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명산-청양 칠갑산
“칠갑산은 다 좋지유.”
“그게 그냥 산이지유 뭐.”
칠갑산에 대한 청양사람들의 의견은 엇갈렸다. 이것저것 따질 것 없이 다 좋다는 의견과 별 볼일 없다는 상반된 해석이 반반이었다. 청양고추처럼 톡 쏘는 매운맛이 칠갑산에 있으리라 기대했다면 헛다리짚은 것.
충청남도 청양군 대치면과 정산면, 장평면에 걸쳐있는 칠갑산(561m)은 전형적인 육산이다. 아니, 육산 골산을 논하기도 전에 그저 청양의 ‘뒷산’쯤 되는지도 모른다. 그곳에 멋들어진 계곡이 있나, 기암괴석이 있어 찾는 이들의 눈길을 빼앗나, 하다못해 숨이 턱턱 막히게 높아서 오르는데 하루 나절이나 걸리는 것도 아니기에, 칠갑산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종합해 보자면 칠갑산은 “증말로 거시기 하지유”로 결론 나는 꼴이었는데, 이런 산이 오랜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고장의 진산으로 여겨져 온 까닭은 무엇일까.
칠갑(七甲)이라는 이름부터 심상치 않다. 전해오는 바로는 삼국시대 시가 중 도솔가에 등장하는 ‘칠악’이라는 이름에서 칠갑산의 뿌리를 찾는다. 옻나무가 많았는지 옻나무 칠(漆) 자를 썼는데, 이후 백제의 수도가 웅진(공주)과 사비(부여)로 천도하며 그들의 산천숭배사상에 따라 명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많이 치러졌다고 한다.
옻나무 산이라는 평범한 이름보다는 그에 걸맞은 멋들어진 다른 이름이 필요했을 터. 칠갑산의 뜻은 천지만물을 생성한다는 칠원성군(七元星君), 즉, 풍(風), 수(水), 화(和), 화(火), 견(見), 식(識)과 육십갑자의 으뜸인 갑(甲) 자를 써서 새롭게 태어난 것이라고 전한다. 다른 한편으로는 갑옷을 입은 일곱 명의 장수가 나올 명당이라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도 전해지는데, 어쨌든 옛사람들은 칠갑산이라는 이름에 그들이 표현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를 부여한 것이다.
칠갑산의 산세는 두루 뭉실하다. 하지만 대부분의 세상 이치가 그렇듯 낮고 작은 데서도 깊고 넓은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적어도, 산은 사람과 같아서 아무리 낮은 산이라도 파고들다 보면 세상 어느 높은 것과도 비교우위를 따질 수 없는 저만의 독특한 매력을 품고 있기 마련. 561m라는 숫자는 칠갑산을 이해함에 앞서 별로 중요치 않은 것이다.
‘콩밭 매는 아낙네’로 알려지기 전까지 칠갑산은 세상에 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그냥 산’이거나 ‘다 좋은 산’ 일뿐 칠갑산은 중앙무대의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보다 장날 멍석 위에 선 장돌뱅이들의 구성진 가락처럼 ‘낮은 오지’ 청양에서 조용히 숨 쉬고 있던 것이다.
청양 땅은 예부터 사람들의 피난처가 되었다고 한다. 인민군 정규부대가 주둔하지 않았을 뿐 전쟁의 여파는 있었다는 등 증언이 엇갈리지만, 한국전쟁 때도 총소리 한번 들리지 않았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 다소 과장이 있었더라도 세상의 이해와는 단절된 평화를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의견에 대해서는 칠갑산에 기댄 장곡사를 찾아보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대웅전이 두 개이고 탑이나 부도도 없는 장곡사는 본래 죄를 지은 스님들이 잠시 들어와 마음을 씻고 가는 곳이었다는 해석도 있는데, 아담한 규모와는 다르게 국보 2점과 보물 4점이 보존되어 있다. 공주 마곡사의 말사인 이곳에 여간한 다른 큰 사찰보다 많은 문화재가 온전히 남아있을 수 있던 이유는, 달리 생각해 보면 그만큼 외침을 받지 않았다는 반증이다. 하지만 사람들의 손길을 덜 탄 땅, 그래서 청정한 숲과 계곡이 살아 금강으로 흐르는 지천의 원류가 되는 땅, 칠갑산의 모습은 정말 그것뿐일까.
칠갑산을 이야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대중가요 ‘칠갑산’이다. 작사가 조운파 씨는 1978년 한티고개를 지나며 아낙네들이 밭을 매는 장면을 보고 영감을 얻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콩밭 매는 아낙네야 베적삼이 흠뻑 젖는다 / 무슨 설움 그리 많아 포기마다 눈물 심누나 / 홀어머니 두고 시집가던 날 / 칠갑산 산마루에 / 울어주던 산새소리만 / 어린 가슴속을 태웠소’ - 가요 ‘칠갑산’
노랫말을 보고 있자면 칠갑산에 기댄 사람들의 삶은 불행하고 서럽기 그지없다. 그것은 세상과 동떨어진 평화와는 다른 현실적 가난에서 오는 것인데, 도시민들이 체험할 수 없는 막연한 세계의 또 다른 이면인 것이다. 먹을 것이 없으니 산간 비탈이라도 일구어 콩을 심었을 테고, 입 하나라도 줄이기 위해 어린 딸을 민며느리로 시집보내는 풍습은 멀지 않은 과거까지 이어져 온 빈농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청양 읍내에 들어서자 한미 FTA(자유무역협정)를 반대하는 지역 농민회의 현수막이 곳곳에 걸려있었다. 청양을 구성하는 인구 대부분은 농민이기에 여느 농촌과 다르지 않은 풍경이었지만, 주변을 취재하며 농기계상에서 한 가지 역설적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청양에서 대부분의 경제활동 인구는 주변 도시에서 출퇴근을 하는 공무원으로, 이곳도 농업을 생계로 하는 인구가 줄고 있지만 콩 탈곡기 등 농기계 판매는 줄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이유로는 미국 쌀이 수입되며 쌀농사를 짓지 않고 다른 작물을 심으려는 농민이 늘기 때문이라는데, 특화작물에 대해서는 정부 보조금이 일정 지급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배고픔을 달래기 위해 콩을 심었던 사람들은 이제 또 다른 생존을 위해 방법을 찾고 있다. 칠갑산에는 이제 ‘콩밭 매는 아낙네’에서 ‘콩밭 매는 트랙터’가 늘어나지는 않을까.
꼭 배고픈 이야기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지금은 청양을 떠올리며 으레 고추나 구기자를 이야기하지만 그곳은 사실 노다지가 묻혀있는 땅이었다. 1911년부터 채굴을 시작해 일제가 운영하다 1971년까지 계속되어 온 청양군 남양면 구봉광산은 한때 우리나라 금 생산량의 60%를 차지할 정도였다. 1967년 양창선 씨가 매몰되고 16일 만에 구조되어 세상의 주목을 받았던 그곳에는 지금도 간간히 사금이 나온다지만 광산 터는 국제 사격장으로 탈바꿈해 옛 흔적은 찾기 힘들다.
청양군에서는 얼마 전 <면암집>을 새로 펴냈다. 면암 최익현 또한 칠갑산을 들먹이며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한티고개 정상에 그의 동상이 있을 정도로 최익현은 청양 사람들에게 정신적 지주이기도 하다. 본래 이곳 출신이 아니지만 한때 지금의 면소재지인 정산현감을 지내며 일제에 항거해 의병을 일으키고 독립운동에 앞장섰다.
단 4년을 청양 땅에서 머물렀을 뿐이지만 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람들에게 추앙받는 것을 보면, 그가 일제에 유배당해 쓰시마 섬에서 곡기를 끊고 굶어 죽을 때 떠올렸던 땅이 혹시라도 이곳 청양이 아니었을까.
석양이 지는 칠갑산을 보면 굽은 나무가 선산 지킨다는 말이 떠오른다. 그 말처럼 장곡사도, 그 절을 품고 있는 칠갑산도, 그들을 아우르는 청양 땅도 모두 느릿한 충청도 사투리로 ‘그저 그런 것이지유’ 끝을 흐리는 것 같다. 두루 뭉실, 있는 듯 없는 듯, 그런 듯 아닌 듯, 베적삼이 흠뻑 젖도록 벙어리 가슴을 두들기는 곳. 나는 또박또박 칠갑산을 써낼 수가 없다. 말더듬이처럼 그 이름을 입 속에서 굴릴 뿐이다.
-2006년 9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