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집에 돌아와 밖에 엄마가 널어 둔 빨래를 걷어와 갠다. 개면서 이 지겨운 걸 어찌 엄마는 맨날 할까 생각한다. 빨랫감에서 다시 제 이름이 붙여진 것들을 제자리에 놓는다. 하얀 유니클로 남방을 물높이 소에 맞추고 단독으로 돌린다. 50분여를 기다리는 동안 집 앞에 3일째 널어놓은 고추를 걷는다. 양이 생각보다 많아서 낑낑대고 있는데 뒷집 할머니가 30미터 옆 텃밭에서 말을 걸어온다. 난 속으로 '한 번 말 걸면 20분은 얘기할 텐데...'라며 솔직히 처음에 못 들은 척하고 안 쳐다봤다. 근데 점점 그녀는 내게 다가온다. 어쩔 도리가 없다. "그거 3일 정도 말려 놓았으니까 우리 집에 갔다 놔. 우리 기계로 갈게." 그리곤 끝이었다. 역시 경험은 완벽하지 않다. 이렇게 심플할 줄이야. 게다가 호의를 의심했다니.
집에 들어와 남방 상태를 본다. 주황색 꽃가루 같은 게 묻어서 떼려다가 아름답게 번진다. 열을 동반한 짜증이 훅 올라온다. 대야에 남방을 넣고 비누칠을 해서 뜨거운 물에 두 번 헹구어 담가놓는다. 별 효과가 없는 것 같지만 기다려 보기로 한다.
설거지를 할까 말까 고민한다. 그릇이 별로 없다. 그렇다면 하기로 한다. 식탁 위에 라면 국물과 남은 밥들이 있다. 버릴까 하다가 우리 집에 있는 변견은 사료보다 사람 밥을 더 맛있어해서 그들에게 넘기기로 한다.
남방을 대야에서 꺼내 다시 세탁기에 돌린다. 그동안 청소기를 돌린다. 우리 집은 전원주택인데 아버지가 솜씨가 좋아서 집을 레고하듯 막 늘려놓으셨다. 혼자 청소하기엔 꽤 짜증 난다. 그래도 운동한다 생각하고 과정을 즐기기로 한다. 너무 즐겁다. 스스로 꽤 뿌듯하다. 그 찰나 늘어났다 줄어들었다 하는 고무 재질로 된 청소기 목에 뭔가가 보인다. 이쑤시개가 삐져나왔다. 뚫렸다. 사람이라면 갈치 먹다가 가시가 목 밖으로 삐져나온 것이다. 숨 쉴 때마다 시원하지 않고 어딘가 새는 느낌인 것이다. 내가 글로 이렇게 침착하게 옮겨 적어서 그렇지 엄청나게 심각한 상황인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문화인이니까 이게 인생이구나 싶어 일희일비하지 않기로 한다. 테이프를 엄마 몰래 붙여놓는다. 테이프 발명하신 분 사랑합니다.
바닥 걸레질을 한다. 역시 시끄러운 청소기보단 조용하고 미끈한 밀대가 좋다. 밀대 같은 여자를 만나고 싶다고 생각해본다. 스스로 어이없어 혼자 웃는다. 엄마가 이상하게 쳐다본다.
집안일은 끝이 없다. 다른 빨래 또 하고 널고 하니 저녁이 사라졌다. 엄마는 그런다. "엄마가 안 치우니 아들이 치우네. 고마워 아들." 가끔 이럴 때마다 반복하는 엄마의 유행어다. 예전엔 칭찬받으려 했었는데, 지금은 그저 나를 지키려고 한다. 나는 쓸모가 있다, 도움이 되는 사람이다, 라며 자존감을 높이려는 지극히 이기적인 행동이다. 이기적인 행동이 누군가를 기쁘게 한다니 참 이상적인 오늘이다. 안타까웠던 건, 내가 얼마나 못났으면 엄만 이런 걸로 기뻐할까, 란 생각이 들어서. 빨래 끝났다. 꺼내러 가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