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o. 불완전한 모두에게
불합리한 관계와 내면의 취약함의 공존은 한 사람을 한없이 작아지게 한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대게 '사랑'이라는 형태를 바탕으로 생성되곤 한다. '사랑', 가장 유약하고도 가장 강인한 이 단어는 어쩌면 우리를 불완전한 인간으로 만드는 주된 원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여기, 사랑이 빚어낸 불완전한 인간상을 담은 편지가 있다.
[To. X]는 앨범명에서부터 알 수 있듯이 편지를 콘셉트로 잡은 앨범이다. 모든 곡은 X와의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고, 곡 소개글 또한 일반적인 형태가 아닌 편지글의 형태를 띤다. 기존 태연의 앨범과 비교해봐도 음악적인 설명 없이 오직 곡의 주제만을 기술한 소개 글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는 아마도 태연의 솔로 활동 중에서 처음으로 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전략 때문일 것이다. 뛰어난 보컬 역량으로 사운드나 퍼포먼스에 힘을 실으면 엄청난 앨범이 탄생하고, 또 그게 본인의 특기를 활용한 전략이기도 했기에 주로 음악 쪽에 비중을 가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이번은 음악에 힘을 한껏 덜고 서사에 몽땅 실은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물론, 간간이 '11:11'이나 '사계', 'What do i call you' 등을 통해 사운드에 힘을 덜은 곡을 발매하기도 했지만, 대놓고서사를 전면에 내세운 적은 없었다. 그렇기에 사실상 이번 앨범은 편지라는 칭호를 붙여도 무방할 정도이다.
편지는 X에게 전하는 나의 뒤늦은 깨달음인 'To. X'로 문을 연다. 해당 곡은 굉장히 가벼운 사운드를 자랑한다. 반복되는 기타 리프와 무난한 드럼 비트로 특별한 것 없는 진행을 보이지만, 보컬이라는 최대 악기를 얹으며 특별함을 더했다. 태연 특유의 가사를 찾아보지 않아도 될 만큼의 쫀득한 발음은 서사를 내세운 전략이 전혀 아깝지 않게끔 단번에 곡 해석을 가능하게 하고, 반복되는 '뻐뻐뻐뻠-'은 그 의도대로 중독성을 심어주었다. 또, 스토리텔링을 중심으로 사운드에 힘을 빼어 태연의 주특기인 지르는 고음 애드립을 뒤에 배치하기도 했으며, 편지라는 콘셉트에 맞게 여백없이 쭉 이어지는 대화같이 노래하는 것도 특징이다. 이 곡에서 가장 재밌는 점 중 하나는 가사에 있는데, 실제 연인 사이에서 나눌 법한 대화를 주제로 가져온 점이 곡의 리얼함을 더욱 살렸다고 생각한다. '나 아님 누가 그런 세상 안아주겠어'와 같이 주제에 적합한 가스라이팅 화법과 코러스의 ‘Gonna block you’를 일부러 ‘Fuck you’로 들리게끔 발음한 것이 그렇다.
'To. X'가 X를 향한 뒤늦은 깨달음이었다면, 다음 트랙인 'Melt Away'은 나를 망가뜨리기 위한 X의 마음을 담아냈다. 이 곡을 설명하기 앞서, 잠깐 짚고 넘어갈 게 이번 앨범에서는 트랙 리스트의 배치도 주의깊게 봐야 한다. X에게 전하는 편지가 콘셉트이지만, 화자는 나와 X를 한 번씩 번갈아간다. 즉, X를 향한 나의 시선과 나를 향한 X의 시선인 곡이 번갈아가면서 배치되었다는 소리이다. (소개 글 보고 하나씩 해석하는데 정말 놀랐던 부분..) 그렇기 때문에 두 번째 트랙인 'Melt Away'는 나에게 가스라이팅을 하려고 하는 X의 시선이 주제인 곡인 것이다. 해당 곡도 기타 리프로 시작하는데, 살짝 재지한 느낌이 있다. 코러스의 지르는 파트 덕분에 1번 트랙과 대조되는 분위기가 연출되고, 개인적은 감상으로는 아트워크를 음악으로 만들면 이 노래이지 않을까 싶었다. 너를 망가뜨리는 것도 재밌을 것 같다던 불씨였다.
그 다음, 'Burn It Down'은 X에게 나를 갖고 노니까 재밌었냐는 물음으로 프리코러스에서 음절을 되게 짧게 쪼개는데 그또한 미친 발음으로 다 들리는 것이 인상깊은 곡이었다. 4번 트랙인 '악몽'은 가스라이팅했던 자신의 행동에 전혀 반성하지 않는 X로 돌아와 멍청한 네 탓이라는 말을 전한다. 이야기의 끝을 향하는 'All For Nothing'은 태연이 작사에 참여한 곡으로 무난한 감성적인 피아노 발라드다. X에게 네가 무시했던 내 마음은 이거였고, 이제 나에게 남은 건 없다는 외침이 애절한 발라드를 더욱 밀도있게 완성시킨다. 마지막 곡인 'Fabulous'은 앞의 곡들과 유일하게 분위기가 조금 따로 노는 곡이기도 하다. 전반적으로 모노톤의 색채가 짙었던 1~5번 트랙과 달리 이번 곡은 조금은 밝은 컬러가 첨가된 느낌이었다. 그러나 전에 비해 밝아졌다고 해서 'X에게 완전히 벗어나 새로운 삶을 사는 나' 따위의 희망은 절대 아니다. 순서에 맞게 X의 시점에서 서술된 곡으로 나 없이 넌 멀리 가지 못할거라는 가스라이팅을 끝까지 시전한다.
태연의 최대 장점은 곡 소화력으로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늘 다채로운 음악을 선보인다는 것이다. 이것이 데뷔 16년차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도 사람들이 매번 그녀를 찾는, 또 그녀가 잘 될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오랜 시간 늘 새로운 것을 가져오는 건 매우 힘든 일이지만, 같은 것이라도 다르게 해석하는 디테일로 사람들에게 새로움을 선사할 수는 있다. 적어도 내가 아는 태연은 후자에 속하며 우리에게 보고 듣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공급해준다. 이번도 그렇다. 보편적인 이야기를 '불완전한 인간상'이라는 개인의 생각을 담아 특수한 이야기로 끌어낸 디테일이 이를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