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뻔뻔하게, 해운대 암소갈비

조PD의 맛있는 이야기

by 조승연 PD

서울 중곡동 삼거리. 어릴 적 살았던 동네에 유명한 외식의 전당이 있었다. 장군갈비. 이름 그대로 소갈비구이를 팔던 곳. 80년대 광진구(당시는 성동구) 고급 외식의 메카. 아직도 중곡동 삼거리에서 영업을 하고 있는 백년가게다. 장군 갈비에서 소갈비를 처음 먹은 건 행운이었다. 집에 부모님의 주례 선생님이 오셨을 때다. 귀한 손님을 집밥으로 대접할 수 없다며 주례 선생님을 장군갈비로 모셨고, 그날 나는 운 좋겠도 집에 있었다. 중곡동 외식의 성지에 초등학교 4학년이 입성하게 된 것이다. 어른들을 따라간 장군갈비는 뿌옇고 달달한 연기로 가득했고 숯불 화로 위 고기 냄새는 황홀했다.

장군갈비.png 자료출처: 소상공인시장진흥공단 홈페이지 갈무리

구릿빛 동판 위에서 구워지는 소갈비의 갈색 유혹은 치명적이었다. 유니폼 입은 종업원 누나들의 예의 바른 가위질로 소갈비가 가지런히 놓이자 난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야들야들 달짝지근한 소갈비는 11살 소년이 지금껏 최고로 알았던 엄마의 맛을 훌쩍 뛰어넘고 있었다. 뜨거운 소갈비 한 점을 호호 찬 김 불어가며 욱여넣기 시작했다. 씹자마자 터지는 고소한 소갈비의 육즙은 11살 소년이 자제하기에는 너무 달콤했다. 주례 선생님과 부모님의 격조 있는 대화 사이를 어린 아들의 젓가락이 종횡무진 헤집고 돌아다녔다. 주례 선생님이 귀엽다며 한 마디를 건네셨다.


"조 선생 아들이 고기를 아주 잘 먹는구나. 상추에도 싸 먹어보지 그러니"

"아니에요. 저는 고기맛만 느끼는 게 좋아서요. 그냥 먹는 게 좋아요"


불판 위 소갈비를 향한 나의 젓가락은 거침이 없었다. 내 앞에 고기가 없으면 주례 선생님 몫까지도 과감히 돌진했다. 뼈에 붙은 고기가 맛있다는 격언을 알지도 못할 나이였음에도 내 앞에 소 갈빗대는 수북했다. 갈빗대에 붙은 고기를 이빨로 물고 늘어져 톡 하고 분리시킬 때의 쾌감은 짱구놀이에서 친구 발을 밟았을 때 이상이었다. 눈치 없음을 넘어 11살 소년의 식탐은 뻔뻔했고, 집에 돌아온 난 잔소리를 10인분도 넘게 먹었다. 애를 집에서 안 먹여 키웠냐, 외식을 자주 못해봐서 그런 거 아니냐며 옥신각신 하시던 부모님 다툼까지 덤으로. 그때부터였다. 나에게 가족 외식 궁극의 지향점이 소갈비가 된 것은.


갈비구이에 환장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100년 전 사람들도 다를 바 없었다. 고기 굽는 연기에 소나무가 죽는다며 평양에선 야외 고기구이를 금지시키기도 했었다.

1200px-평양_모란대와_능라도_-_1921년.jpg 자료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평양 모란대는 소나무 풍치림이 좋은 유원지라 평양부민의 놀이터인데 노니는 주객들이 많다. 명물 불고기는 연기가 나서 청정한 소나무가 시들시들해지고 고기 굽는 내음새가 산보객에게 불쾌감을 주어 관할 대동서에서 금지토록 하였다.” (1935년 5월 5일 자 <동아일보>)


1930년대 평양의 불고기는 국물이 자작한 서울식이 아니었다. 갈비나 기타 부위를 양념에 재워서 굽는 고기를 통칭 불고기라고 일컬었다. 생각해 보라. 얼마나 맛이 있었으면 소나무가 시들시들해질 정도로 구워댔겠는가. 당시 평양 모란대에서 고기 좀 구워본 선조들이라면 장군갈비에서 나의 식탐을 이해하리라. 주례 선생님의 갈비까지 탐했던 나의 젓가락도.

명월관2.jpg 자료출처: 워커힐 홈페이지 갈무리

7~8년 후 부모님 살림살이가 피기 시작했다. 88 올림픽 특수가 경제를 빵빵하게 부풀렸다. 우리 집에도 자가용이 생겼고, 부모님은 고등학생 아들을 차에 태워 암소갈비 외식을 갔다. 장군갈비도 아니고 무려 워커힐 호텔 안의 고깃집 명월관이었다. 아차산 중턱의 한강뷰에서 암소갈비를 구웠다. 공부하기도 힘들 텐데 마음껏 먹으란다. 고등학교 2학년이었다. 소가죽도 씹어 삼킬 나이에 워커힐 호텔 명월관의 암소갈비야 오죽하랴. 다이아몬드 칼집에 곱게 새겨진 갈비구이는 명불허전이었다. 양념은 했으나 달지 않았다. 생갈비의 맛 위에 살짝 단맛이 뿌려진 듯한 고소함. 씹지 않아도 녹고 있는 듯한 부드러움. 고등학생의 거친 입 속 깜깜한 구멍에 햇살이 환하게 차올랐다. 눈치 보지 않고 먹는 암소갈비는 찬란한 광명이었다.


80년 대는 암소갈비 대중화, 대형화의 시대였다. 자가용 보유 가정이 늘어나면서 외식문화가 폭발적으로 상승했다. 갈비를 궁극의 외식 메뉴로 삼은 사람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자가용 덕분에 야외로 갈비 나들이를 가는 집들이 늘어났다. 포천 이동갈비, 태능 갈비 등 서울 외곽에 갈비 단지가 등장한 시기가 이때다. 늘어나는 갈비 외식 덕분에 강남에는 삼원가든, 늘봄가든 등 물레방아와 인공폭포로 무장한 대형갈빗집이 들어섰다. 소 한 마리에 갈비 두 짝이 나오는데 한창때 삼원가든에서만 하루에 갈비 100짝(50마리 분)을 손질했다고 한다. 1930년대 평양 모란봉의 장면이 50년 후에 서울에서 재연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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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이 사주신 암소갈비의 기운으로 대학에 한 번에 합격했고, 여차저차 우여곡절도 있었지만 졸업하고 바로 취업을 했다. 1997년이었다. 폭풍 전야의 평온함에 흥청망청 취해있던 시대였다. 나뿐 아니라 친구들도 별 무리 없이 취업을 했고, 쉽게 지갑을 열었다. 부모님을 따라가던 갈빗집에서 친구들과 폭탄주를 말았다. 소갈비는 안주로도 제격이었다. 달큰 씁쓸한 폭탄주의 폭력적인 술결이 지나간 자리를 숯불향 입은 갈비의 따뜻한 육즙이 보듬어 주었다. 넉넉히 먹었고, 마음껏 취했다. 호시절이라면 호시절이었고, 정신 나간 시기였다면 그 말도 맞다. 갈비구이를 내 돈으로 먹는다는 것 자체만으로 난 의미 없는 자신감에 도취됐다. 분식집 순대를 마음껏 먹을 수 있다고 자신감에 도취되지는 않는다. 소갈비는 외식 피라미드 최상부의 지배자였고 난 그런 소갈비를 먹는 사회 초년병이었다. 100년 전에도 갈비구이를 안주로 먹었다. 하지만 요즘 같은 값은 아니었다.


"1920년대 이후 갈비구이는 선술집의 술안주에 지나지 않았고, 갈비찜은 요리옥에서 신선로 다음으로 자리를 차지하는 고급 음식이 되었다"(주영하 <서울의 근현대 음식>)


"1939년께 낙원동에 평양냉면집이 하나 생기더니 냉면과 아울러 가리구이를 팔면서 그것을 '갈비'라고 일컫기 시작했다.. 냉면 한 그릇에 20전, 갈비가 한 대 20전이었다... 냉면과 함께 갈비 두 대를 시켰다. 모두 60전, 연한 암소 갈비였다"(조풍연 <서울잡학사전>)

종로거리.jpg 1920년대 종로 거리 (자료출처: 서울역사아카이브)

1939년의 1 전이 현재 화폐가치로 약 57원 정도 되니 암소 갈비 1대 20 전이면 1,140원. 소갈비를 먹기에는 100년 전이 진짜 호시절이었다. 1998년 IMF의 광풍이 몰아쳤다. 나의 월급은 정확히 반토막이 났고 대기업 정규직에서 계약직으로 신분도 변화했다. 멀쩡하게 회사를 다니던 사람이 실업자가 되고 평범한 생활을 누리던 소시민이 가난뱅이가 되었다. 폭탄주에 소갈비는 기억의 서랍 깊숙한 곳에 봉인되었다. 내 주머니가 빈약해지면 갈비구이도 값도 싸져야 할 텐데 소갈비는 내 바람과는 다른 길을 향했다. 드실 분만 드시라는 자신감으로 하루가 다르게 값이 올라갔다. 폭탄주 안주로 자신만만하게 선택했던 소갈비구이는 다시 외식 궁극의 지향점으로 복원되었다. 11살 장군갈비의 시절로.


세월은 불판 위 갈빗대가 사라지듯 순식간에 사라졌고, 나는 어느새 중년이 되었다. 나이를 먹는 동안 고기의 트렌드도 변했다. 양념고기 대신 생고기가 대세가 되었고, 수입 쇠고기 덕분에 양념갈비는 프랜차이즈 식당의 흔한 메뉴가 되었다. 하지만 맛은 여전히 귀했다. 소시민 호주머니로 쉽게 감당할 소갈비는 11살 때의 장군갈비의 맛도, 18살 명월관의 암소갈비의 맛도 재연해 내지 못했다. 한 술 더 떠 워커힐 명월관 같은 고급 고깃집들은 하이-엔드급으로 변모하며 서민들은 언감생심 거들떠보기도 힘든 위치로 올라가 버렸다. 소갈비도 양극화가 심화되었다. 맛도 가격도.


퇴사 후 부산 해운대로 여행을 간 것은 갈비 때문은 절대 아니었다. 무늬만 프리랜서의 여유로운 일정과 넓은 바다를 보고 싶어 한 아내의 계획이 일치했고, 마침 그곳에 해운대 암소갈비가 있었을 뿐이었다.

"여보. 해운대에 왔으니까 여기서 유명한 음식을 먹어야 되지 않을까?"

"그래야지. 뭐 생각나는 거 있어?"

"해운대니까 해운대 암소갈비. 비싸긴 하지만 그래도 한 번 먹어볼 만 해"

"그래. 먹자. 까짓 거 여기까지 와서 그것도 못 먹냐". 여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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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촬영 차 왔었던 해운대 암소갈비의 단아하고 정감 있던 기와집은 이제 사진 속에서나 찾아볼 수 있다. 차가운 시멘트 건물에 나무 외벽을 덧댄 현대식 건물이 '해운대 암소갈비' 간판을 거대하게 달고 있고, 식당 앞엔 대기줄이 어마어마했다. 일 인분 54,000원의 소갈비를 위해 이렇게 많은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


61년 업력의 해운대 암소갈비는 한 때 한국 전쟁 때 부산에 피난 온 수원 화춘옥(수원 왕갈비의 원조)의 창업주가 양념갈비 비법을 알려줬다는 설이 있었다. 하지만 해운대 암소갈비의 개업 연도가 1964년이니 그 설이 딱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1시간 30분을 기다려 드디어 입장. 해운대 암소갈비 특유의 주물 불판 위에 양념갈비가 얹힌다. 생갈비는 점심이면 한정 수량 소진으로 저녁엔 주문조차 안 되지만 난 이곳에선 생갈비에 관심 없다. 노포의 전통으로 조미된 양념갈비의 맛이 더 궁금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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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암소갈비는 양념이 희미하다. 간장양념을 한 듯, 안 한 듯 붉은 살코기의 빛깔이 선명히 남아있다.

언뜻 보면 생갈비처럼 보이지만 불판 위에 얹히면 연기의 맛이 다르다. 달콤하다. 타지 않게 잘 구워서 한 점 입에 넣는다. 절묘하다. 양념의 단 맛이 갈비의 기름진 고소함을 침범하지 않는다. 칼집이 촘촘히 잘 들어간 육질은 야들야들하다. 소주로 입을 헹구고 다시 갈비 한 점. 사람들이 1시간 넘어 줄을 서는 게 이해가 된다. 바싹 익어도 고기가 뻣뻣하지 않다. 잘 배인 양념은 과하지 않다. 은은하게 갈비의 풍미를 끌어올리고, 나의 옛 기억도 끌어올린다. 부모님이 사주셨던 예전 소갈비의 맛. 허겁지겁 젓가락을 놀렸던 11살 첫 소갈비의 기억이 고스란히 내 입 안 작은 공간에 다시 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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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념갈비 추가해 주세요"


1인분으로 멈추기엔 극도의 자제력이 필요하다. 딱히 그럴 필요성도 못 느꼈다. 11살 때 부모님 주례 선생님 앞에서도 뻔뻔하게 젓가락을 놀렸던 내가 굳이 아내 앞에서 식탐을 참을 이유가 있을까. 종업원분이 정리된 갈비 몇 대를 가져간다. 된장찌개 용이다. 해운대 암소갈비는 불판에 육수를 붓고 감자사리를 넣어 먹는 걸로 유명하지만 내 입맛엔 감자사리보다 갈비 된장찌개다. 굽고 남은 갈비 몇 점을 된장찌개에 넣어 끓여주는데 그 맛이 기가 막히다. 된장찌개가 바이올린 독주라면 갈빗대 넣어 끓인 된장찌개는 현악 4중주다. 찌개의 맛이 깊고 화려하다. 갈빗대 몇 점이 선사한 극적 변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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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소갈비를 먹고 나니 "잘 먹었습니다"라는 말이 자연스럽다. 문제는 가격. 해운대 암소갈비 1인분에 54,000원, 11살 적 장군갈비가 1인분에 63,000원, 워커힐 명월관은 77,000원. 뭐 하나 만만한 값이 없다. 그래도 난 먹으려 한다. 매일 먹는 것도, 매달 먹는 것도 아니다. 어쩌다 한 번이다. 쪼들리는 지갑이야 수입이 불규칙한 프리랜서인 지금이나, 따박따박 월급 받아오던 방송국 피디 시절이나 매한가지다. 삶에, 돈에 쪼들린다고 내 입맛과 추억마저 쫄아버리고 싶진 않다. 어쩌다 한 번 먹는 소갈비, 지나온 추억의 양념맛도 더 할 수 있는 진짜 암소갈비를 뻔뻔하게 뜯고 싶다. 제대로 먹고 또 버티고, 또 걸어가면 된다. 그럼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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