳐 집에 돌아왔고, 점심 후 아이가 낮잠 자는 동안에는 어질러진 집안을 정리하고 세탁물을 접었다. 낮잠에서 깬 아이에게 그림책을 읽어주고 소꿉놀이를 하다가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 되어 “이제 엄마는 저녁 해야지!”하고 일어섰을 때 아이가 한 말이었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마치 무언가에 몰두했던 사람이 잠시 쉬겠다고 말하는 것처럼 들리는 그 문장은 아이가 곧잘 하는 말이었다. 모여 앉아 식사를 하거나 차를 마신 후 일어설 때, 집에 놀러 온 친구들이 돌아갔을 때, 식구들이 함께한 외출에서 돌아왔을 때, 하물며 놀이터에서 방금 돌아와 씻고 난 후에도 아이는 “이제 놀아야지”란 말을 빼놓지 않았다. 지금부터 자기는 놀 테니까 엄마 아빠는 엄마 아빠가 할 일을 하라는 말, 혼자 있고 싶다는 말이었다. 처음에는 놀랍기도 걱정스럽기도 했지만 아이도 어른들처럼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할 거란 생각이 들었다. 혼자 뭘 하고 있나 가만 들여다보면 함께 있을 때와 별다를 게 없었다. 인형에게 말 걸고, 그림책을 보여주고, 블록들을 쌓았다가 무너뜨렸다. 아이는 혼자 지내는 시간을 하루도 놓치지 않았다. 당당하게 혼자 있는 시간을 주장하던 아이는 자라서 자기를 챙길 줄 아는 어른이 되었다. 부럽지 않을 리가 없었다. 내게는 혼자 있을 시간 혹은 나를 주장할 권리가 아이만큼 쉽게 주어지지 않았다.


결혼을 했고 엄마가 되었다. 무엇을 하든 첫 경험이 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관계가 생겼고 새로운 역할이 뒤따랐다. 새 학기마다 더 나은 학생이 되고자 마음먹었던 것처럼, 새로 생겨나는 역할들마다 잘 해내고 싶었다. 딸과 언니 역할에 더해 아내와 엄마로, 며느리와 올케와 동서로 누구보다 잘 살고 싶어서 동동거렸다. 무엇이 됐든, 얼마나 어렵든 애를 쓰며 살았다. 나는 내 세계 안에서 잘 살고 싶었다. 왠지 미루고, 양보하고, 포기하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내 몫의 시간이 어디 다른 곳에 있는 게 아니라 바로 지금 여기에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뭔가 잘못됐다는 느낌이 나를 따라다녔다. 내가 별것 없이 나이를 먹은 것이 내 탓인 것만 같았다.


나는 무엇을 놓쳤을까?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지금보다 조금 더 잘 살 수는 없었을까?


어딘가에서 날아온 씨앗들이 그늘에 숨어 자라다가 불쑥 제 존재를 드러낸 것 같았다. 문득 피곤해졌다. 내가 내 스스로 만든 감옥에 갇혀서 내가 만든 족쇄로 내 몸을 묶어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모호했던 불안과 만성적인 불만의 원인이 명확해졌다. 딸이니까, 엄마니까, 며느리니까 당연하다 혹은 어쩔 수 없다란 생각 뒤에 나는 얼마나 여러 번 숨었을까? 얼마나 오랫동안 나는 나로 살지 못한 것일까? 이렇게 나에게서 조금씩 멀어지다가 결국 아무것도 아닌 사람으로 나이 들기를 멈추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살기.

그러니까 이제부터라도 나로 살기.


답은 간단하고 명료했으나 쉽게 다가갈 수는 없었다. 무엇보다 먼저 지나간 시간들과 화해해야만 했다. 내가 온몸으로 통과한 시간들이 아무것도 아니라면 지금의 나도 없을 테니까. ‘앞으로’라든가 ‘이제부터는’이란 단어조차 말할 수 없을 테니까. 분명 진심이었고, 기뻤고, 행복했던 시간들이기도 했으니까. 언제 어디서든 나는 그 시간들을 딛고 서 있을 수밖에 없으니까.


다정(多情)과 정성이 내 전략이었다. 무엇보다 내게 다정해지기로, 내 하루에 정성을 들이기로 했다. 일상은 변함이 없었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블로그에 걸어둔 말, “마음을 다하면 아름다워집니다”는 내가 남들에게 하는 말이 아니라 내가 내게 하는 다짐, 혹은 주문이다. 내가 나를 세뇌하는 것이다. 삶이 팍팍하고 메말라서 금방이라도 부서져 내릴 것 같을 때는 더욱 정성을 들였다. 갈라진 땅에 물을 주듯이 마음을 담아 밥을 짓고 수건을 접는 일상이 나를 조금씩 일으켜 세웠다. 느리긴 해도 분명히 효과가 있었다.

책을 읽으면서 쓰는 사람이 된다는 건 어떤 일일까 생각해보긴 했으나 실제 책을 만든 경험은 무엇보다 신기한 일이었다. 나는 쓰는 사람이 되면서 내가 누구인지, 내가 좋아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인지 비로소 알게 됐다. 쓰고 싶은 만큼 마음껏 쓰지 못해 답답했고, 매일 아침 다시 시작해야 하는 하루가 야속하기도 했다. 한 번에 여러 가지를 해낼 수 없어 갈팡질팡하다가 내가 마음을 쏟고 싶어 하는 것들은 결국 하나의 뿌리에서 나온 나뭇가지들과 같아서 그중 하나에 마음을 쏟으면 언젠가 다른 가지에도 가 닿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끊임없이 종종거리는 내가 싫어서, 여전히 포기하지 못하는 내가 징그러워서 자신에게서조차 벗어나고 싶을 때도 많았다. 그럴 때마다 문을 열고 마당으로 나가 무엇으로도 무장하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만났다. 땡볕 아래 풀을 뽑다가 그늘에서 작게 핀 개양귀비 꽃이라도 한 송이 발견하면 울컥 가슴이 뜨거워졌다. 가능한 오래 멈추고 새소리를 들으며 나뭇가지 사이를 휘돌아 나가는 바람에 머리카락을 맡겼다. 주의 깊게 들여다볼수록 더 잘 보였다. 깊이에 눈뜰수록 낯선 것들에 익숙해지고, 익숙해서 보이지 않던 것들은 다시 눈에 들어왔다.


오십이 넘은 나이에도 내 세계는 여전히 작다. 무엇이든 할 수 있고, 어디에든 갈 수 있을 거란 생각은 이제 하지 않는다. 무한에 가까웠던 지평이 점점 좁아져서 이제는 한눈에 들어온다. 먼 곳을 향했던 시선을 거두어 내 곁의 사람과 사물, 풍경에 놓아본다. 무엇이든 더해서 늘리는 대신 덜어내 가볍게 해야 할 때가 왔는지도 모른다. 모퉁이를 돌아선 것처럼, 고개 하나를 넘은 것처럼 어느 경계를 넘어온 것을, 한 시절이 끝난 것을 이제는 알겠다. 그 시절을 그리워할 수는 있을지언정 돌아갈 수 없다는 것도.

그럼에도 주방과 서재와 마당, 가족들과 몇 안 되는 친구로 이루어진 이 작은 세계에서 내가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건 내게 없는 것들을 슬퍼하는 대신 내게 가능한 것들에 만족하고,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될 의미들의 풍요와 아름다움을 예감할 수 있어서인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면서도 여전히 내 앞에 놓인 날들에 설레는 이유다.

나는 더 나아가고 싶다. 아직은 뭔가 새로운 걸 모색하고 시도하기를 멈추고 싶지 않다. 내 세계를 조금 더 확장할 수 있기를, 삶을 조금 더 깊이 들여다볼 수 있기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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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은 책은 내 지난 시간들(비록 제대로 살지 못했더라도)을 끌어안고 나로 살기 위해 스스로에게 묻고 애쓴 날들의 흔적이자 다가오는 날들에 대한 다짐이다. 나의 시간에 함께 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한다.




이 글은 2019년 10월 29일에 발간된 [깊이에 눈 뜨는 시간]의 일부입니다. 책의 내용 중 일부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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