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오려면 멀었는데

by 라문숙

잠이 깬 걸까? 아직 밤인데? 여긴 엄마네 집, 오후에 도착했고 자리에 누워 불을 끈 게 몇 시간 전일 텐데. 새벽일까? 일어나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밖이 훤하다. 며칠 전에 설거지하다가 둥근달을 보았으니 늦게 뜬 달이 아직 둥근 몸으로 창백한 달빛을 사발에 흩뿌리고 있을 테다. 미적거리며 창문 쪽으로 다가가니 강 건너편이 훤히 들어온다. 야트막한 산 중턱에 집 몇 채가 들어서있다. 집들이 모여있는 곳으로 난 길바닥이 하얗게 빛난다. 겨울밤, 그래 겨울밤은 항상 밝았지. 쌓인 눈 위로 걸음을 옮길 때마다 와드득 와드득 얼어붙은 땅이 울었다. 하늘을 올려다보면 창백한 달이 차갑게 빛났는데 나는 어디를 가고 있었던 걸까. 어쩌면 어딘가에서 돌아오는 중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엄마 집은 아파트 14층, 시선을 거두어 아래를 내려다본다. 알록달록한 미끄럼틀이 또렷하게 보인다. 비어있는 한 밤의 놀이터. 아침이 되려면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 달이 이렇게 밝으니.


핸드폰 화면을 건드린다. 2시 44분. 낭패다. 어쩌자고 이런 시간에 잠이 깨었을까. 다시 눕는다. 잠이 올 것 같지 않다. 양을 셀까? 여행가방을 쌀까? 어둠 속에 누워서 뒤채다가 후다닥 일어나 앉는다. 그래. 이럴 때는 책이 답이다. 몇 페이지 읽지 않아 다시 잠이 들 테지. 가방 속에서 책을 꺼낸다. [풀베개]다. 이번 책정리에서 용케도 살아남은 책. 전철 안에서 시작 부분을 읽다가 숨이 멎는 줄 알았다. 제법 여러 번 읽지 않았나? 혹시 읽을 때마다 매번 이렇게 놀랐을까? 책을 열면 바로 다른 세계, 덮으면 또 다른 세계, 나쓰메 소세키는 그걸 누구보다도 쉽게 해낸다. 어쩌면 잠을 청하는 책으로 적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책장이 느릿느릿 넘어간다. 산길을 걷다가 비를 만나고 노파에게 차를 얻어마시고 늦은 밤 온천장에 도착하고 달빛에 잠이 깨고. 아, 이런. 이 책은 잠을 청하는 게 아니라 잠을 달아나게 하네. 책 속은 난만한 봄.


봄에는 졸음이 몰려온다. 고양이는 쥐 잡는 것을 잊고, 인간은 돈 빌린 것이 있다는 것을 잊는다. 때로는 자기 혼이 있는 것조차 잊어버리고 어리둥절해한다. 다만 유채꽃을 바라다보았을 때는 눈이 번쩍 뜨인다. 종달새 소리를 들었을 때는 혼이 있는 곳이 확연해진다. 종달새는 입으로 우는 것이 아니라 혼 전체가 운다. 혼의 활동이 소리로 나타난 것 중에서 그렇게까지 활기에 찬 것은 없다. 아, 유쾌하다.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유쾌해지는 것이 시다.
나쓰메 소세키, [풀베개]


그대로 아침이 되었다. 식구들은 일어났지만 내가 누워있는 방으로 아무도 들어오지 않는다. 아직 자는 줄 아는 거지. 언젠가 어디 방이라도 얻어서 며칠 동안 먹지도 씻지도 않고 잠만 잤으면 좋겠다,라고 말한 걸 아무도 잊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야 할 것이다. 잊어버리려면. 똑똑, 드디어 노크소리가 들려온다. 아침 먹고 장 보고 짐 챙겨서 차에 오른다. 또 한 번 다녀왔다. 집에 오는 길에는 머리가 조이는 듯 아프고 멀미가 났다. 불면의 밤은 오랜만이었다. 겁이 와락 난다. 입춘이 언제인가 찾아본다. 2월 4일. 봄밤이면 울렁울렁 잠을 이루지 못해도 괜찮을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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