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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중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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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Mar 03. 2024

봄의 첫날에

  3월의 첫날, 아침볕은 노란색이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거실에서 겨울을 난 유칼립투스와 올리브 위로 내려앉는다. 식물들 사이에 앉아있으면 밤새 뭉친 어깨도 말랑하게 풀어질 듯 살아있는 봄볕이다. 머릿속에 아지랭이가 피어오르듯 하더니 몸 전체가 웅성거리며 수선스러워진다. 애꿎은 봄볕 탓은 야무지지 못한 사람의 변명이다. 틈만나면 비집고 들어오는 '어쩔 수 없음'을 어쩌겠느냐고 휘늘어진 어린 가지가 느릿느릿 움직인다. 오전에 잠깐 야박하게 내려앉는, 유리창 건너편에서 머뭇거리듯 들어와 잠깐 머물다 스러지는 창백한 겨울 햇빛과 열린 문틈 사이로 감질나게 드나드는 바람을 벗 삼아 겨울을 났으니 그들도 나처럼 몸살이 날 법도 한데 어찌 견디고 있을까.  며칠 꽃샘추위가 이어지더니 기어이 심란한 눈발이 휘날리던 어제는 혹시 꿈이었는지.


  아침 식탁을 대충 치우고 카디건 두 장을 겹쳐 입는다. 요맘때 봄볕은 믿을만한 게 못 된다는 걸 알게 된 건 언제부터일까. 원피스 아래 레깅스를 받쳐 입고 양말도 잊지 않는다. 장화를 신고 문을 열고 마당으로, 아니 3 월로 걸어 들어간다. 바위를 쌓아 만든 돌담을 지나 집 뒤를 돌아 마당으로 갈 작정이다. 바위틈에 사는 철쭉 끄트머리에 새끼손톱만 한 잎들이 오종종하니 붙어있다. 벌써 새잎이 나온 건 아닐 테고 지난해 미처 떨어지지 못한 잎이라 보기에는 초록빛이 지나치게 곱다. 갈빛으로 시들어 추레한 비비추가 바로 옆에 누워있다. 안에서 솟아나던 질문이 수그러든다. 그래, 새잎이 나기에는 아직 이르지.   


    

  울타리를 기대고 선 불두화 가지에 겨울눈이 통통하다. 바로 옆 조팝나무는 버드나무 가지처럼 휘어진 줄기에 꽃눈인지 잎눈인지 분간이 어려울 만큼 작은 눈들을 빼곡하게 달았다. 늦가을에 제법 자르기는 했는데 겨우내 자란 것일까? 제멋대로 뻗어 엉킨 줄기가 게으른 여자의 머리채처럼 어지럽다. 성급한 모란은 어느새 빨간 꽃눈을 부풀렸다. 라일락 꽃눈은 탐스럽고 블루베리는 뾰족하니 어여쁘다. 삐죽삐죽 거칠지만 앵두나무도 여전하다. 그리고, 진주알처럼 희고 푸른 꽃눈을 구슬처럼 달고 있는 매화가 있다. 맞은편에 선 목련은 아직 털옷을 입은 처지라 부끄러운지 딴청을 하듯 꽃눈이 모두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목련 가지 끝을 따라 고개를 한껏 젖힌다. 선명한 푸른색, 맑고 밝다. 저런 하늘 아래라면 무엇도 숨길 수 없을 터 하늘을 자주 올려다보는 이들은 거짓말도 못하겠구나. 얼마나 그러고 서 있었는지 고개가 뻣뻣해진다. 찬바람에 코가 맵고 젖힌 목 뒤가 아파온다. 고개를 바로 하는데 주변이 핑그르르 돈다. 어지럼증이 가시길 기다리다가 아, 구근들!     



 목련 근처 화단에 수선화와 히아신스, 튤립이 모여 겨울을 났을 터였다. 낙엽 사이로 보이는 초록, 뾰족한 잎새가 한둘이 아니다. 구근들이라고 눈을 덮고 땅 속에서 겨울잠만 잔 건 아니었다. 게다가 어느 해 보다 빠르다. 그러고 보니 무스카리도 물수선도 스노드롭도 모두 싹을 내밀었다. 가만 보니 잔디 사이사이에 벌써 어린 초록들이 보인다. 보나 마나 바랭이나 민들레일 것이다. 작년 여름 내내 뽑았던 자라공이나 달개비, 제비꽃들도 곧 얼굴을 내밀겠지. 라일락 꽃눈이나 명자나무 꽃봉오리를 보면서도 실감하지 못했던 봄이다. 잔디 사이에 얹혀살다가 눈에 띄는 족족 뽑혀버리는 작은 들풀들을 보고서야 이미 계절을 건너왔음을 깨닫는 둔한 사람. 나.

  


  가위를 든다. 입으로야 나온 김에 웃자란 나무줄기를 정리한다고 하지만 나무마다 눈이 많이 달린 가지를 고르는 걸 보니 꿍꿍이는 따로 있다. 살구나무, 조팝, 매화, 블루베리, 명자나무, 앵두나무가 걸려든다. 유리병에 물을 담고 나뭇가지를 꽂는다. 자리를 잡아 주고 바라본다. 꽃이 피면 기쁘겠고 잎을 내어주면 고마울 것이다. 나는 얼마나 자주 그리고 오래 이곳에 서있을까? 봄이 오는데 잘려버린 나뭇가지 앞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싱크대 앞에서 작게 잘린 나뭇가지들을 정리하다가 무스카리에 눈을 맞춘다. 보름날, 친정에 갔다가 로컬매장에서 사 온 아이다. 매일 눈에 띄게 자라더니 금방 꽃이 피었다. 작은 꽃송이가 어울리지 않게 봄을 성큼성큼 데리고 가는구나 싶다. 바라보고 있자니 종소리가 들린다. 내 안에서도 노래가 나온다.


     무스카리


3월의 종소리에는

보랏빛 하늘이 담겼다


곱은 손이 시린 귀를 감싸면

종소리는 아래로 아래로


날아오르는 새

날개 끝에 종소리가 묻어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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