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렌시아의 맛
'스페인' 하면 떠오르는 것은?
열정, 투우, 강렬한 햇살, 레알 마드리드 vs 바르셀로나, 가우디, 자라, 알람브라 궁전, 순례자길.
'스페인 음식' 하면 생각나는 것은?
하몽, 빠예야, 감바사, 타파스.
3주간 EBS 세계테마기행 촬영 차 스페인을 다녀왔다. 이번이 총 4번째 스페인 입국이었다. 기존 3번의 방문과 다르게 이번 스페인 입국은 확실한 목적이 있었다. '스페인 미식 기행'. 그리고 4번째 방문에서야 알게 되었다. 스페인의 맛은 가족과 공동체에 있음을.
첫 촬영지는 발렌시아의 부뇰이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축제인 '피에스타 토마티나'. 토마토 축제가 열리는 작은 마을이었다. 매해 8월 마지막주 수요일에 열리는 토마토 축제는 강렬한 붉은색과 토마토를 던지고 맞는 원초적 단순함으로 수 만 명의 세계인을 불러들인다. 8월 27일에 개최된 축제에도 어김없이 수많은 인파가 몰렸고, 이제는 사전 예약을 해야 토마토를 던질 수 있는 메인 거리에 입장할 수 있었다.
테러의 위험 때문인지 물도, 작은 파우치나 카메라도 갖고 들어갈 수 없었다. 인구 9000여 명의 작은 마을 부뇰의 거리에서 토마토를 던지고 맞는 원초적 축제는 개인적으로 두 번째 경험이었다. 2004년 첫 방문 때나 21년이 흐른 지금이나 축제의 붉은 강렬함은 여전했다. 뜨거운 태양 아래 으깨진 토마토의 시큼 털털한 냄새도. 하지만 나에겐 토마토 축제보다 더 강렬한 기억이 새롭게 새겨졌다. 축제 전날 밤, 부뇰 거리를 가득 채웠던 주민들의 모습이었다.
'잠들지 않는 밤'. 토마토 축제가 전 세계인들의 축제라면 '잠들지 않는 밤'이라 불리는 전야제는 부뇰 지역민들의 축제다. 8월 마지막주 화요일의 해가 지면 부뇰의 거리는 테이블과 의자, 그리고 사람들로 가득 찬다. 가족과 지인들이 삼삼오오 모여 가벼운 다과와 와인, 맥주를 곁들인 수다로 밤을 지새운다. 그리고 그 가운데에는 '보요'라는 부뇰의 향토 음식이 자리 하고 있다.
피자와 조각빵 사이 어딘가에 있을 듯한 모양의 보요는 가족, 친지들이 함께 먹기 위해 개발된 음식이라고 한다. 넓게 성형된 반죽 위에 소시지, 초리소, 베이컨 등을 조각조각 올리고, 화덕에서 구워낸 음식이다. 보요를 한 조각씩 나누고, 와인이나 맥주를 곁들이며 모임을 갖는 게 토마토 축제 전날 밤의 전통이라고 한다. 보요가 없다면 부뇰의 저녁 식사인 '보카디요'를 가져와도 된다. 보카디요는 바게트 빵 안에 햄이나 오믈렛, 소시지 등을 곁들인 스페인식 샌드위치이다. 대단한 음식은 없다.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음식과 넓적한 '보요'를 함께 나누며 지인들과의 정을 나누는 밤이다.
보요의 빵 맛은 담백하다. 소금이나 설탕이 조미되지 않은 순박한 빵 위에 짭짤한 소시지와 베이컨의 맛이 조화롭다. 대단하진 않지만 누구도 거부감이 없을 맛이다. 반주로 술 한잔을 곁들이기도 좋고, 한 끼 식사로도 손색이 없다. 뜨거운 햇볕이 사라지고 선선한 바람이 부는 부뇰의 밤. 나는 부요 한 판을 놓고 웃고 떠드는 주민들의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노인, 중년, 청년, 아이가 어우러진 거리였다. 노란색 가로등 아래 풍요로운 행복이 잠들지 않을 밤이었다.
발렌시아의 대표 음식은 누가 뭐래도 빠예야다. 발렌시아 빠예야 협회는 '빠예야 발렌시아나(Paella Valenciana)'라고 해서 발렌시아식 빠예야를 규정하고 있다. 쌀, 닭, 토끼, 생토마토, 줄기콩, 샤프란 등 협회가 지정한 재료 이외의 것이 들어가면 진정한 발렌시아의 빠예야가 아니라고 한다. 해산물이 들어가면 정통 발렌시아 빠예야가 아닌 셈이다. 빠예야 맛집은 대부분 도심 외각에 있다. 도심에서는 장작불 연기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빠예야는 두꺼운 무쇠팬에 가스불이 아닌 소나무 장작불로 끓이는 것이 전통이라고 한다. 소나무 장작의 연기가 스며들어야 진짜 맛이 난다고 하고, 그래서 빠예야는 무쇠팬 그대로 제공이 된다. 그릇에 덜어 내면 연기의 향이 빠지기 때문이란다. 빠예야에 대한 발렌시아 사람들의 진심이 느껴진다.
빠예야는 가족의 음식이다. 최고급 식당에서도 빠예야는 종업원이 음식을 나눠주지 않는다. 손님들이 직접 팬에서 떠서 먹는다. 빠예야를 식탁 중앙에 놓고 식구들이 함께 뜨고, 함께 먹는다. 이 모습이 빠예야 시식의 완결점이다. 마치 우리네 밥상의 가운데 찌개가 놓이고 함께 나눠 먹는 모습처럼.
빠예야 맛의 핵심은 '소까랏(Soccarrat)', 바로 누룽지이다. 빠예야 조리 시 가장 주의를 기울이는 부분이 소까랏이 만들어지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팬에 눌어붙은 갈색 소까랏의 짭짤한 고소함은 놓칠 수 없는 맛이다.
빠예야는 천천히 먹어야 한다. 한국의 쌀밥처럼 폭신하지 않고 다소 딱딱하다. 설 익은 듯한 쌀을 꼭꼭 씹으며 오랜 시간 즐기듯 먹는다. 빠예야를 먹는 긴 시간을 함께 하는 건 식구들의 대화다. 최고의 곁들임 맛이다.
마드리드, 바르셀로나에 이어 세번째로 큰 도시인 발렌시아는 스페인의 대표적인 미식 도시이다. 지중해의 해산물, 너른 평원의 가축과 토마토 그리고 스페인 최대 생산량의 쌀 등 다양한 식재료는 발렌시아를 맛있는 도시로 발전시켰다. 풍성한 식재료는 발렌시아의 특별한 식문화를 만들었는데 바로 '알무에르소(Almuerzo)'다.
'두 번째 아침'을 의미하는 알무에르소는 한국말로 풀이하면 '새참' 정도가 되겠다. 농부들이 오전 노동으로 출출해진 배를 채우던 풍성한 식사가 발렌시아만의 독특한 식문화가 된 것이다. 알무에르소를 표현하는 특징은 메뉴가 아닌 풍성함이다. 넉넉히 먹고 일하라는 의미로 엄청난 양의 음식을 준다. 빵도 크고 달걀 프라이도, 감자튀김과 소시지, 소고기도 '으악' 소리가 날 정도로 많이 준다. 고칼로리 한 상이다. 각종 나물에 고봉밥을 슥슥 비벼 먹던 한국 논두렁의 새참과 이란성쌍둥이다. 한국 농촌의 새참 마무리가 막걸리 한 사발이라면 발렌시아는 '끄레마엣(El Cremaet)'이다.
레몬, 계피, 설탕을 넣은 단지에 럼주를 붓고 불을 붙인다. 알코올은 증발하고 설탕이 녹은 단술에 커피 에스프레소를 섞으면 끄레마엣이다. 달고 쌉쌀한 고열량 후식이다. '두 번째 아침'은 끄레마엣으로 마무리해야 진정한 알무에르소가 완성된다고 한다. 발렌시아의 햇살은 강하고 세차게 내려 꽂힌다. 그 햇살 아래 흘린 노동의 땀을 보충하고 새로운 활력을 주기 위해서 알무에르소는 달고, 푸짐하고, 기름지다.
발렌시아 자치주의 식품창고라 불리는 곳이 있다. 알부페라 습지 지역이다. 바다와 호수, 갈대 습지와 너른 평야에는 논이 가득한 곳이다. 꽃게, 숭어, 장어 등이 많이 잡히는 알부페라는 어부 공동체로도 유명하다. 1250년에 설립됐다는 어부 공동체에서는 매해 강 하구 어장을 제비 뽑기로 어부들에게 분양한다. 좋은 자리를 일부가 독점하는 폐해를 방지하고 지역민들이 공존하는 커뮤니티를 1000여 년 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알부페라에라는 다른 지역에서 찾기 힘든 명물 음식이 있다. '아이 이 뻬브레 안길라(Ali I Pebre Angulla)'. 한국어로 바꾸면 '마늘고추 장어탕'이다. 알부페라 강 하구에서 통발로 잡은 민물장어를 마늘, 고추, 피망가루, 소금 양념에 감자만 넣고 끓인 음식이다. 단순한 조리법이지만 맛은 깊다. 장어의 고소함과 마늘, 고추의 매운맛이 조화를 이룬다. 폭신한 감자는 맛들어진 조연이다. 한국인의 입맛에도 낯설지 않다. 여수 장어탕을 찌개로 졸여냈다고 할까. 장어 맛의 녹진함이 정겹고 맛있다. 장어가 없으면 개구리나 돼지족을 넣기도 한다. 모두 젤라틴이 풍부한 식재료들이다.
빠예야, 보요, 알무에르소, 아이 이 뻬브레 등 발렌시아에서 만난 음식들은 맛있었다. 재료가 주는 맛을 넘어 가족과 공동체가 느껴지는 따스한 맛이었다. 푸른 논이 광활히 펼쳐진 야외 자리에서 스페인식 장어탕을 먹고 있으니 가족들이 생각났고, 친구들도 떠올랐다. 그들과 함께 이 자리에 있으면 더 행복하리란 생각도. 짓궂은 녀석은 "논에, 장어탕에 여기가 여수냐"라고 농을 건넬 수도 있다. 함께 찌개국물을 나누고, 새참을 건네 듯 빠예야를 먹고 알무에르소를 나누는 스페인이어서 더더욱 그럴 것이다. 스페인의 맛에는 사람의 온기가 있다.