욕심이 많아서

by 라문숙

예열한 오븐에 뭔가를 넣어 굽는 일은 시간이 걸리지만 동시에 또 다른 시간이 생기기도 한다. 오븐이 적당한 온도로 달궈지기까지 혹은 타르트가 완성되거나 그라탕이 완벽하게 구워질 때까지 기다릴 때면 생각지도 못한 시간을 덤으로 받은 기분이 든다. 설거지를 하거나 싱크대 주변을 정리해도 되지만 그러면 어쩌다 받은 선물을 대하는 태도가 아닌 것 같으니 눈을 돌리고 딴청을 한다. 목이 빨간 새가 날아와 마른 잎들을 헤치고 무언가를 물어 나르기를 여러 번이다. 알을 낳으려고 집을 짓는가 보다. 미간을 찌푸리고 창밖을 내다보다가 내처 밖으로 나선다. 작약도 크로커스도 흙무더기를 들어 올리느라 용을 쓰는 태가 역력하다. 상사화는 무더기로 푸르고 명이는 어느새 주름까지 잡혀있다. 매화가 부풀고 앵두와 라일락도 살이 찐다. 겨울을 난 시금치 몇 포기가 당당하다. 봄이 벌써 왔다.


명이, 매발톱, 수선화


지난밤에 만든 쿠키 반죽을 굽는다. 180도에 13분, 시간이 지나면서 버터냄새가 나기 시작하고 초콜릿 냄새가 그 뒤를 잇는다. 오래된 책을 꺼내 뒤적인다. '잣과 시금치를 넣은 타르트'가 있다. 밀가루와 버터를 꺼내 섞는다. 손목이 견뎌내지를 못한다. 아이의 힘을 빌린다. 오늘 점심은 오랜만에 '키시'라고 말해준다.

베이컨을 굽고 양파를 볶아 식히는 사이 시금치를 부드럽게 만든다. 치즈를 듬뿍, 건포도가 없으니 크랜베리 남은 것을 쏟아붓는다. 잣도 한 줌 넣고 섞어둔다. 타르트 쉘을 먼저 굽고 만들어놓은 속재료를 담은 후 샤워크림과 계란 섞은 필링을 붓는다. 180도에 30분이다. 남은 사워크림으로 샐러드드레싱을 만든다. 역시 점심식사용. 애를 썼다. 며칠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면 이렇게 욕심이 생긴다. 잘 살고 싶은 욕심, 잘 먹고 잘 먹이고 싶은 욕심. 하늘 올려다 보고 숨 크게 들이쉬고 마른풀 사이로 새싹을 찾아낸다. 이런 욕심들이 좋다.


잣과 시금치를 넣은 타르트


냉장고가 비어있는 건 아니지만 마땅한 저녁거리가 없다. 남은 키시는 내일 아침 몫이다. 냉동실을 여는데 플라스틱 용기가 뚝 떨어진다. 아슬아슬하게 걸쳐있던 것이 그예 미끄러져 떨어진 모양이다. 얼어있던 용기 뚜껑 가장자리가 드디어 깨졌다. 어쩐지 가슴이 후련하다. 열어보니 돈가스 두 장, 그래 오늘 저녁은 가츠동이야. 버리고 싶었던 밀폐용기가 깨지고 저녁 찬거리가 생겼으니 이게 바로 일석이조다. 저녁준비는 밥만 하면 되겠다. 낮잠을 잤다. 꿈은 없었으니 조금 심심했을까?


봄을 닮은 노란 호박전


씰을 씻어 밥을 안친다. 강황가루 한 스푼을 넣어 휘휘 저었다. 개나리처럼 노란 밥이다. 밥이 다 되는 시간에 맞추어 기름냄비를 올리고 양파와 계란만 준비하면 끝이다. 시간이 또 남는다. 호박 반 토막 남은 게 생각난다. 도톰하게 썰어 볼에 담고 소금을 뿌린다. 금세 물기가 생긴다. 아이 눈물 닦아주듯이 밀가루를 뿌린다. 보송보송해진 호박을 풀어놓은 계란에 담갔다가 달궈진 팬에 올린다. 치지직, 맛있는 소리다. 나를 위한 반찬. 뜨거울 때 먹을 수 있는 건 만드는 사람에게만 허락된 호사.



사는 게 뭐 그리 어려울까.

냉장고 문 열었을 때 "나, 여깄어요" 하고 나타나는 아이도 있는데.

겨우내 눈길 한 번 안 주었어도 어김없이 돋아난 아이들도 있고.

겨울잠에서 깨어난 곰처럼 느릿느릿, 다시 태어난 사람처럼 어릿어릿, 무엇이든 처음처럼 조심조심,

그런 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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