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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일 만나 May 10. 2020

나이 서른여덟, 짝사랑을 시작했다.

서른여덟에,

짝사랑을 안 해 본 것은 아니다.

집으로 가는 학원 셔틀버스에서 마주치는 아이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마음대로 그 아이를 상상하고 마음을 키웠다. 그것이 첫, 짝사랑이었다. 과감하게 밸런타인데이 때 초콜릿 상자를 건넸다. 아직도 어리둥절하던 그 아이의 눈빛을 기억한다. 그날 이후로 그 학원버스는 타지 못했다.


두 번째 짝사랑은 같은 과 동기였다.

이성적으로 매력 어필이 부족하다 여긴 나는 일단 친구부터 시작해야지 싶었다. 어찌나 순수했던지, 오랜 시간 곁에 있으면 언젠가 나의 매력을 발견해 줄 거라고 믿었던 것이다. 혼자 울고 웃는 시간을 거쳐 진정한 베프로 거듭난 나는, 과 CC로 10년 연애하고 결혼한 그 친구의 결혼식에 각각 10만 원의 축의금을 냈다.


그렇다고 연애를 못 해본 것은 아니다. 늘 생각지도 못했던 대상과 자연스럽게 연애를 시작했다. 다만 내가 먼저 호감을 느껴서 잘 된 적이 없었을 뿐.


늘 애를 쓰고 애가 닳았던 연애는 상대방에게 응답받지 못했다. 고백조차 하지 못하거나, 고백하면 단칼에 거절당했다. 이미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다. 노력만으로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순 없다는 것을. 그동안의 데이터로 보면 나의 짝사랑의 성공률은 완벽하게 0%다. 다시는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또 그 가능성 없는 사랑을 시작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에 내 기분이 좌지우지되는 그 찌질한 짝사랑을...


스치듯이 민둥산에 억새 보러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 주말 민둥산에 가자고 했다. 아, 내가 하는 말을 다 기억해주는구나. 그러고 보니 내가 뭐 먹고 싶다거나 보고 싶다거나 가보고 싶은 곳을 얘기하면 꼭 함께 해주었다는 걸 처음 깨달았다.

맛집을 발견하면 톡을 보내 같이 가자고 했다. 유명한 빵집을 갈 때는 빵을 사다 주고는 했다. 주변에서 그냥 친군데 그렇게까지 해?라고 말했지만 딱히 잘해준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나도 그 정도는 해주니까 얘도 나한테 그 정도는 해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전까지는.


만나는 횟수가 빈번해지기 시작했다. 이틀 연속 만난 날 집 앞에 내려주고 내일 보자며 가는데 마치 연인이 하는 말 같았다. 괜히 얼굴이 붉어졌다.

약속이 있다고 하면 누구인지 궁금하게 되고 소개팅을 한 이야기를 들으면 화가 났다. 다른 여자한테 잘해주는 걸 상상만 해도 참을 수가 없었다. 순간의 감정이라고 여겼다. 내 감정을 추슬렀다. 착각일 거라고 넘긴 것이 벌써 두 번째다.


하지만 소개팅 상대를 이 친구와 비교하고 있는 걸 발견하고는 더 이상 나를 속일 수 없다는 걸 알았다. 소개팅에 실패했다는 것보다 그 친구를 많이 떠올렸다는 게 더 충격적이었다.

어리숙해 보이는 얼굴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없다. 보조개를 보이며 베실 베실 웃는 게 귀여워 보이기까지 한다. 답답하다고 느꼈던 말투에 가슴이 따뜻해지고 무심코 챙겨주는 다정함을 독점하고 싶어 졌다.


왜 10여 년이 지나서야 이런 감정이 들게 된 건지, 이미 친구라는 틀 안에 맞춰져 있어 노력해봐도 역효과만 난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서 몰랐던 그 친구의 감정이 느껴진다. 아마 그 친구는 늘 같은 모습이었을 거다. 내가 달라져서 이제는 쉬이 넘기지 못하고 말투 행동 하나하나에 의미를 부여하고 눈치를 보고 있다.


예전 같으면 다짜고짜 고백 먼저 했을 거다. 거절당하면 친구 잃을 각오쯤도 했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내 마음 다칠까 봐 내 마음 편하자고 할 수가 없다. 상대가 당황할까 봐 고백도 못하겠다.


한 번도 다른 사람의 감정이 내 감정보다 우선인 적이 없었다. 이런 생각이 든 것도 처음이다. 낯설지만 이런 내가 마음에 든다.


그 친구에게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돌아보게 만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늘 내 곁을 든든히 지켜준 친구처럼 나도 그 친구를 이해해주고 존중해주고 편이 되어주는 그런 사람이 한 번쯤은 되어 주고 싶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끝까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이런 생각을 하게 해 주어서 참 고맙다. 이 감정이 소중하다. 그래서 아플지도 모르지만 그 친구를 향한 짝, 사랑을 시작했다.


가능성 없는 일에 매달리지 않는 이 나이,


남들은 사랑이 다 뭐냐, 결혼하고 애 둘은 낳았을

서른여덟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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