뱅쇼에 넣는 건 계피일까 시나몬일까?

'안다고 말하는 것'의 무거움이란

by 민트초코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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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 남은 와인이 있어 뱅쇼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과일을 넣고 끓여낸 뱅쇼의 맛이 뭔가 부족하다. 생각해보니 계피가 가진 살짝 맵고 강렬한 향이 없어 허전함이 느껴졌다. 홀짝홀짝 마시면서, 이 공허함을 채워주기 위한 무언가를 생각해 본다. 그런데 여기에 넣는 건 계피일까? 시나몬일까? 생각이 여기에까지 이르자, 지금까지 계피와 시나몬에 대해 오해했던 부끄러운 개인사(史)가 생각났다.



시나몬이라는 단어를 처음으로 마주친 곳은 학교 옆 어느 카페였다. 평범한 음료인 아메리카노와 카페라테 밑으로 '시나몬' 카푸치노가 메뉴판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쩌면 카푸치노에는 꼭 시나몬 가루가 있어야 한다는 사장님의 철학이 반영된 있는 걸 지도? 어차피 그 시절 나는 카페라테와 카푸치노가 뭐가 다른 지조차 몰랐었기에, 막연하게 '시나몬 가루를 뿌리면 카푸치노가 되는가 보다'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갔다.


생각도 하지 못하던 계피와 시나몬의 관계성을 알게 된 것은, 인터넷에서 조롱이 가득 담긴 짤을 하나 보고 나서다. 커피=자판기 커피라는 공식이 성립하던 시절이었다. 인터넷에서는 일반 커피보다 10배는 비싼 스타벅스를 즐기는 사람들에 대한 갖은 조롱이 넘쳐났다. 그중에서도 유명한 내용 중 하나가 '계피는 싫지만 시나몬은 좋다'로 시작하는 글이다. 마늘빵보다 갈릭브래드, 장화보다 레인부츠처럼 영어만 쓰는 허영에 찬 사람들에 대한 비난이었고, 나아가서는 외국의 것만을 좋아하는 사람들에 대한 공격이었다.


부끄럽게도 댓글을 보고 나서야 역으로 시나몬이 계피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제야 찾아본 영어사전에도 cinnamom은 분명 계피라고 나와있었다. 그 당시 나는 영어를 잘 못하는 열등감을, 한글과 영어를 섞어 쓰는 사람에 대한 반감으로 표출하고 있었다. 그래서 저 조롱의 대열에 당당히 합류하였다. 온라인은 물론 모임에서도 허영에 빠진 사람들을 비판할 때면 '계피는 싫지만 카푸치노에는 시나몬을 뿌리는 사람들'을 주로 인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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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작년, 즐겨보는 유튜버인 승우아빠의 영상을 정주행면서 눈에 들어온 제목이 있었다. '시나몬 향은 고급스러운데 계피향은 아저씨 같아요'(영상링크) 라는 영상이다. 지금까지 생각하지도 못하던 두 향신료의 차이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 우리가 계피라고 부르는 것은 'Cinnamonium cassia'고, 시나몬이라고 부르는 것은 'Cinnamonium verum'이라고 한다. 게다가 향신료로 쓰면 색, 맛, 향 모든 것이 다르므로 별개로 보는 게 맞다는 주장이었다.


사전을 찾으면서까지 확인했던 지식이 산산조각 나는 순간이었다. 게다가 그 잘못된 내용을 여기저기 떠벌리고 다녔다니, 몹시 부끄러웠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가 사실은 '네가 아무것도 모르는 것을 알라'라고 한다. 그 무지함을 깨달았을 때 느끼는 감정이 이런 것일까. 결국 계피와 시나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동안 알지 못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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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2% 부족한 뱅쇼로 돌아왔다. 계피와 시나몬 중 무엇을 넣어야 하는지 인터넷에서는 딱히 정답을 찾을 수는 없었다. 생각해보니 향신료니까 취향에 맞게 쓰면 될 일이다. 계피가 좋으면 계피스틱을, 계피는 싫지만 시나몬이 좋으면 시나몬 스틱을 넣으면 끝! 다른 걸 쓴다고 해서 서로 뭐라 할 일도 아니다. 다만 오늘은 아무것도 준비하지 못했으니, 가벼워진 맛 대신에 '안다고 말하는 것'의 무거움으로 가득 채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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