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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산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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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영준 Jun 21. 2024

산양의 얼굴을 한 사내

한계리 외톨박이 정준교

   

강원도 인제군 남면 관대리. 지금은 시속 80킬로미터로 차들이 달리는 44번 국도 인제대교 아래, 소양호에 잠긴 그 물밑이 정준교 씨의 고향이다. 소양강댐을 착공한 것이 1967년이라, 그 또한 코흘리개 적 기억들이 가뭇할 것이리라. 마을이 수몰된 이후 원통으로 이사를 갔다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원주로 나갔다. 한동안의 도시생활을 청산하고 그가 다시 설악산 자락으로 들어온 건 20여 년 전, 1993년의 일이다. 그때 자리 잡은 곳이 한계리였다.



“공군기술고등학교를 다녔는데, 1학년을 마치고 75년 1월에 선배들과 설악산엘 처음 왔어요. 그 뒤로도 한두 명이서 어울려 설악을 찾다가 혼자서 다니기도 했죠. 졸업 후에 수원비행장에서 일했어요. 그러다 몸이 좀 안 좋아져서 고향엘 온 거죠. 어릴 적부터 어떻게든 고향에 가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어요. 마침 인제에는 누나도 살고 있고, 친구들도 있고 해서 돌아온 것이지 꼭 산 때문에 온 건 아니에요.”


한계리에 터를 잡고 처음 1~2년간은 주변 낮은 산을 다니기 시작했다. 대청봉은 일주일에 한 번쯤 올랐다. 처음 고등학교 때 다닐 때 선배들이 들려주었던 산에 관한 이야기 때문이었다. 


“큰 산에 오르기 전에는 먼저 산과 마음을 맞춰야 한다고 했어요. 때문에 산 밑에서 하루를 자고 오르는 거라고. 나도 대청엘 가고 싶은데 무작정 올라가서는 안 될 것 같은 생각이 들어 주변 낮은 산들부터 오른 거죠.”


신앙처럼 시작한 그의 등산관은 그래서 산과 사람을 보는 정직한 시선을 만들어냈다. 


“얼마 전부터 국립공원에서 하는 샛길조사에 참여하고 있는데, 어느 작은 골짜기에를 가도 사람을 만나요. 그런데, 그런 곳에서 혼자 다니는 사람 중엔 옷 잘 입고 좋은 배낭 멘 이 없어요. 다 떨어진 허름한 꼴이 꼭 거지 같죠. 저기 중청대피소에 삼겹살에 술 사들고 떼로 올라가는 사람들은 옷 잘 입죠. 보여주고 자랑할 상대가 있으니까.”


정준교 씨는 2006년 한계리 수해 때 모든 것을 잃었었다. 물살이 거대한 장벽처럼 덮쳐오던 당시 정말로 몸만 빠져나와 한동안 컨테이너 박스에서 살아야 했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별로 잃은 게 없다. 처음부터 곳간에 쌓아둔 게 없었으니까. 옷은 그가 등산학교 강사로 활동하고 있는 코오롱스포츠에서 도움 받았고, 주변 산꾼들에게서도 크고 작은 도움을 받았다. 민박촌에 있던 집들이 다 떠내려갔기에 지금은 자리를 옮겨 한계령 초입에 ‘한계매점’을 운영하며 한쪽에 딸린 방에 세를 얻어 아내와 살고 있다. 그는 아직도 바람 불고 비가 많이 오는 날은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그는 설악에 들어온 지 3년 남짓 된 1996년부터 내설악산악구조대에서 대원으로 활동해 왔으며 지금은 자문을 맡고 있다. 특별히 어떤 사명으로 시작한 일은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그때 구조대장을 초등학교 동창이 맡고 있었어요. 마침 당시는 국립공원에서 입장료를 받을 때였고, 나는 산에 매일 가고 싶은데 돈을 내기는 싫으니 친구에게 나도 좀 대원증을 만들어달라고 부탁을 했죠. 그런데 이놈이 출동만 걸리면 내게 전화를 해오는 겁니다.”


구조대원을 하다가 사람들을 알게 되고, 그렇게 전문등반도 좀 배우게 되고, 연이 되어 스포츠클라이밍 심판 교육도 받게 되다 보니 대한산악연맹 일도 하게 되고, 그렇게 그의 산에서의 삶은 넓어져왔다. 지금은 없어진 옥녀탕 휴게소를 관리하며 그 앞에 아갈바위 코스들을 개척하기도 했던 그는, 요즈음엔 인제나 원통의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스포츠클라이밍이나 등산에 대해 교육을 하기도 하고, 속초의 대학에서 응급구조학을 강의하기도 하며 지낸다고 했다. 어쩌면 오래도록 산과 가장 가까운 이곳 인제에서, 정작 ‘산사람’은 있되 ‘클라이머’는 나오지 았았던 속에서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컸다. 


“처음 구조대를 할 때만 해도 대원들이 전부 장화를 신고 다녔어요. 조난자는 등산화에 기능성 옷을 입고 있는데 말이죠. 서울에 가서 조금 싼 등산화라도 전부 구해와 대원들에게 신기고, 등산학교도 보내 전문등반 교육도 받게 했죠. 그런데 토박이들 생각을 바꾸기가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외부에서 이곳에 오는 사람들에 비해 쳐지게 되면 힘들지 않으냐고 해도. 산골에 살면 시간이 많이 남는데 대부분 술 마시고, 낚시하고,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라 자기 계발을 위한 노력이 적다는 겁니다.”


답답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던 그는 “이제는 구조대원들이 공단에 취직을 많이 하다 보니 구조대 자체의 응집력이 그전 같지 않다. 사고가 나도 대원들이 직원이 되었으니 공단에서는 직원에게 지시하듯 구조하면 되는 것이지, 민간구조대에까지 요청을 하지 않는다”라고 아쉬움을 내비쳤다.   


“후배들을 위해서 자리를 마련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옥녀탕 휴게소도 산악인들의 보금자리처럼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결국 문을 닫았죠. 주변에선 내가 욕심쟁이인 줄 아나 봐요.”


산에 갈 때마다 수많은 동물의 사체를 만나곤 하는데, 그중 절벽에서 떨어져 죽은 산양을 보면 그 뿔만은 꼭 잘라서 가져온다는 그는 한계매점을 뒤로하는 내게 작은 산양 뿔 두 개를 내밀었다. 


“산양 뿔에는 나이테가 있어요. 이 주름 하나가 일 년이래요.”


저 장수대 어디쯤의 절벽에 서서 굽은 한계천을 내려 보는 외톨박이 산양의 얼굴을 한 사내가 앞에 있었다.  

201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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