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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문숙 Jun 17. 2024

지난 달력, 비뚤어진

버지니아 울프 <벽 위의 자국>

 책상 앞에 앉아있다가 시선을 조금만 왼쪽으로 돌리면 벽에 달력이 한 장 붙어 있다. 놀랍게도 여전히 3월이다. 달력은 똑바로 붙어 있지도 못하고 반쯤은 들린 상태로 비스듬히 매달려 있는 꼴이다. 기억 속에 그 한 장의 달력이 올바르게 붙어 있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6월도 절반이나 지난 지금까지 거의 매일 비뚤어진 3월의 달력을 보아왔던 셈이다. 물론 볼 때마다 달력을 바꾸어 걸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다만 어쩐지 손이 가지 않았을 뿐이었다. 달력을 볼 때마다 아, 달력 하고는 다음 순간 잊어버렸다. 그렇게 4월, 5월이 가고 오늘은 6월 17일.


  언젠가는 달력이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흔들거리는 걸 보면서 버지니아 울프의 단편 소설 [벽 위의 자국]을 다시 읽어보자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우스운 것은 지난 달력을 좀처럼 바꾸어 달지 못했던 것처럼 도무지 그 몇 페이지 안 되는 단편소설을 펼쳐 들고 읽을 짬이 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지나가 버린 달력이 떠올린 생각은 역시 그만큼 맥이 빠진 채로 흐물거리며 지나가버리기 마련인가. 그리하여 나는 그 작품을 정확하고 꼼꼼하게 다시 읽는 대신 가물가물해진 기억을 헤집어 이야기 속을 둥둥 떠다니기만  여러 번이었다. 벽에서 낯선 자국 하나를 발견하는 것으로 시작되는 이야기였는데 떠올릴수록 소설 속의 화자가 나 같아서 나도 모르게 입을 절반쯤 벌리고 눈을 뜬 채로 꿈꾸듯 몽롱해지기 일쑤였다.


  화자는 처음에 그건 아마 못 자국일 거라고,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그 못에 그림을 넣은 액자를 걸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곧 못자국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크고 동그랗다는 데 생각이 미친다. 화자의 생각은 여름날 오이 덩굴손처럼 뻗어나간다. 중간중간 벽 위에 난 자국으로 돌아오긴 하지만 이제 그것의 실체가 중요한 건 아니다. 못을 박았던 흔적이든 어쩌다 그곳에 붙어있게 된 달팽이든 간에 자국 자체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다만 그 자국이 무엇이든 간에 그걸 가지고 온갖 이야기를 할 수 있다는 게 포인트다. 소설의 주인공은 벽 위에 난 자국이 아니라 화자의 머릿속에서 무한히 뻗어나가는 생각들, 아니 생각할 수 있는 힘, 그러니까 자유로운 상상 혹은 공상이었으리라. 무수히 많은 이야기들이 있었다. 거울과 나무와 보편성의 법칙과 셰익스피어와 남성적 관점과 난롯불과 노란 식탁보 같은(언젠가 다시 읽으면 지금보다 더 조리 있게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왜 벽에 붙어 있는 몇 달 전의 달력을 보기만 하고 그걸 바꾸어 걸지 않는 것일까? 아, 물론 게으름이 가장 큰 이유일 거라는 건 이미 알고 있다. 제 때 걸지 못하여 본분을 다할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고 만 4월과 5월, 두 장의 달력에 대한 미안함일까? 아니 제대로 즐기지 못한 4월과 5월이 아쉬워서일까? 어쩌면 달력 따위 아무래도 좋다는 마음일까? 3월 초입의 어느 날 달력을 걸던 때부터 6월이 된 지금까지 어떤 일들이 있었을까? 제때에 달력을 바꾸지 못할 만큼 나를 사로잡은 것들이 있기는 했던가(샅샅이 뒤져보지만 그런 게 있을 리 없다). 그렇다면?


  아, 맞다. 그건 내가 스스로 만든 '벽 위의 자국'이다. 화장대를 겸하고 있는 작은 책상 앞에 앉고 일어설 때마다 눈에 띄어 잠시 멈출 수 있게 해 주는 자국 말이다. 알 수 없는 삶을 해석하고 명명하고 헤집으며 조용히 있기 위하여. 차분하게, 느긋하게, 홀로, 화내거나 당황하는 일 없이 이 생각에서 저 생각으로 건너뛰고 돌아오기 위하여. 마치 그네를 타는 것처럼 말이다. 살아 있으니 감내해야 할 온갖 일들로 둘러싸인 날들을 달력에 가둔 채로 매일의 날짜 뒤로 깊숙이 가라앉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던가. 밝혀지는 건 아무것도 없을지 모른다. 하루가 스물네 시간이라는 사실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3월의 삶은 6월의 삶으로 이어진다. 냉장고에 붙어있는 달력을 본다. 5월이다. 이런! 달력을 바꾸면 나는 갑자기 6월의 인간이 될까? 똑바로 서게 될까? 눈빛이 맑아질까? 그러니까 내일 달력을 바꾸어 달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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