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과 정기검진을 했다. 처음 병원을 찾게 했던 증상은 사라졌지만 시력은 많이 나빠졌고 완전한 회복은 어려울 거라고 했다. 나이가 들기도 하셨으니까라고 덧붙이는 의사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를 만나기 전부터도 안약을 넣고, 기다리고, 어두운 검사실에서 몇 번의 사진을 찍는 동안 내내 말 잘 듣는 아이가 되어있었다. 시키는 대로 턱을 대고 이마를 붙이고 눈을 깜박이고 숨을 멈추었던 것처럼 나는 순응했고 또 포기했다. 그렇게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조금씩 더 순한 사람이 되었다. 일상생활에는 문제가 없고 여전히 읽고 끄적일 수 있으니까 괜찮다고 생각하면서.
처음 안과를 찾았을 때는 오래 읽을 수도 없었고 쓰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모니터를 바라보면 눈이 부셨고 공책에 쓰려고 하면 초점이 안 맞았다. 책을 펼친 채 멍하니 앉아 있거나 모니터 앞에서 눈을 깜빡이다가 시선을 먼 곳으로 향하면 거기, 창문 밖에 숲이 보이고 하늘이 보였다. 유난히 비가 잦은 여름이었다. 비에 젖은 나뭇잎들이 바람소리에 따라 물결이 일렁이듯 느리게 움직였다. 나는 점점 멍해졌다. 그리고 쉽게 지쳤다. 항상 피곤했다. 겁이 와락 났다. 이것도 나이가 든 탓일까?
나는 느려지기 시작했다. 고장 난 눈은 좋은 핑계가 되었다. 모든 회피와 미적거림과 게으름에 단 하나의 핑계가 있었다. 바로 눈의 고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에서 방으로 움직일 때마다 책을 들고 다녔다. 어쩌면 이제 예전처럼 읽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기에 더욱 책을 놓지 못했는지도 몰랐다. 의심은 불안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서 공포가 되었다. 어느 날은 시력을 잃는 꿈을 꾸었고 어느 날은 눈이 예전보다 더 좋아지는 꿈을 꾸었다. 아침에 일어나 갑자기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알아도 하나도 이상할 것 같지 않았다.
사람들이 내게 눈은 어떤가 물으면 나는 괜찮다고, 좋아지고 있는 중이라고 대답하지만 그건 정확한 대답이 아니었다. 이렇고 저렇다고 설명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었다. 아픔이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일인 것이다. 망막 주사를 맞고 나온 후 대기실에 앉아있던 남편에게 내가 처음 한 말은 “아파!”였다. 그 말을 하는 순간 신기하게도 아픔이 조금 가시는 것 같았다. 나는 마음대로 아픈 사람이 되어 보기로 했다. 매일 아픈 곳을 새롭게 찾아냈다. 예전과 다른 증상의 온갖 두통 – 두통에 얼마나 많은 종류가 있다고 생각하는지 – 어지럼증, 속 쓰림, 어깨 결림, 엄지발가락의 통증까지. 그동안 나는 건강을 연기했던 사람이었는지도 몰랐다. 새로운 증상을 발견할 때마다 식구들에게 얘기해 줬다. 무심한 듯 아프다고 중얼거리는 삶이 얼마나 무책임하고 자유로운지 알게 되었을 때의 홀가분함이 신기했다. 아픔과 사랑에 빠진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나였다.
일상이 점점 단조로워졌다.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에는 시선도 두지 않았다. 잘 보이지 않으면 고개를 돌려 버렸다. 책임감을 접고 판단력이 유보된 상태의 하루하루는 도리어 평온했고 느리게 읽어내는 문장들은 압도적이었다. 선명하지 않아도 삶은 여전히 아름다울 테고 세상의 모든 책을 읽어버릴 수 없음을 인정했다. 나이가 들어도 괜찮을 듯했다. 글을 느릿느릿 읽어갈 것이고 어쩌면 그보다 더 느리게 짧은 글들을 쓸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안경을 떠올린 건 그즈음이었다. 안경을 쓰면 세상을 조금 더 잘 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안경원에서 교정용 안경을 쓰고 바라본 풍경은 경이로웠다. 안경원 밖으로 몸을 내밀어 이웃하고 있는 점포들을 내다보았을 때 나는 그만 눈을 감아버렸다. 간판에 쓰인 글자들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였다. 금방이라도 간판에서 떨어져 나와 내게 달려올 것 같았다. 멀미를 할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새로 맞춘 안경을 벗어서 가방에 넣고 집에 돌아왔다. 안경을 책상 위에 올려 둔 채 그대로 두었다. 익숙해지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며칠을 그대로 버텼다.
안경을 쓰고 나간 마당에는 식물과 고양이 외에도 많은 것들이 있었다. 안경은 보고 싶은 것만 보여주지 않았다. 거미줄과 애벌레, 지렁이와 민달팽이가 보였다. 잘 보여서 오히려 불편했다. 보고 싶지 않은 것들과 있는지도 몰랐던 것들을 알게 되자 지금까지 익숙했던 마당이 낯선 곳으로 변하고 말았다. 속은 기분이 들었다. 내가 알고 있던 세상보다 훨씬 더 선명하고 복잡한 세상 앞에서 어쩐지 자신이 없어졌다. 잘 안 보여 답답했던 시야가 오히려 날 보호해 왔던 걸 알게 됐다. 그렇지만 새로 발견한 세상을 모르는 척하는 것도 어려웠다. 안경을 쓰고 움직인 만큼 공간은 넓어지고 경계는 확장되었다. 세상과의 거리가 가까워진 만큼 요구도 많아졌다. 구름이 걷히듯이 천천히 정체를 드러내던 사물과 사람들은 완벽하게 모습으로 느닷없이 나타나곤 했다. 익숙한 장소의 낯선 모습에 눈이 부셨다. 안경은 내가 떠나온 세계와 도착한 세계를 가르는 물건이었다. 나는 가방 속에 타임머신을 넣고 다니는 시간 여행자처럼 안경을 가지고 다녔다. 차츰 안경에 익숙해졌다.
온갖 곳에 글자가 있었다.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글자들이 안경을 쓰자마자 시야에 들어왔다. 방향을 가리키고, 사용방법을 알려주고,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주는 그 문장들 앞에서 그동안 내가 놓친 것들을 떠올렸다. 세상이 본래 어떠했는지 몰랐던 게 아니라 외면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의심했다. 문득 거울 속 얼굴을 유심히 살폈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나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른 여자의 모습에 놀랐다. 잘 안 보였기 때문이었을까? 시력이 좋았으면, 매일 유심히 보았더라면 지금보다는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되었을까? 기미가 덜 생겼을까? 주름이 생기지 않았을까? 그랬으면 지금쯤 나는 표정이 풍부한 사람일까? 다정한 사람이 되었을까? 혹시 잘 안 보여서가 아니라 보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건 아니었을까?
나는 시작하는 사람처럼 서서 묻는다. 이제라도 제대로 볼 수 있을까? 그러니까 보이는 것들은 물론 사물의 뒷모습과 침묵하는 마음까지 살필 수 있을까? 매일이 소란하고 부산스러운 건 그 속에 비밀을 품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제멋대로 자라난 관목들이 엉켜있는 어둡고 축축한 숲에서 그만 길을 잃지는 않을까? 어쩌면 세상은 본래 이런 곳이었을까?
매일 만나는 ‘처음’과 ‘다시’를 이정표로 삼아 낯선 것들의 숲으로 걸어 들어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본다.
문예지 [시와 산문] 여름호에 기고한 글입니다. 도착한 책을 읽고 조금 수정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